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계기로, ‘일과 삶의 균형’을 통해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자는 의미의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워라밸이라는 표현은,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개인의 업무와 사생활 간의 균형을 묘사하는 단어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새삼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을 보면, 여전히 우리 사회가 일과 삶의 균형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돌아보면, 과거 주 5일 근무제의 시행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놀라움이었다. 당시 많은 언론들은 시기상조를 거론하며, 근로시간 단축이 결국은 산업계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우려했다. 나 역시 외국 출장길에서 보던 부러움이 현실이 된 것은 좋았지만 한편으로 걱정을 떨칠 수 없던 기억이 난다
. 평일 오후 6시만 돼도 거리에 인적이 드물고, 주말에는 거의 모든 공공기관이 문을 닫는 선진국을 보면, 도대체 이렇게 해도 먹고살 수 있는 것인지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주 52시간 근무라 해도 선진국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늘어난 여가 시간이 직장인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일과 삶의 균형'은 현역(現役)뿐만 아니라, 인생이모작을 꿈꾸는 신중년에게도 아주 중요한 가치 기준이다. 신중년 대부분의 삶에서 일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일이 사라졌다는 것은 한편으로 축복받을 만한 일이기도 하나, 어떤 이유로든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두렵고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늘어난 수명만큼 늘어날 생계비 걱정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하릴없이 늙어갈 생각을 하면 어느 누구 하나 마음 편한 사람이 있을까?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왁자하게 떠들면서 자라고 성장해, 산업화의 역군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던 베이비부머 세대가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학교 운동장을 꽉 메우던 그 많은 학생들이 어디 갔나 싶었는데 삶의 틈바구니에서 다들 건재해 있던 것이다.
1955~1963년생인 이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인구 수만도 700여만 명이라고 한다. 부모를 모셔야 하고 자식을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라는 자평(自評) 속에서도 가장의 역할을 부담스러워 않고 살았는데, 이제는 자신의 처지마저 신경을 써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여전히 많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취업을 원하고 있지만 청년들의 실업에 밀려 사회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건강수명을 사는 동안에는 일을 하면서 일정한 소득도 얻고, 삶의 보람과 가치도 느끼면서 살아야 할 텐데 일자리가 없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돌이켜보면, 지금 세대보다 낫다고는 하나 우리 젊은 날에도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는 힘들었다. 젊을 때도 어려웠는데 나이 들어 일자리를 가지려면 그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전반기 삶의 경력을 살리든, 새로운 것을 배워서 시작하든, 할 일을 찾아야겠다. 우리에게 일은 단순한 소득이 아니라 자존감이고 자신감이며 사회적 관계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현역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겐 할 일이 기다리는 아침이 소중하다. 매일 눈 뜨며 맞는 아침이 내 생(生)의 가장 젊은 순간이라고 한다.
젊을 때,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