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보다 눈부신 아내
요즘은 예전 같지는 않은 것 같지만, 과거 사내들에게 삼국지는 꽤 인기 있는 콘텐츠였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있었고, 이문열의 삼국지가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다. 만화 삼국지를 스쳐, 코에이가 만든 PC게임 삼국지도 아스라한 추억이다. 여러 세대를 관통하는 이야기 소재였는데, 요즘 같은 콘텐츠의 홍수 시대에는 비슷한 무언가를 건져내기가 쉽지 않다.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음악이든 세상 누구나 알고 있고 알아야 할 것 같은 이야기 소개가 없다. 그나마 해리포터 시리즈가 가장 비슷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삼국지 세대 아재들에게 시안은 '장안'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동탁이 낙양을 버리고 천도한 그곳이 바로 장안 아니던가. 진시황의 진나라와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천하를 제패하려면 장안을 차지해야 한다고까지 했으니, 중국 역사에 있어 이 정도로 중요한 도시도 따로 없다. 물론 인구가 늘고 정치경제적 변화 속에, 장안은 더 이상 수도로서 기능하기 어려워졌다. 중심지에서 벗어난 덕분에 외세의 침략도 줄었다. 평화 속에 발전은 더뎠지만, 덕분에 과거 무차별적인 개발을 피할 수 있었다. 여러 시대가 묘하게 뒤섞였지만, 실크로드가 시작하는 도시 시안은 이를 하나로 관통하는 매력이 분명했다.
갑작스러운 삼국지 향수를 뒤로 하고 시안 거리에 나섰다. (아마도) 당나라 복색을 갖춘 여인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처음에는 꽤나 어색하게 느껴진 모습이 금세 편안해졌다. 어쩌다 한두 명이 아닌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나타나는데, 익숙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디 우리도 타임머신 도전해 볼까? 티끌 하나 없이 백자처럼 뽀얗게 화장(사실 변장)을 하게 하고, 묵직한 가발에 전통의상을 24시간 빌려준다. 250위안, 은근히 비싸다. 말이 24시간이지, 어차피 화장을 지워야 하는데 24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총총총 발걸음을 돌려 본다.
하지만 아무래도 당나라 이모들이 계속 눈에 밟히는 걸 어쩌지? 경복궁에서 한복을 입어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경복궁 한복은 과거로 돌아간다기보다는 '한복' 자체의 아름다움과 현대적 변주에 집중했다면, 여기 중국의 '한푸'는 정말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다. 중국 공자 맹자 할아버지가 "패션의 완성은 헤어와 메이크업"이라고 이야기한 건 다 이유가 있더라.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으니, 일단 총총총총총 발걸음을 계속해서 돌려 본다.
계획한 대로 시안 성벽에 올라 자전거를 빌려 타고 생각해 보자..라고 계획했는데, 시안 성벽 위가 온통 거대 풍선 조형물로 가득하다. 널찍한 성벽 위에서 자동차 걱정 없이 자전거를 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생각도 못한 상황이다. 알고 보니 설날을 맞아 일종의 기념행사가 펼쳐지고 있더라. 해가 기울자 풍선 조형물에 조명까지 들어온다. 고전적인 성벽에 이토록 부자연스러운 조형물이라니, 중국인들이 좋아할 다양한 콘텐츠를 꾸며놓았지만, 어색한 건 어색한 거지.
어쨌든 중국인 취향 저격은 분명해 보인다. 성벽 위가 풍선 조형물과 인파로 한가득이다. 당장 자전거는 꿈도 꿀 수 없다. 한참을 걸어가야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는 설명에 안도하면 천천히 전진해 본다. 천천히 걷다 보니, 묘하게 중국인 취향에 스며들기 시작하더라. 빨갛고 노란 강렬한 원색 풍선도 더는 눈에 피로를 더하지 못했다. 게다가 문화유산 위여서 그랬을까, 당나라 이모님들이 도심보다 훨씬 많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바로 운명, 성벽 위에도 당나라 복색 변신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두둥!
워! 심지어 2시간여 빌리는 데 170위안으로 상대적 저렴되시겠다. 반납을 위해 성벽 입장권을 다시 살 수는 없으니, 성벽이 문 닫기 전까지만 돌려주면 된다는 거다. 아내는 다음 날 당나라 이모로 변신해 도심 곳곳을 누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똥이 되더라도 아낄 수 있을 때 아껴야지. 이미 해가 기울어 밤거리를 헤맬 수밖에 없겠지만, 내일 다시 입장료를 내고 성벽에 오를 수는 없지 않나.
결국 아내도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여 당나라 시대로 돌아갈 채비에 나선다. 잠깐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변신을 위한 제법 꼼꼼한 손길은 한 시간 남짓 이어진다. 다소 과한 것도 같은 달걀 분장이 낯선 아이들은 살짝 걱정하는 눈치다. 하지만 화려한 가발 장식을 더한 의상까지 더해지자, 이내 환호성이 이어졌다.
당나라 이모 변신을 도와준 직원에게 아내의 신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무언가 대답하기 곤란한지 말을 더듬고 머뭇거리자, 직원 이상으로 아내가 당황한다. 다행히 직원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번역기를 돌려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머뭇거린 이유는 단순히 언어 소통의 문제였나 보다(라고 하자). 직원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황족이라는 답을 들려줬다. 공주라고 해야 하려나, 황후가 더 어울리겠지? 아무튼 장안 최고 미인이라는 양귀비보다 눈부신 아내님, 사랑합니다. 홍홍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