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 일꾼의 말
제14의 일꾼_13년차 직장인입니다. IT기업을 퇴사하고 미디어에서 콘텐츠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과 싸울 때 레퍼토리가 있다.
먼저 서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오늘 네가 나한테 이랬고, 이 부분은 너가 너무 오버한 거 아니야?”라는 식의 대화다. 그러다가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는 식의 산파가 시작된다. “너한테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얼마나 이런 부분을 배려했고, 이런 건 눈 감고 넘어가줬고, 너의 가족들에게는 또 얼마나 잘 했으며…”
그러다 둘 중 한 명이 말한다.
“말을 해야 알지. 그렇게 나 몰래 한 일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화해를 한다. 사랑하는 사이라지만 스스로를 낮추거나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공식은 틀렸다. 왼손이 한 일뿐 아니라 왼손 엄지손가락, 검지손가락, 새끼손가락이 한 일까지 세세하게 말을 해줘야 둔한 ‘곰’과 같은 동반자는 알아챌까 말까다.
가끔 회사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회사가 내가 한 일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정말이지 이렇게 외치고 싶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 말이다.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나 상사들은 생각만큼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당신이 어제 어떤 옷을 입었는지, 회의시간에 어떤 아이디어를 냈는지, 그리고 어떤 일을 했는지 금세 잊는다. 그래서 일꾼들에게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
겸손은 다른 이들이 이미 그 사람의 능력이나 노력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칭찬이다. 특정 일꾼이 어떤 일을 했는지 기억하기 어려운 회사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태도는 겸손이 아니다. 그냥 '낮은 일꾼'을 만든다. 회사는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 목표가 명확한 곳이다.
제14 일꾼은 남들과 같은 일을 해도 다른 평가를 받았다. 남달랐던 것은 결과물을 포장하는 솜씨였다. 같은 선물이라도 비닐봉지와 리본 달린 포장지가 전하는 감정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는 본인의 결과물을 예쁘게 포장해 사내 일꾼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잘했다. 회의실에서, 단톡방에서, 사내 인트라넷에서 본인이 제작한 콘텐츠를 소개하고 이해관계자와 독자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렸다.
"제가 이번에 시위 현장 기사를 쓰면서 360도 촬영 영상을 함께 게재했어요. 다른 매체들에서 비슷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는데 우리 기사는 360도 영상이 들어가 있어서 눈에 띄었어요. 생동감이 느껴진다는 반응을 포함해 긍정적인 댓글이 50건 정도 달렸어요."
종종 이런 '자기 마케팅'을 두고 '오바한다', '나댄다'며 뒷담화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없는 내용을 꾸며낸 것도 아니니 면전에서 그를 다그칠 수 있는 일꾼은 없었다.
뒷담화는 다른 일꾼의 눈치를 보느라 마케팅하지 못하는 이들의 질투,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단점에 비해 장점은 확실했다. 그의 결과물은 다른 일꾼들의 결과물보다 오래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는 매년 인사고과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며 동기들 중 가장 빨리 '팀장직'을 가져갔다.
연말 즈음이었다. 인사고과를 잘 받고 싶어 열네 번째 일꾼에게 조언을 구한 일이 있었다. 그는 까만 글자 몇몇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 나의 업무진술서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회사는 너가 한 일과 성과를 찾아보고 기억해주지 않아, 너가 말해야 알아주지. 겸손하고자 하는 태도는 좋지만, 일에 대해서는 너 스스로를 낮추지마. 고생한 게 아깝지 않아?"
우리는 '겸손은 미덕'이라고 배우며 자라왔다. 많은 일꾼들이 스스로 한 일과 그로 인한 성과를 드러내기보다 회사가 알아서 찾아봐주길 원하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과 달리 회사는 기억해주지 않는다. 일꾼이 "이런 일을 했고, 이런 성과를 냈어요"라고 말을 해야 알아준다. 직장에서 자라는 우리 일꾼들은 익은 벼가 아니기에 고개를 숙이기에는 아직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