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소나기가 내린 뒤 맑은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 포물선을 그리며 곱게 떨어지는 무지개 위로 무지개가 하나 더 반쯤 잘린 도넛처럼 얹어있었다. 곧장 핸드폰 카메라를 켜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딸처럼 곱네, 하고 답장이 왔다. 나는 얼른 전화를 걸어 내일 내 생일이라고 행여나 음식 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엄마는 알았다면서 자꾸 뭐가 먹고 싶은지 물었다.
전화를 끊고 전철역 스마트 도서관에서 엄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빌렸다. 우울증으로 목숨을 잃은 엄마가 준 햇살 같던 사랑을, 매캐하게 지독했던 사랑을 더듬는 책이었다. 나는 왜 생일 전날 이 책을 읽고 싶었을까. 이 책의 부제가 나를 꽤나 자극한 탓일지도 모른다. ‘엄마를 잃고서야 진짜 엄마가 보였다.’ 책의 제목보다 부제를 읽고 나를 낳던 날, 대학병원에서 의식을 잃어 한 달이 넘게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엄마를 떠올렸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엄마가 내 곁에 있을 때 엄마를 있는 힘껏 느끼기 위해서 엄마의 죽음을 생각해본다. 그것도 생일 하루 전날에.
멀쩡하던 엄마가 작년 이맘때 뇌졸중 진단을 받았다. 작년 내 생일에 가을이 오면 단풍구경을 가자고 했었는데 그렇게 일 년이 지나 또 여름이 왔다. 나는 뇌 MRI를 찍던 엄마를 검사실 밖에서 기다리며 처음 엄마가 없는 날들을 상상했었다. 순간이, 이 찰나가 너무 아득해서 멀미가 날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평소에 엄마가 전화를 조금 늦게 받아도 걱정을 했던 내가 달라졌다. 나는 분명 담대해지고 있다. 늘 입버릇처럼 ‘삶과 죽음은 하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했던 엄마의 말이 가슴에서 싹을 틔운 것이다. 엄마는 의사의 진단과 달리 뛰진 못하지만 잘 걷고, 느리지만 말하고 은은하게 자주 웃으며 살아간다.
나는 엄마가 아프고 나서 엄마를 동영상으로 담아낸다. 엄마만 가지고 있는 특유의 몸놀림이 담긴 영상을 보면 사진보다 선명하다. 내게 이것저것 잔소리하는 모습을, 산책을 하다가 먼발치서 앞장서 걸어가는 모습을, 설거지하는 모습을, 화분에 물을 주는 모습을 몰래 담는다. 어쩌면 이건 나를 위한 노력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오래 내 곁에 머물 걸 알지만 끝이 있다는 걸 알아서 엄마를 더 자주 끌어안는다.
생일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몸이 가뿐해서 곧바로 책상에 앉아 어제 빌린 책을 조금 읽었다. 무거운 소재라서 읽는 도중에 울컥하기도 했지만 덤덤히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그려내는 절제된 작가의 필력에 잔잔한 파도소리처럼 위로받았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날에 엄마가 태어난 날을 상상해본다. 어린 아가였을 엄마의 작고 여린 모습을 그려본다. 엄마의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그린다는 건 생각보다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이 찰나를 더 간절히 사랑하게 된다. 덧없어서 덧없는 대로 아름다운 시간이다.
출근 준비 생각에 책장을 덮으려는데 곱게 말린 네 잎 클로버가 보였다. 한 개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나는 네 잎 클로버를 보자마자 와, 하고 탄성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엄마의 잔소리가 그리운 날에 이 책을 읽었나 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게 될 다음 사람이 이 네 잎 클로버를 보고 기뻐할 얼굴을 상상하며 끼워 넣었겠지. 아마 자신의 생일날 엄마를 더 기꺼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읽으며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할 건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지독히 사랑했던 엄마를 잃은 누군가의 이야기로 엄마의 잔소리가 그리워진 어떤 사람. 그 어떤 사람은 자신처럼 엄마를 애틋해할 누군가를 위해 네 잎 클로버를 책장 사이에 끼워 넣는다. 그 누군가는 자신의 생일날,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읽으며 곁에 있는 엄마를 더 사랑하게 되는 날이다. 어떤 이가 늘 곁에 있는 건 소중한지 모른다고 했을까. 나는 내 곁에 머무는 모든 사람이 쪽물이 들 듯 가슴을 파고들어 애틋하다.
쌍무지개와 두 개의 네 잎 클로버. 엄마의 탄생과 죽음을 그려보며 지금 이 순간의 엄마를 더 사랑하게 된 오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를 사들고 와서 초를 꽂아 박수를 쳐주는 엄마의 얼굴이 애틋하다. 더없이 행복한 생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