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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실격 May 15. 2023

"언젠가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는 궤변이다

살아갈 이유를 '납득하고 싶다'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한다. 이때 흔히 하는 말은 이거다.

 “지금이 힘들어도 버텨 봐.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지 몰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통상적으로 가지는 관념이지만, 자살을 결심한 사람도 이전까지 우리와 같은 생각과 관념을 지니며 살았다. 예시로 든 사람 또한 자살을 결심하기 전까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유유상종인지 비슷한 사람끼리 인력 같은 게 작용하는지, 내 주위는 신기할 정도로 자살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친구가 2명뿐인데. 한 명은 자살하고 싶단 말을 했고, 우리 가족 중에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자살을 생각했다.

 아동센터에 근무하던 시절 내가 학생 상담을 전담했는데. 굳이 상담을 강요하지 않아도 내게 자살 상담을 했던 학생이 4명이나 된다. 30명의 초중학생 중 4명이라니, 다른 의미로 굉장하다.

 자살에 관해 얘기를 많이 듣다 보니, 말에 무게를 재는 일이 없던 나도 자살 상담을 하는 순간은 진지했다.

 손에 메스를 쥔 의사와 같은 심정으로 상담자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단 생각을 하자 한마디 한마디가 무거워졌다. 이성과 첫 만남을 가질 때처럼 어떤 답을 하냐에 따라 표정이 일희일비하는 것이 미스터리 공포게임을 할 때와 같은 심정이 된다.

 상대방도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경청을 할 텐데. 그런 상대에게

 “언젠가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라는 말은.

 “나는 네 이야기에 관심 없어. 생각하기 귀찮아.” 정도로 들리기 마련이다.

 장기나 바둑을 두다가 더 이상 수가 떠오르지 않는 패닉과 이 감정은 상당히 유사하다.

 알 수 없는 현상에 답을 요구하면 저도 모르게 어디서 들어본 그럴듯한 답변으로 상황을 모면하지만 바둑이나 현실이나 금방 상대가 심리를 간파한다. 가장 쉬운 길을 택하는 순간 패배한다.

 바둑을 두는 상대나 자살자의 공통점은 극도로 상대 심리에 정통하며 예민하단 사실이다.

 때문에 자살자는 나의 안일한 심리를 꿰뚫어본다. 프로 바둑기사보다 예민하게 공기를 읽어내는 이가 바로 자살자다.

 깊은 사색을 거쳐 “이 세상에 살아갈 가치가 없다”라는 결론에 까지 이른데다, 더 이상 결론이 나지 않는 현자를 상대로 웬만한 감언이설로 그를 설득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삶의 목표에 관해 물어온다. 자살자들이 자살이란 결론에 도달하는데 대략 반나절에서 하루 이상 소모할 텐데. 질문을 받는 순간 어떻게 결론을 내겠는가?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목표 따위 모른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그럴 듯한 말을 내뱉으면 실망한다.

 설득해주길 바라는 이가 자신의 죽음 또는 삶에 대한 가치에 무관심하다면 자살자는 상대가 어떻게 보일까?     

 이 녀석은 나보다 행복하구나. 어느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와버린 걸까? 내가 사색을 통해 얻은 통찰은 비정상인가?

 이 순간 인간은 세상에 소외된다. 공감 받을 수 없는 세상을 눈치 채고 내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망각한다. 정말 좋은 일이 일어날까?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건넨 손길마저 외면당하는데. 나를 정말 사랑해줄 이가 있을까? 세상이란 이렇게 낯선 존재였나?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은 약자지만 동시에 현자다. 삶의 의미를 회고하다 결국 죽음에 도달하고 우리는 논리적으로 삶을 살아갈 가치에 대해 논하다 의미를 못 찾고 방황한다. 그럼에도 죽을 수 없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카뮈는 시지프처럼 인간의 삶은 반복되며 우리가 반복되는 삶 속에 즐길 거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돌덩이 옮기기 대신 게임이나 술래잡기로 생각하면 그 놀이들이 무의미함에도 우리는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즐길 수 있었으면 진작 즐겼지. 대체 어떻게 즐기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설득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즐길 방향과 의미를 상담자에게 이런 형태로 말한다.     

 “왜 사는 걸까? 죽고 싶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 찾아줬으면 한다.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너는 알고 있니?

 이 물음을 하는 동안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자신을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공포가 엄습한다. 세상은 아름답고 올바른 것만을 보여주는데. 내가 품은 이 부정적 감정이 틀린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가 엄습한다.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은 자연풍경 뿐인 고요한 세계가 낯설게 느껴진다. 세상이 꾸며낸 화려하고 따뜻한 세상과 자신의 부정적 에너지가 맞물리는 교집합을 찾지 못한다. 모두가 행복을 구가하는데, 혼자 ‘자살’이란 부정적 키워드를 탐구하고 싶단 욕망이 더욱 고립되도록 만든다.

 의문은 인간을 괴롭게 만들지만, 고독만큼 피폐하게 만들지 않는다. 탐구를 통해 얻은 고립된 인간은 모든 게 아무래도 좋다.

 이제 이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것은 삶의 의미가 있는지 찾는 것이 아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니 우리가 할 말은 질문과 정확히 매치 되는 대답이 아니다.

 이것은 내 친구와 내가 나눴던 대화를 축약한 예시문이다.     

 “너는 살아가는 목적이 있어?” 친구가 물었다.

 “딱히? 여자친구 사귀고 좋은 집에 살고 싶긴 한데. 그게 목적이라 하긴 그렇지. 나도 모르겠다. 원래 그런 거잖아.” 내가 말했다.

 “다 이런가?”

 “애초에 목적이 있는 게 더 허무하지 않아?”

 “왜?”

 “그럼 실패했을 때 어쩌려고?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일어나야지. 그렇게 사는 거잖아.”

 “지금 보니 네가 지금 그 상태 같은데.”

 “나도 말하면서 그런 거 같더라.”

 “말로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지만, 진짜 넘어지면 못 일어나. 그게 가능했으면 밀림에서 인간이 살아남았겠지.”

 “나는 뭘 실패했지?” 친구가 물었다.

 “그러게. 의대 합격했잖아. 전부 성공했는데. 어디서 회의감이 드는 걸까?”

 “애초에 나는 왜 거기를 들어가려 했더라?”

 “그건 네가 알겠지.”

 공원에서 같이 맥주를 마시다 친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친구 머릿속 어떤 스파크가 뛰는지 볼 수 없지만, 가만히 맥주를 마시다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오케이!”

 

 큰소리로 외친 다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다음, 안녕을 고했다. 뭐가 오케이인지, 무엇이 친구를 바꿔놓았는지 정확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다 죽어가던 마른 잔디 같이 축 늘어진 친구가 활력을 얻은 계기 또한 알았다.

 친구가 ‘납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력은 ‘납득’에 있다.      

 조금 올드한 표현이지만, 살아가고 행동하는 궁극적인 행복을 위한 행동에는 ‘긍지’가 있다. 긍지는 ‘납득’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긍지를 품고 행할 수 있는 모든 행동에는 우리 나름대로의 ‘납득’이 있다.

 살아가는 이유. 그것을 납득하기 위해 우리는 사색했다. 자살을 생각했다. 이 세상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 생각했다.     

 평범하게 사는 인간은 반드시 자살을 결심하고 그 논리 구조 속에서 각성한다. 우리는 이 각성을 통해 무기력하고 반복적인 삶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난다. 시야가 넓어진단 뜻은 바로 이 각성 상태에 이른 자들이 도달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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