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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quniill Jun 25. 2019

퇴사준비생의 작별인사법

제15 일꾼의 말 

"당당하게 제대로 인사하고 나가요. 

그게 일꾼들의 작별인사법이에요."

제15의 일꾼_11년간 대형 미디어 및 스타트업에서 콘텐츠 다루는 업무를 했습니다. 이후 퇴사하고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운영 중입니다. 




"일꾼 씨 잘 지내고 있었어요? 혹시 이직할 생각 있어요?"


이직을 꿈꾸며 마음이 '붕' 떠있을 무렵, 새 일자리를 제안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귀신 같은 타이밍보다 더 신기했던 건 전화한 인물이 '내 인생에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싶었던 일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전 직장의 고문이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 출신의 고문과 조무래기 일꾼이 만날 일은 거의 없었는데도, 이 일꾼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일꾼 씨가 마지막으로 보낸 이메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 직장에서 퇴사할 때 나한테까지 인사했던 사람은 일꾼씨가 처음이었거든요. 내가 지금 있는 곳에 마침 일꾼씨가 맡으면 좋을 일자리가 생겨서 연락했어요. 추천해줄 수 있으니 생각 있으면 다시 전화 줘요."


이 전화통화 이후 나는 꽤 괜찮은 직장에서 이 일꾼과 함께 3년여간 일할 수 있었다.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 신기한 인연들을 적지 않게 만나왔다. 전 직장 선배를 다음 직장 동료로 마주치기도 하고, 예전 직장 동료를 내 팀원으로 추천해 다시 함께 일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전 직장 후배를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서 만나는 일도 있었다. 후배가 '갑', 그리고 내가 '을'의 위치로. 


저기서 만난 인연을 여기서 또 만나고, 여기서 만난 인연을 저기서 다시 만났다. 어떤 이론처럼 다섯 사람을 거칠 필요도 없이 그저 한 사람 또는 직접 아는 사이가 수두룩했다. 일꾼들의 세상은 특히 좁고도 좁았다. 


제15 일꾼은 이런 진리를 미리 깨우친 일꾼이었던 것 같다. 내 첫 번째 직장 사수였던 그는 이직을 앞둔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일꾼씨 죄지었어요? 죄지은 것처럼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당당하게 제대로 인사하고 나가요. 그래야 동료들도 일꾼씨의 마지막 모습을 좋게 기억할 수 있죠. 그게 일꾼들의 작별인사법이에요."


부장에게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싸늘한 침묵이 이어졌다. 처음보는 듯한 부장의 무표정한 얼굴에 덜컥 겁이 나고 심장박동 수가 빨라졌다.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난 이후 죄지은 사람처럼 동료들의 눈치를 보고 다녔다. 


동료들이 내게 시선을 주면 '회사를 버리고 일을 떠넘긴 배신자'를 욕하는 것 같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크게 웃거나 떠들면 마음 편한 예비 퇴사자처럼 보일까봐 근무시간 내내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어 있었다. 시간이 왜이리 더디 가는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을 때 열다섯 번째 일꾼은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퇴사는 일꾼들의 당연한 권리이기에 눈치 보지 말고 함께 일한 동료들에게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라고 말이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일꾼들에게 퇴사는 이사를 하는 것과 같은 일상의 이벤트가 됐다. 그래서 제15 일꾼 말처럼 작별인사법이 필요하다. 예전이야 평생직장이었으니까 퇴사가 곧 끝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옮겨다니면서 커리어를 쌓고 새로운 일꾼의 삶을 이어가는 요즘 퇴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래서 이 직장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 동료 일꾼은 또다른 인연이 되거나 괴로운 악연으로 다시 마주치기도 한다.  


예전의 나처럼 스스로 '퇴사전과자'가 돼 도망쳐 버리는 일꾼들을 종종 보게 된다. 다음날 출근한 동료들은 그 일꾼의 마지막 모습인 빈 의자를 보며 씁쓸해한다. 퇴사 이유를 놓고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제대로 인수인계되지 않은 일거리를 보고 뒷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퇴사는 일꾼들에게 주어진 권리이지 배신이 아니기 때문에 도망칠 필요가 없다. 


식사 자리를 잡아 직접 인사를 건네거나 이메일을 쓰거나 인수인계서에 작은 메모를 남겨 전달하거나. 그간 가족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던 동료들에게 고맙고 아쉬운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뭐든지 좋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동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모습으로 작별인사를 하라고, 열다섯 번째 일꾼이 해줬던 이야기를 퇴사준비생들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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