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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쉬어갑니다 Dec 17. 2020

남편 탐구생활

옷덕후와 함께하는 삶


요즘 우리 집에 밤마다 패션위크가 열리고 있다.

어이없다. 모델은 패션위크에 서기 한없이 기준 미달인 단 한 명


해외 직구족인 우리 부부는 백화점이나 아웃렛보다는 직구를 통해 물건을 사곤 한다.

그래서 한 해 중 블랙프라이데이가 있는 10월 말부터는 정신을 놓고 탕진을 해버리는 편..


올해도 어김없었다.

없는 용돈을 쪼개가며 서로 봐주고 주문하기 바빴는데 긴 기다림 끝에 이번 주에 택배가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다.

옷이 도착하면 후딱 입어보고 곱게 빨아 제자리를 찾아주는 나와 달리 본인이 인정한 쇼핑쳐돌이, 옷덕후인 그는 요즘 택배를 위해 집에 빨리 오는지,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빨리 오는지 이제 좀 헷갈리기 시작한 정도이다.


아무튼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치우고 나면 그의 쇼타임이 시작된다. 

단 한명의 관객인 '나'는 필참이다. 입장권을 받은 적도 산 적도 없는데 말이다.

바지 하나에도 위에 이것저것 매치해보고 재킷까지 입어보면 옷 하나에 대한 의식이 끝난다.

그렇게 삼십 분에서 길면 한 시간쯤을 오늘 있었던 일도 얘기하고 옷에 대한 품평을 하며 보내는 게 요즘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되었다.


같은 상황을 몇 번 반복하고 나더니 한다는 말은 ‘저녁이 있는 삶이 확실히 좋네.’였다. 

(내 저녁도 보장되는 것 맞니? ㅋㅋ)


그의 패션 사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실 그에게는 주기적으로 병이 온다.

가을에는 ‘코트 병’, 그 전에는 ‘시계 병’, 그리고 요즘에는 ‘청바지 병’에 걸렸다.


이번 가을에는 남자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4가지 코트 종류 중에 한 개가 없다며 밤마다 알아보았다. 그 와중에 물건을 하나 살 때 굉장하게 신중하고 광범위하게 알아보는 편이라 (나와 정반대) 나는 그냥 어서 사고 끝내기만을 기다리는 편이다.

(왜? 매일매일 그의 상황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보고 받기 때문!) 

결국 예산 초과로 사지 못한 코트 병이 그렇게 나은 듯 안 나은 듯 지나가고 이제 ‘청바지 병’에 걸린 그의 이름으로 블랙프라이데이 박스를 제외하고 약 6개의 택배가 더 왔었다.

물론 그가 사려는 청바지의 개수는 단 하나! 

일주일에 걸쳐 도착한 6개의 청바지는 그 후 일주일의 품평을 거쳐 바로 어제 하나가 아닌 두 개를 사기로 하고 끝났다.


돌이켜보며 처음 만났을 그때도 옷을 말끔히 잘 입고 있었던 그였다.

(그놈의 옷 때문에 속았네!)

옷을 정말로 사랑하던 남자 덕분에 나 또한 옷의 종류와 옷감에 대한 정식 명칭을 많이 배웠을 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브랜드 스타일도 어느새 다 바뀌어버렸다.


나도 친구들 사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쇼핑왕인데, 진정한 쇼핑왕과 함께하는 생활은 조금 웃기기도 하다.


며칠 전 반품 택배와 헷갈려(성향이 성향이다 보니 반품 택배도 오지게 많다.) 집에 청바지 택배가 하나 더 올 게 있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민망해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


거기에 대한 나의 답변은 생각해보니 더 가관이었다.

‘응. 집에 들여놨어. 혹시 반품이랑 착각했을까 봐. 게임팩 사는 남자 아니라서 고마워~.’ 

어느새 그와의 생활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였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고삐가 풀린 건지, 앞으로도 고삐가 풀린 채 계속될 것인지 지켜봐야 알겠지만 (물론 후자일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예를 들면 게임)도 아니고, 옷을 챙겨줘야 할 필요도 없으니 그런대로 잘 맞는 것이라 생각하며 오늘 저녁에 다시 열릴패션쇼를 기다린다...


끝나라 패션위크, 그리고 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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