길 위에서
딩동 딩동 ♫ 딩동 딩동 ♬
마침내 나도 피아노를 치게 됐다. 눈동자는 악보의 높은 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를 오가느라 정신이 없고, 두 손은 건반의 좌우에서 허우적대지만 그래도 이제는 제법 소리가 나온다. 정확히 1년 전까지 나는 피아노를 쳐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감히 배우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2010년, 직장 밴드 동호회에서 하모니카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악기를 배우고, 연주하며 지냈지만 정작 피아노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 나이에는 너무 늦었다’라는 생각이 피아노와 거리를 두게 한 것 같다. 양손을 따로 움직이고 페달까지 밟아야 하는 피아노가 사실 그렇게 만만한 악기는 아니다. 그런데 기회는 엉뚱한 데서 왔다. 인터넷으로 지역 커뮤니티를 검색 중 정말 레슨비가 싼 곳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렇게 '정 하다 안 되면 그만 두자’는 생각으로 출발한 피아노 레슨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며 1년을 보냈고, 이제는 취미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무언가를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막상 무의식 속에서 소망하던 일을 만나면 갈피를 잃고 만다. 내 경험상, 과거에 하고 싶었고 지금도 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것은 대개 생각에서 비롯된다. 내게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그랬다. 지난날 자동차나 TV, 냉장고와 함께 가정환경조사서의 대표 품목인 고가(高價)의 피아노에 대한 경외심도, 내 생각을 과거에 묶어 놓는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세상에 배우기 힘든 것이 어디 피아노뿐이겠는가? 연주를 제대로 하려고 하면 만만한 악기는 하나도 없다. 어려운 걸로 치자면 기타처럼 플랫으로 나뉜 것도 없는 사이에서, 정확한 음정을 찾아야 하는 바이올린이나 첼로도 이에 못지않을 것이다. 지금은 저렴하고 편리한 디지털피아노가 지천으로 널린 세상인데, 왜 이런 생각을 진작에 못했을까?
악기 연주는 여행과 몸짱 만들기처럼 버킷리스트에서도 빠지지 않는 대상이지만 정작 이를 시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돈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나름 노력한다고 해도 실력이 확 느는 것도 아니라서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악기 배우기는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진득하게 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내가 악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지금부터 8년 전이다. 어느 날 사내 인트라넷에 밴드 동호회를 만든다는 내용이 올라오자, 대번에 눈길이 갔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도 하고는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어찌 됐든 자신이 할 줄 아는 악기가 있으면 가져와 보라고 하니 집에서 간간히 불던 하모니카를 들고 첫 모임에 참석을 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내가 그나마 해 본 악기라고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하모니카밖에 없었다. 가서 보니 일렉기타와 색소폰 쪽에는 출중한 실력을 갖춘 사람도 있었지만, 옛날에 좀 불어 봤다고는 해도 초보자와 다름없는 사람, 그냥 밴드 생활을 하고 싶어 찾아온 사람 등 꿈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밴드 한다는 데 하모니카를 들고 온 사람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과 중복되는 악기가 아니니 그냥 해보라고 하기에 자연스레 내 첫 악기는 하모니카가 되었다. 그런데 실제 공연에서 연주자나 대부분의 가수들이 사용하는 하모니카는, 길이 10cm 정도의 다이아토닉(10홀)이라는 작은 것이다. 이 하모니카는 들숨, 날숨으로 표현해도 20가지 음밖에 안 나와, 나머지 음은 밴딩이라는 기법으로 소리를 내야 하는데 이것이 이 하모니카의 매력이기도 하다. 리 오스카의 ‘Before the rain’이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떠올리면 바로 연상이 될 것이다.
이때부터 시작한 레슨은 오카리나와 클라리넷을 거쳐 이윽고 색소폰 구입까지 이르렀으니, 음악보다 악기에 더 쏟은 열정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난 그래도 딴 짓은 안 했다는 변명으로 합리화하고 살아간다. 살아오면서 많은 취미생활을 했지만 인간다운 삶이란 측면에서 내 인생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악기를 알기 이전과 이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악기는 내게 많은 선물을 안겨줬다.
악기를 연주하게 되면서 더 많은 음악을 듣게 되었고, 이것은 전반기 삶에서 내가 해오던 영상이라는 작업을 도우며 디테일을 채워주기도 했다. 한편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행복이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행복의 기원>의 저자 서은국 님은 행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 행복이란 고차원적인 관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설계된 경험인, ‘쾌락’이므로 자주 여러 번 느끼도록 하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행복이 아니라 사소한 즐거움이라도 자주 느끼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하니, 높고 먼 곳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행복이 의외로 가까이에 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확행(小確幸)-일상의 작지만 성취하기 쉬운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 또는 그러한 행복을 말함-을 추구하는 데 악기만 한 것도 없다.
버킷리스트는 지우라고 있는 것이지 기록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지워나가자. 그런데 악기는 제일 먼저 줄부터 긋고 시작하자. 악기는 샀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즐기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이다. 대신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 퇴직 전에 이 글을 보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부터 당장 시작할 것을 권유하고, 퇴직 후 세대에게는 ‘뭔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고 싶다.
언젠가 책을 보다가 이런 글귀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취미다”. 단지 한 문장으로 취미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했을 뿐, 나는 이 글이 종교를 부정한다고 보지 않는다. 당신이 이제부터 연주할 악기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다.
당신의 악기는 평생을 함께 할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