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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Jul 19. 2021

동네 옷집에 사는 싱클레어

  자주 가는 동네 옷집이 있다. 복잡한 시내 골목을 지나 귀퉁이에 있는 옷가게다. 처음엔 가게 밖 행거에 걸린 블라우스가 예뻐서 쇼윈도 안에 옷들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옷집을 지나갈 때마다 허름한 건물과 다르게 단아하고 세련된 옷들이 대부분이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맞이하는 직원은 손님 얼굴을 보자마자 옷부터 척척 들이댄다. 그녀는 사람의 체형을 한 번만 쓱 봐도 머릿속에 저장된다고 했다. 행여나 손님이 그녀가 골라준 옷이 아닌 다른 옷을 만지작거리기라도 하면, 본인이 추천한 옷이 훨씬 잘 어울릴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곤 했다. 그 모습이 밉지 않은 건 타고난 재주였다. 정말 그녀가 추천해주는 건 맞춤옷처럼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집에서 처음 옷을 살 때 그녀는 계산대의 옷을 봉투에 담으며 말했다. “제가 사장님이 아니라 깎아드리지는 못해요. 대신 오실 때마다 손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찾아드릴게요.” 나는 자기 일처럼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을 둔 사장님은 정말 좋으시겠다고 받아넘겼지만 그녀가 그 옷집의 사장인 걸 처음부터 눈치챘다. 아마도 지나치게 가격을 흥정하는 동네 언니들의 등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나름의 묘안을 둔 설정인 듯했다. 나는 그 깜찍한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 줄만큼 그녀의 옷들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랬던 내가 그 동네 옷집을 반년 넘게 가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녀였다. 언제부턴가 고민이 많아졌는지 날이 갈수록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기 직전의 물고기처럼 위태로웠다. 변함없이 쩌렁쩌렁한 목소리, 과할 정도의 친절함, 반드시 이 손님이 반할만한 옷을 추천해주고야 말겠어, 라는 불굴의 의지가 엿보이는 코디 능력. 뭐하나 빈틈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분명 지쳐갔다. 살이 쭉쭉 빠져서 곧 쓰러질 것처럼 계속 말라갔지만 그럴수록 더 목소리가 째져라 힘을 끌어 모으며 해맑게 손님의 안부를 물었다. 한 번은 문 밖까지 영혼을 끌어 모아 웃으며 배웅해주던 그녀가 뒤돌자마자 큰 한숨을 몰아쉬었다. 옷집을 방문하는 일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부담스러워졌다.




  오늘은 곧 생일이 다가와서 스스로에게 선물할만한 걸 떠올렸는데 그 옷집의 옷들이 눈에서 아른거렸다. 나는 오랜만에 골목길을 지나 그 옷집에 들렀다. 그녀는 전보다 더 야위어있었다. 너무 말라서 눈망울만 봐도 지친 사슴 같았지만 그녀가 도매 시장에서 골라온 옷들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에게 단아한 인상을 주면서도 화려한 화이트 톤의 블라우스를 골라달라고 하자 분주하게 옷을 골라줬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건넨 옷보다 다른 옷에 눈길이 갔다. 내가 직접 고른 옷을 거울에 비춰보고는 단박에 이 옷으로 정하겠다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사장님. 언제부턴가 점점 말라 가는 게 눈에 보여요. 많이 힘들죠?” 말 한마디에 그녀는 봇물 터지듯 근황을 쏟아냈다. 코로나 시국 매출 좋은 편이지만 내년이면 삼십 대가 된다는 생각에 밤잠도 설친다고 했다. 자신만의 디자인이 돋보이는 의류 브랜드를 만드는 게 최종 목표라는 그녀는 뭐 하나 눈에 띄게 이뤄놓은 게 없이 삼십 대를 맞이하는 게 너무 두렵다며 고민을 털어놨다.


  “불안정한 본인도 좀 어여쁘게 봐줘요.” 하자 그녀가 이 불안감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답했다.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드시 끝나요. 편안해지는 시기가 와요.” 라며 다시 한 번 응수했다. 애쓰고 있는 스스로를 애틋해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다음부턴 크게 웃지 않아도 괜찮아요. 너무 애쓰면서 옷 골라주지 않아도 좋아요. 사장님 가게 옷은 다 예뻐서 그러지 않아도 손님들이 자주 올 거예요.” 나는 봉투에 담을 블라우스를 정성스럽게 개는 그녀에게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녀는 블라우스를 봉투에 담고, 나는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진 않을지 세심한 마음을 담았다.

가게 문 밖에서 그녀가 배웅해줬는데 나는 이미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기면서 손을 흔들었다. “다음부턴 편하게 사장님이라고 부를게요.” 총총 바쁘게 떠나는 내 뒤통수에서 옷 안 사도 좋으니깐 다음에 또 놀러 오라는 그녀의 경쾌한 목소리가 화답처럼 들린다.


  언젠가 옷집 사장에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선물하고 싶어지는 밤이다. 누구나 한 번쯤 내 안의 진짜 나를 찾는 여정을 겪지만 우리는 하루빨리 인생의 혜안을 꿰뚫는 데미안이 되기를 원한다. 마치 그 데미안이 흔들리면서 깨어나는 싱클레어 안에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알에서 깨어난 데미안보다 내 안의 데미안을 찾는 싱클레어들에게 마음이 가나보다.



- 출처 : https://bit.ly/3iuqqbD, https://bit.ly/3xVrn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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