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일꾼의 말
제17의 일꾼_신기술을 다루는 작은 기업에서 사업 제휴를 맡고 있는 8년차 직장인입니다.
그간의 직장생활에서 없애고 싶은 암흑기가 있다면 그때가 아닌가 싶다. 그때의 나는 하루걸러 한 번 꼴로 화가 나 있었다. 사무실 한가운데서 뚱하게 말이다.
"이번 주말에 있는 행사, 일꾼씨가 좀 커버해 줄래요?"
부탁이라 쓰고 명령이라 읽는 단톡방 메시지를 보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또 나야? 주말에 일하기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이 인간들아!'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있을 때, 건너편 책상에서 동료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뱉었다. 웃음소리가 멈추고 나에게로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잘 됐다' 싶었다. 내 기분이 나쁘다는 걸 동료들도 알 필요가 있었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일부러 소리나게 두드리고, 한숨을 주기적으로 뱉어냈다. 화장실에서 만난 동료가 내 기분을 살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할 때는 차가운 눈빛을 던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퇴근시간까지 내 곁에 다가오는 용기 있는 일꾼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밤, 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찜찜한 느낌이 마음을 괴롭혔다. 그저 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랐을 뿐인데, 이상하게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내 마음이 더 힘들었다. 사무실 바닥에 내뱉었던 한숨들과 화장실에서 던졌던 차가운 눈빛이 후회됐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그 괴로웠던 밤은 금방 잊혀졌고, 사무실에서 기분이 상할 때마다 곧 후회할 행동들을 습관처럼 되풀이하고 있었다. 열일곱번째 일꾼의 초고속 승진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가 있기 전까지.
"팀장으로 승진한 건 좋지만, 요즘이 제일 힘들어요. 한 팀원이 업무 분위기를 다 망쳐놓고 있거든요. 뭐 하나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눈썹 사이에 주름을 바짝 잡고, 마우스를 하루에도 몇 번씩 책상 위로 던져요. 지금 짜증났다는 거죠. 문제는 팀원들이 이 일꾼 눈치를 보게 하고, 사기를 뚝 떨어뜨려 놓는다는 거예요. 회사 막내일 때부터 팀장인 지금까지 직장생활하면서 본 일꾼들 중 가장 같이 일하기 힘든 유형인 것 같아요."
이전 직장의 2년 후배였던 이 일꾼은 늘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로 손꼽혔다. 이 일꾼이 이전 직장을 퇴사할 당시 상사들이 돌아가면서 만류할 정도였다. 이직한 곳에서도 동료들의 인정을 받고 입사 1년여 만에 팀장직으로 승진한 그는 축하자리에서 직장생활의 고민을 토로했다.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내 얼굴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팀 분위기를 망치고 있는 주범이 나와 꼭 닮아있었으니까.
"그 일꾼도 풀 곳이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직장생활이 힘든가 보다." 변명하듯 말하자, 그의 답이 돌아왔다.
"'감정 쓰레기통'을 만들어야죠. 회사 화장실이든, 회사 근처 카페든 가급적 동료 일꾼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요. 자기만의 감정 쓰레기통을 만들고 그곳에서 화를 풀거나 생각을 정리해야죠, 단체 업무 공간인 사무실에서 동료 일꾼을 힘들게 하지 말고요."
내가 처음 사무실에 감정 쓰레기를 버린 날,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 행동들이 동료들을 등돌리게 하고,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제17의 일꾼과의 만남 뒤로 나는 회사 인근의 작은 공원에 감정 쓰레기통을 만들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깨물며 '내가 왜 화가 났지?' 생각을 정리해보면 열의 아홉은 일시적인 분노였다.
물론 직장생활에서는 솔직한 편이 낫다. 그러나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사라질 일시적인 분노는 드러내지 않는 게 건강한 관계를 이끈다. 일시적인 분노를 공원에 묻어둔 후부터 밤에 이불킥을 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열일곱번째 일꾼이 추천해준 쓰레기통 스킬 덕분에 10년째 동료들을 곁에 두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