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이라는 형용사의 자격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데이지를 페미니즘 관점으로

by 이여름


위대한 개츠비는 1922년 미국 뉴욕과 롱아일랜드를 배경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성공에 대한 꿈을 품었던 사람들이 뉴욕으로 몰려들었던 미국 사회에 대해 말한다. 이 소설은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어옴에 따라 성장하고 무너져 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예리한 필체로 그린 소설이다.


톰은 어렸을 때부터 돈 많은 집에서 자라 운동이면 운동, 외모면 외모, 공부면 공부까지 빼놓지 않고 잘했던 사람이다. 영화 속 그는 아내를 두고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는 쾌락주의자 의 면모를 보이고, 흑인과 백인은 절대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하는 둥 인종 차별 주의자의 면모도 보인다. 더불어 본인은 되고 남은 안 된다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가진 여성관은 상당히 가부장적으로 여성 차별을 하는 성차별 주의자의 면모도 보인다.


데이지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어렸을 때부터 귀족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부모님의 말과 남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으며 살아온 인물이었다.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며 신문에 날 만큼의 아름다운 미모, 남편이 바람을 핌에도 불구하고 혼자 끙끙 앓으며 용인하는 여린 마음씨를 지녔다. 한편으로는 개츠비가 자신의 죄를 집어썼을 때 침묵하고 회피하는 세속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개츠비는 모두가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는 원래부터 부잣집의 아들이었다고, 누구는 전쟁의 승리를 이끈 주도적인 인물이었다고도, 누구는 사람을 죽이며 돈을 버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파티에서 그의 학력을 의심하는 여자를 따로 데려와 본인이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5년 전에 만난 귀족 자제의 딸인 데이지와의 만남을 잊지 못한다. 그와 데이지를 가로 막은 것은 돈이었다. 그는 자신이 돈을 벌어 데이지에게 맞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돈을 번다. 혹여나 데이지가 찾아오지 않을까 데이지가 사는 집 맞은 편에 집을 짓고, 매주 파티를 연다. 그는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순수한 모습을 보여준다. 5년 만에 만나는 데이지 앞에서 벌벌 떨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어린 아이의 모습과도 같다. 한편으로는 정신이 미성숙한 모습도 보인다, 그는 데이지가 톰을 사랑했던 5년을 부정하고 싶어하며, 반드시 자신의 생각대로 상황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데이지에게 감정을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가난하고 약했던 과거를 데이지로써 무마하려는 타산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지막 장례식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보고 톰과 데이지가 간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개츠비의 죽음의 원인이 된 교통 사고도 데이지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데이지는 이 사실을 톰에게 솔직하게 말했으나, 톰은 그저 실수였다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개츠비에게로 죄를 씌운다. 유일하게 그를 생각해준 사람이 닉 한명이라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었다. 그가 물론 어떤 답례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잘 해준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하자 모두가 등을 돌리고 개츠비의 죽음을 배웅하지 않았다는게 냉정하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한 유명인들의 죽음이 바로 이런 느낌이었을까?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한 것일까, 혹은 데이지의 뒷배경을 사랑한 것일까. 만약 데이지가 어렸을 때부터 부잣집에서 자란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 과연 개츠비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바칠 정도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개츠비는 본인의 가난한 과거를 잊어버리고자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또한 개츠비가 인상깊은 이유 중 하나는 실제 스콧 피츠 제럴드의 생애와 개츠비의 삶이 어느정도 닮아있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작가는 미국의 명문대인 프린스턴의 입학을 했으나 중퇴를 하고 육군 장교로서의 삶을 살았다. 개츠비 역시 작품 속에서 옥스퍼드대를 중퇴하고 장교로 사는 모습이다. 스콧 피츠 제럴드 역시 경제적인 환경에 가로막혀 사랑하는 여자를 두 번이나 잃는 경험을 했다. 작가는 두 번이나 부잣집 여성을 사랑했고, 자신의 작품이 성공하고 경제적으로 기반이 생긴 후에야 비로소 정말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데이지는 스콧 피츠제럴드가 사랑한 여인 ‘젤다’의 페르소나이다. 실제로 데이지의 대사 중 “그동안 너무 재미없게 사느라 모든 일에 냉소적이 되어 버렸어.” “딸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난 이렇게 말했어. 딸이라서 다행이야. 저 애가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어. 이 세상에서 여자는 예쁘고 작은 바보로 지내는 게 최고니까. 그거 알아? 나는 이 세상 모든 게 끔찍해” 라는 대사는 젤다의 일기를 차용한 문장이다. 실제 젤다는 제럴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소설을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발레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개츠비에서와는 달리 주체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부분을 생각하면서, 내가 개츠비의 내용을 바꿀 수 있다면 조금 더 데이지의 감정을 중심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작품 속에서 데이지는 개츠비와 톰에게 자신의 의사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보이는 소극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대부분그녀의 의사결정이 남성에 의해 결정되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만약 데이지가 조금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의 여성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녀가 정말 개츠비를 사랑했다면, 개츠비를 사랑한다는 의사 표현을 당당하게 표출함으로써 사랑을 쟁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원한 것은 말이죠. 항상 젊고 무책임한 거였어요. 내 방식대로 즐겁게 살다가 죽는 거예요. 내 인생이 온전히 내 자신의 것이길 바란 것 뿐이에요. All I want to be is very young always and very irresponsible and to feel that my life is my own-to live and be happy and die in my own way to please myself)”


젤다가 한 말이다.어쩌면 데이지도 남편의 억압에, 그리고 사회의 억압에 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젤다의 모습처럼 능동적인 인물이었다면 개츠비의 결말이 바뀌지 않았을까.피츠 제럴드가 원하는 젤다의 모습은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데이지 같은 인물이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아메리칸 드림의 이런 이면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쾌락과 화려함을 쫓지만 결국은 허상이 아닐까, 인간이 정말로 추구해야하는 것이 자본인가에 대한 회의감을 들게하는 작품이었다. 믿을 수 없는 경제 성장에 따라 도저히 쫓을 수 없는 경제 격차, 그리고 그 속에서 부딪히는 사랑이야기까지. 돈과 배경이 사랑에 있어 방해물이 되는 것은 비단 로미오와 줄리엣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이어진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넌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을 전부 모아놓은 것보다 가치있는 사람이야."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 (캐러웨이)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의 마지막을 지키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위대하다.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자란 밑천에서 뉴욕에 이름을 날리는 자본가가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큰 그는 집을 나와 우연히 댄 코디라는 부자를 만나고 운명이 바뀌었다. 그 후 울프심 밑으로 들어가 불법적으로 일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비록 불법적인 통로를 통해 번 돈이었지만,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제로 추진한 개츠비가 무척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작품 중 인물들이 대부분 자본주의와 물질중심주의에 찌들어 아무런 희망과 꿈도 없이 무작정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었다면, 개츠비는 자신의 순수한 꿈을 쫓으며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데이지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의 결과로 죽음을 맞이한 그를 생각하면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가 결코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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