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도착해서 나를 주눅 들게 했던 사건들이 있다. 그 시작은 유심카드 사건이다. 프랑스에 장기 거주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하는 것들이 있다. 사회보장번호(Carte vitale)과 주택보조금(Allocation) 신청이다. 이 두 가지를 신청하려면 프랑스 현지 번호와 프랑스 계좌를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프랑스 핸드폰을 개통하려면 프랑스 계좌를 소지하고 있어야 하고, 프랑스 계좌를 소지하려면 현지 번호가 있어야 한다. 도돌이표 노래와 같이 돌고 도는 형식인 셈이다.
6개월 미만으로 거주할 경우 복잡한 절차와 느린 행정 속도에 놀라서 한국에서 로밍 한 핸드폰과 해외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국내 카드를 사용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6개월 이상 거주할 계획이기도 하고 전공과도 관련이 있는 내용이기에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도 프랑스의 통신사 중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통신사가 있었다. 가장 저렴하기도 하고 한국 카드로 결제도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는 통신사이다. 하지만 귀국이 결정되고 나서 해지할 때 온라인이 아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해지를 해야 한다. 그래서 보통 이 통신사로 개통을 하고 난 뒤,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고 나면 통신사를 이동하는 방식을 택한다. 나 역시도 이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도시는 소도시에 해당하는 작은 도시로 이 통신사의 대리점이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대형서점과 같은 곳에 있는 무인 판매대에서 구입하기로 했다. 그때의 나는 프랑스에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상태여서 프랑스어를 읽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색한 상태였다. 인터넷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내용들을 보면서 더듬더듬 무인기계를 누르고 있는 내 뒤로 프랑스인 아주머니가 줄을 섰다. 프랑스인들은 본인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편이어서 도통 재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아주머니는 보통의 프랑스인들과 다르게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당황을 잘 하는 나는 아주머니의 재촉에 놀라 이메일 정보를 잘못 기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신용 카드가 두 번이나 결제되었다. 놀란 마음에 해당 상점의 직원에 문의하러 갔고 직원과 함께 돌아온 사이 나의 구입 절차는 끝나 있고 내 유심 카드는 사라진 상태였다.
지나고 보면 나의 당황함과 안일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국과 동일한 방법으로 행동한 것, 그리고 평범한 프랑스인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이유였다. 상점 직원은 통신사 직원이 아니니 직접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다며 통신사로 전화를 걸어주었다. 하지만 나의 부족한 프랑스어로 상점 직원에게도 통신사 직원에게도 설명할 수 없어 통역이 가능한 사람과 함께 문의하라면서 통화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유심 카드는 뒤에 있었던 아주머니가 가져간 것 같다며 같은 프랑스인으로서 대신 사과한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출국을 앞두고 해외 생활을 먼저 했던 친구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했었다.
“해외 나가면 한 번은 울고 시작해. 그러니깐 도착하면 그냥 울어. 사건 사고도 없고 이유가 없어도 그냥 울어.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게 되니깐.”
지금이 울어야 하는 타이밍인가? 싶었지만 아직 울기에는 아까우니 조금 넣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허탈하게 영수증만 집어 들고 집에 돌아왔다.
일주일이 지나지도 않은 채 벌써 이런 일을 당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조금은 억울했다. 낮에 잠깐 만난 같은 어학원 한국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내가 어떤 것을 도와달라고 이야기도 하기 전에 도움을 줄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파리나 리옹과 같은 대도시에는 행정 처리를 도와주는 업체들이 존재하지만, 이곳에는 없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는 마음에 문의하였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만을 들었다.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는 나의 이야기를 들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애타는 마음으로 겨우 잠에 들었고 어학원을 다녀왔다. 일단 사고를 쳤으니 수습해야 한다. 유심 카드를 구입하고 난뒤 받은 영수증에 핸드폰 번호와 관련 정보가 있으니 편지로 해지하기로 결정했다. 인터넷을 참고하여 해지 편지를 작성한 뒤 우편을 보내기 위해 우체국을 가는 길에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 아주머니가 가지고 갔으면, 전화가 되겠구나. 그럼 그 길로 신고하자.’
무슨 용기 인지를 몰랐겠지만, 집에 돌아와 해당 번호로 전화를 했다. 짧은 불어 실력으로 더듬더듬 말을 하는 내게 아주머니는 딱 한마디의 말을 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것이 뭔데?”
적반하장이 이럴 때 쓴다는 것을 몸소 겪게 되었다. 아주머니에게 나는 외국인이고 프랑스어를 잘 못하니 문자로 대화하자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외국인에다가 프랑스어를 잘 못하는 게 맞기도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증빙자료로 남기기 위해서 문자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유심 카드를 구매할 때 가장 저렴한 요금제를 선택했다. 그 당시 로밍 한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어서 프랑스 계좌 개설을 위해 번호만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기에 가장 저렴한 요금제를 선택한 것인데 만약 아주머니가 인터넷 데이터를 많이 사용할 경우 나는 사용하지도 않은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머니에게 나는 유심을 돌려받고 싶고 만약 내가 구매한 요금제보다 이상을 사용했을 경우 경찰과 대사관에 신고할 것을 이야기했다.
갑자기 아까의 당당했던 아주머니는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미안하다면 돌려주겠다고 이야기했고, 지금 당장 만나 자라는 나의 이야기에 아주머니는 차로 30분이 걸린다며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때마다 나는 경찰서에 가겠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긴 실랑이 끝에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 지나 약속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아주머니는 유심을 놔두고 갔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통신사에 문의를 해서 이메일 주소를 수정하였고 요금 사용내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입 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로 비밀번호가 전송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첫 번째 사건이었던 나의 유심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나는 유심을 돌려받기 전에 추가로 유심을 구입하였으니, 카드가 두 번 결제가 된 것을 포함하여 3배의 가격을 지불하고 유심을 구매하였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는 12유로의 유심을 가져간 이유로 30분을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경험했다. 안일했던 한국인과 정직하지 못했던 프랑스인은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돈과 시간을 지불했다. 나는 낯선 땅에서 어느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과연 아주머니는 정직하지 않으면 수고스러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아니면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