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앓는 두 여자의 생존 일지
어느 날 나의 우울을 함께 들여다보던 정신과 선생님이 ADHD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건망증, 중도 포기, 무기력, 예민함. 그런 단어가 대화에 꾸준히 등장하던 시기였다. SNS에서 자주 보았지만 나와 관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담 이후 따로 시간을 내 성인ADHD CAT 검사를 받았다. 두 개의 동그라미를 보고 다른 점을 찾거나 숫자를 보고 빠르게 엔터를 치는 단순한 일이었다. 집중도 잠시, 지루함이 몰려왔다. 검사는 한 시간 정도 걸렸고 결과는 그것보다 빨리 나왔다. 나와 마주 앉은 선생님이 결과지를 넘기다 말고 안경을 고쳐 썼다. "놀랍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성적표를 앞에 둔 학생처럼 조바심이 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점수가 높네요. 상담할 때는 못 느꼈는데."
오르락 내리락. 단순선택, 억제지속, 간섭선책 등등.
지루하다고 느낀 구간마다 그래프는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검사지 하단에 '저하'라는 단어가 드문드문 보였다.
"ADHD로 봐도 될 거 같아요. 약을 복용하시는 게 좋겠어요." 갑자기 <금쪽같은 내 새끼> 프로그램 속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 감정을 백만 개쯤 느끼는 일상이 사소한 소음으로 미쳐버릴 것 같은 예민함이 전두엽 때문이었다고? 명백히 의지가 약해서, 가정교육 받지 못해서, 머리가 나빠서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배신감이 느껴졌다.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익혀야 하는 사회적 역할은 미적분 보다 어려웠다. 정해진 시간에 학교를 가고 숙제를 하고 교복을 입는 것. 나는 그 전 단계부터 헤매기 일쑤였다.
양말은 매일 갈아 신는다. 지각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는 창 밖을 보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숙제는 전날에 한다. 체육 시간에 소설책을 읽지 않는다. 상대방이 말할 때 공상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규칙은 백만 개도 넘었고 나는 대부분 실패했다. 제대로 해내기가 어려웠다. 결함은 성격 탓이라고 여겼다. 나는 의지가 부족한 머저리라고 생각했다. 다 자라고 나서 그 결함이 병증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허탈했다. 조금만 빨리 알았다면. 약이든 인지 치료든 조금만 더 빨리 받았다면 내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회귀물 주인공처럼 가정과 상상이 이어졌다.
넋 나간 내게 선생님이 말했다. ADHD가 부계유전일 수도 있어요.
부계라. 아빠를 떠올리자 충동, 과시, 무책임,
부도덕과 같은 단어가 줄줄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배신감이 그 다음에는 수치심이 들었다.
아빠는 내게 세상 어디에서도 부끄러운 존재,
구마의식이 필요한 대상이었으니까.
중학교 올라갈 무렵, 아빠 사업이 망했다. 단기간 이룬 부였다. 이후 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다. 이웃이던 성희 아줌마는 내 인사를 받지 않았고 명절마다 아빠와 고스톱을 치던 물곰 삼촌은 칼을 품고 집으로 들이 닥쳤다. 집에는 노모와 나, 동생뿐이었다. 삼촌은 안방에서 크림빵을 먹으며 아빠를 기다렸다. 머리맡에는 식도가 놓여 있었는데 노란색 플라스틱 손잡이가 낡아 호미처럼 보였다. 백년이 지나도 돈은 못 받을 텐데. 나는 삼촌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도 채무자는 오지 않았다. 화가 난 삼촌은 안방 문을 발로 걷어찼다. 마당에서 교복 블라우스를 빨던 나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우는 건지 피곤한 건지 눈이 빨개진 그가 “너도 똑같은 개새끼”라고 소리쳤다. 내 쪽으로 침을 뱉었다. 삼촌이 가고 안방엔 식도가 분실물처럼 놓여 있었다.
어떤 날에는 정육점 아줌마가 찾아왔다. 신선고기라고 적힌 앞치마를 입고 온 걸 보니 가게에서 뛰어온 모양이었다. 아줌마는 함부로 방문을 열었다. 술에 취해 뻗어 있던 아빠는 아줌마가 쏟아내는 윽박을 고대로 받았다. 헌데 그 내용이 삼촌과 용건이 달랐다. 왜 내 전화를 피하냐. 그제는 왜 안 왔냐. 내가 우습냐. 싫어졌냐.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시장에 간 엄마가 돌아올 것 같아 마음이 다급했다.
여주인공을 무대에서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계산해도 물리적인 힘은 부족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전화기를 들고 여주인공에게 떠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제야 여자는 말을 멈췄다.
수화기를 들고 덜덜 떠는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거기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아빠가 내게 남긴 장면은 대부분 몰염치하고 부도덕하다. 그 역시 저하된 상태로 살았기 때문일 까. 부계유전이라는 말을 듣고 문득 아빠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연을 끊은 지 십년도 넘었는데.
그 달부터 우울증 약 사이에 ADHD 치료제가 추가됐다. 쌀알 보다 큰 알약을 삼킬 때마다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도 약을 먹었다면 조금 덜 해로운 존재가 되었을까. 내 정병의 배후, 아쉬움도 애틋함도 없는 부계에게 묻고 싶었다.
*이미지는 미드저니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