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앓는 두 여자의 생존 일지
지잉, 휴대폰이 울린다. 한파특보 발효 중▲ 안전안내문자다. 달아날 곳 없이 춥다는 건 곧 나의 생일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사주로는 신금, 꽁꽁 언 땅에 서 있는 나무. 나는 소한과 대한 사이에 태어났다. 동쪽이 사라진 밤에. 기온이 낮아지면 덩달아 기운이 빠진다. 몸 안에 함박눈이 쌓인 것 같다.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기분이 지속되면 온기를 찾아 문을 두드린다. 정신과도 가고 땀이 뚝뚝 떨어지는 하타요가도 하고 사주나 신점도 본다. 사주도 흥미롭지만 신점은 상담사(무당)가 모시는 신에 따라 이야기가 무궁무진해 더 재밌다. 하소연도 잘 들어주고. 괜히 K-정신과가 아니다.
몇 년 전 정릉에서 신점을 봤다. 무당은 재래시장과 집이 뒤섞인 동네에서 유일한 신축 오피스텔에 살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220mm 정도의 샤넬 부츠가 눈에 들어왔다. 발이 작으면 작두에 닿는 면적이 적어 덜 아플까, 진짜 발이 뜨는 건가 그런게 궁금했다. 신당이 모셔진 방으로 갔다. 나이는 서른쯤. 눈매가 가늘고 야무진 인상의 여자는 나를 보자 마자,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 여길 찾아오셨네요"라고 했다. 일단 맞말. 내게 합격 목걸이가 있었다면 건네주었을 것이다. 공신력도 동시대 감각의 사회적 합의에 불과하다고 믿는 불신론자를 알아보았으니까. 그 뒤로도 여자는 내가 고집이 세다는 것, 부모덕이 없다는 것 등을 알아맞혔다. 현재 심리 상태와 더불어 진로 상담까지 비교적 잘 봐준 편이었는데 결국엔 굿 이야기로 흘렀다. 어쩔 수 없는 클리셰.
가장 최근 만난 무당은 천안사는 50대 박수였다. 생활한복을 입고 안경 쓴 모습이 윤리 선생님 같았다.
그는 나에게 어깨 위에 장군 신이 앉아 있다고 했다.
평소 테토 소리를 듣는 터라 일단 수긍했다. 한편으로는 다낭성난소증후군 때문에 에스트로겐이 부족한데 장군 신 때문이었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박수는 내게 이상한 꿈을 자주 꾸지 않느냐고 물었다. 정병으로 현실도 시끄러운데 꿈속이 조용할 리가 있나. 나는 그렇다고 대꾸했다.
처음에는 꿈이지만 나중에는 냄새로 오고 귀로 오고 눈으로 와요. 박수는 엄청난 비밀이라는 듯 속삭였다. 바쁘다 바쁜 현대사회에 방문 절차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그런 의심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표정이 심드렁해졌다.(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편이라) 그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아는 미래는 명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폐쇄병동에서 흐리멍덩한 눈으로 내게 담배를 건네주던 소년.
그 미래는 알아도 신내림을 받게 될 미래는 나도 모르고 또 그때까지 살아있을지 장담 못하는데. 잠깐 그럼 나도 샤넬 부츠를 살 수 있을까. 호응 없이 빳빳한 내 태도에 박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엄근진한 말투로 자신이 신내림을 받기 전까지 겪은 풍파를 들려주었다. 그쯤 되니 돈은 내가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현관에서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깃발을 여러 번 뽑고 나서야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보이고 들리거든 다시 찾아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속을 덜어내려고 갔는데 체한 기분이었다. 편의점에 들러 생수부터 샀다. 거리에 서서 벌컥벌컥 마신 뒤, 독일에 사는 친구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다.
-나 지금 신점 보고 나왔는데, 나중에 신내림 받아야 한다더라.
-오 잘됐네!
-잘된 거야?
-그럼 너 은퇴해도 먹고 살 걱정 없네. 노후에 할 일 있는 거네, 돈 줘도 못 배우는 거.
-그런가?
-나중에 나도 봐줘라.
-하지만 노후까지 준비하며 살고 싶지 않은데!?
친구는 재능 있어 좋겠다며 노후에 내 덕을 보고 싶다고 했다. 네가 점사를 보면 나는 복채를 받을 게. 낄낄. 그래 너 징 치는 거 배워라 파묘에 나오는 이도현처럼. 푸하. 컨버스 끈도 묶어줘.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다가 전화를 끊었다.
말짱 사라질 꿈. 신 받아 신발 사는 미래. 만약 나에게 그런 게 온다면, 누군가의 슬픔을 닦아주고 돈을 벌 수 있다면 샤넬이든 뭐든 반짝이는 걸 사서 나눠 가져야겠다. 사람 말고 진짜 미래라는 걸 발견한다면 말이야.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거리에서 나는 잠시 절망과 권태를 잊고 어깨를 털었다.
* 이미지는 미드저니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