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공항 밴을 예약했다. 예약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빠는 안방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하셨다. 아빠에게 정신없다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 마음이 온전히 다가왔다. 그런데 생각했던 시간보다 예약했던 밴이 일찍 도착했다. 온 가족이 짐을 하나씩 들고 우르르 나가기 시작했고 울고불고 하는 시간도 없이 간단하게 포옹하며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다.
부모님과 담백하게 인사하고 나는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너무 슬프지 않게 인사할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혼자 살아가야 한다. 때로는 연로한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떠나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나는 집을 매우 좋아했다. 항상 깨끗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었던 따뜻했던 집. 나이가 사십이 된 딸이 들어오지 않으면 두 분 중의 한 분이라도 거실에서 나를 기다렸던 다정했던 집. 그렇게 따뜻했고 다정했던 집을 스스로 떠났다.
어렸을 적, 엄마는 자주 이야기하셨다.
“현관문에 신발을 가까이 벗으면 가까이 시집가고, 멀리 벗어 놓으면 멀리 시집간 데.”
“젓가락을 가까이 잡으면 가까이 시집가고, 멀리 잡으면 멀리 시집간 데.”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엄마의 고생을 멈추고 싶어 엄마 친구분은 신발을 멀리 벗어놓고 젓가락을 멀리 잡으라고 이야기했다. 그럴 때면 나는 더 가까이 신발을 벗고 더 가까이 젓가락을 잡았다. 그리고 더 커서는 엄마 윗집에 살거나 옆집에 살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작년에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을 겪게 되면서 6개월간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종료해도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었는데 그중에 HTP(House-Tree-Person)라는 것을 진행하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집, 나무, 사람을 그리고 해석하는 심리 상담입니다. 나는 집을 그리면서 현관문이 열려 있는 상태로 작은 길을 그렸고 펑펑 울었다. 상담 선생님은 가족을 향한 나의 마음을 듣고 나서 가족과의 분리가 필요한 상태라고 종종 이야기하셨다. 근데 집 그림을 그리면서 나도 의연 중에 떠나야 하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자녀의 독립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부모와 자식이 독립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시기를 완벽하게 놓쳤다. 아니 놓쳐버렸다는 말이 더 적당할 수도 있다. 자식이 삶의 목적이신 부모님이 밑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왔던 나는 부모님과의 분리를 은근히 무서워했다. 그래서 부모님과 분리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인 프랑스행을 은근히 겁내하기도 하고 가기 싫어하기도 했었다.
비록 담백한 이별을 했지만 나의 마음은 담백하지 못했다. 왠지 모르는 서러운 마음으로 공항으로 향했는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오히려 마음이 바뀌었다. ‘평생을 같이 잘 살아가려면, 지금의 시간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러니 잘 분리되어서 각자 열심히 살아가고 1년이 될지, 5년이 될지 모르지만 다시 같이 살게 되면 더 잘 살아보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