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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Jul 06. 2021

어쩌면 제일 지독한 복수

- 첫 직장, 첫 사수에 대한 끈질긴 기억

  흔히 나를 배신한 연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미워하는 게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진절머리 나게 나를 괴롭혔던 직장상사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내 머릿속에 직장상사의 만행을 저장해서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살면서 기억이 퇴색될 수 있으니 형사의 사건 일지처럼 노트에 꼼꼼하게 기록을 해두는 것도 세상 최고로 끈질긴 복수일 거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없다. 내 머릿속의 영구 저장인 셈이다. 겨우 기억하는 행위 따위가 어떻게 세상에서 제일 지독한 복수로 변모하는 건지 이해가 어렵겠지만 내 생각엔 이보다 강력한 복수는 세상에 없다.


  보통 첫 직장 첫 사수는 첫사랑 첫 키스처럼 달콤하지 않다. 운이 좋거나 인복이 차고 넘친다면 첫 직장의 설움이나 회사생활 요령이 없어 첫 사수한테 된통 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흔치 않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첫 직장 하면 눈물겨운 자신의 모습이 떠오를 거고, 첫 사수를 떠올리면 가슴 저변에 잠자고 있던 억울함이 되살아날 것이다. 회사에서 상사가 내 아이디어를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가슴에 비수가 박히는 말만 콕 집어서 하는 것. 또는 지위를 이용해서 은근하게 따돌리고 과중한 업무를 맡기는 것 중 하나쯤은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이 중 최고의 빡침 끝판왕은 '자존감 뱀파이어'다. 


  첫 직장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어떤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것들을 이리저리 깨지면서 나를 알아가는 시기다. 근데 정말 치사한 건 그 어쩔 수 없는 성장통의 과정을 이용해서 자존감을 피 빨아먹듯 앗아가는 뱀파이어 상사들이 있다.  마치 내가 나중에 연차가 쌓여도 언제나 이 모양 이 꼴일 것만 같은 암담함을 굳게 믿게 만드는 상사들 말이다.


  일 잘하면서 혼내는 상사는 밉지 않다. 가슴에 비수 박히는 말 팍팍 던져도 일 알려주면 따르게 되어 있다. 매일 산더미같이 업무를 휙휙 던져대도 내가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상사는 존중하게 된다. 그러나 일도 못하고 자존감도 없는데 본인이 그렇다는 사실을 눈곱만큼도 인정 못하는 상사, 덧붙여 아직 일에 대한 신념이나 확신이 성립되어 있을 리 만무한 신입들에게 타고나길 무능한 것처럼 세뇌시키는 자존감 뱀파이어 상사들. 그런 상사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끝까지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고 고스란히 기억해주는 것이다.


  나는 많은 회사에 이직하면서 이런저런 다양한 상사들을 수없이 만났다. 당장 사직서를 던지고 나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이 투닥댔던 상사와도 퇴사 땐 서로가 아쉬워 눈물을 흘렸던 경험도 존재한다. 팀을 위해 남아달라고 부탁했던 상사를 뒤로하고 같은 업계의 다른 회사로 이직한 경우에도 내가 이직한 회사의 임원진에게 나를 칭찬해준 고마운 상사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십 년이 지나도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는 첫 사수의 말이 있다. 또렷하게 기억한다.


https://bit.ly/3wkRs9Y


  "난 네가 그냥 싫어."


  첫 직장에서 첫 사수의 마음에 들려고 무식하게도 노력했었다. 분명히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것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보고서의 양식을 바꿔도 보고 보고서를 수없이 고쳤다. 이것도 저것도 다 안 통한다고 느꼈을 땐 옆 팀 막내처럼 살갑지 못해서 미워하나 싶어 아침에 샌드위치나 커피도 챙겨봤다. 꼬박 2년을 그렇게 고군분투하면서 나 자신을 자책했다. 나는 무엇이 부족한 걸까. 그러다가 첫 사수에게 듣게 된 말. 네가 그냥 싫어.


  그때 알았다. 내가 일을 못해서도 태도가 잘못되어서도 아니고 나의 첫 사수는 내가 그냥 싫었던 거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몇 년을 피 터지게 고민한 게 허무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던 거니깐. 나는 나의 첫 사수가 밉진 않다. 세월이 너무 지나서 새삼 억울한 마음도 없다. 그러나 그녀가 했던 아무 말 대잔치 컬렉션은 내가 글을 쓰는 이상 어디에선가 쓰일 것이다. 세상일 한 치 앞도 모르는데 내가 언젠가 무슨 주제로 책을 내든 그녀의 아무 말 대잔치 중 한 문장 정도는 아마 내 글에 쓰이지 않을까. 아니면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목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를 진절머리나게 괴롭혔던 상사에게 할 수 있는 제일 지독한 복수는 미워하는 게 아니라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지 않을까. 찌질하지만 가장 확실한 복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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