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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quniill Aug 06. 2019

“일을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일단 하는 거야."

제20 일꾼의 말 

“일을 잘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일단 하는 거야.”

제20의 일꾼_20대 초반부터 한 직장에서 30년 넘게 일한 뒤 몇년 전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현재는 세계 곳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은퇴 후 삶을 즐기는 중입니다. 




인턴 면접장에서 스무번째 일꾼을 처음 만났다.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어서인지 눈빛이 매서워서인지 총 세 명의 면접관 중에서도 압도적인 포스를 뿜고 있었다. 출력된 자기소개서를 안경 너머로 읽어본 뒤, “우리가 왜 당신을 인턴으로 뽑아야 하는지”를 물었다. 이후에 이어진 질문도 날카로웠다. 속으로 ‘와, 저런 사람이 상사라면 장난 아니겠다’라고 생각하면서 면접장을 나왔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 없었다. 인턴 출근 첫 날, 사무실 가장 높은 위치에 그가 앉아있었다.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이 일꾼은 열일 모드였다. 가장 높은 직급인데 부지런하기까지한, 어쩌면 ‘피해야 할 상사 1순위’에 등극할 법한 그런 캐릭터였다. 첫 회식날, 이런 캐릭터가 늘 그러하듯 자신의 사회초년생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미 다른 직원들은 오조오억번은 더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스무번째 일꾼은 이 회사에 20대에 입사해 25년째 근무 중이라고 했다. 회사에서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올라갔다가 정년 퇴임을 앞두고는 조금 더 쉬운 업무를 맡게 된 참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아주 만만하게 걸려든 지지리 운도 없는 인턴이 바로 나였다. 


인턴 둘째날부터 고난이 시작됐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이었는데 토씨 하나, 쉼표 하나까지 스무번째 일꾼의 손을 거쳤다. 조금이라도 비문을 적어가면 호통이 떨어졌다. “쥐도 당신보다는 낫겠다”라는 소리도 들었다. ‘닭대가리’ 소리는 들어봤어도 쥐는 처음이라서 신박했다. 워낙 혼이 나니 결과물을 제출할 때가 되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특정 브랜드 현황에 대해서 리서치를 해오라는 미션을 받은 날이 있었다. 이날도 어떻게 하면 안 혼나고 좋은 내용을 가져갈 수 있을지에 대해 머리를 쥐어뜯는 중이었다. 옆옆자리 과장님을 찾아가서 이 브랜드와 우리가 어떻게 협업을 할 수 있는지도 물어보고, 해당 브랜드의 홈페이지도 뒤적거리면서 나만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이미 모든 기획을 완성할 것 같은 자세로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하루 이틀이 지났다. 3일째 되던 날, 사무실이 떠나가라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내가 리서치 해오라고 했지 사업 전략 짜오라고 했어?” 


고개를 들었다. 나였다. 모두가 나를 쳐다본 뒤 급히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 와중에도 스무번째 일꾼은 거듭 소리를 쳤다. 


“책상에 앉아있으면 리서치가 뚝딱 완성되는거야? 그 브랜드에 전화를 해보거나, 밖에 나가서 현장을 살펴보거나, 관련된 사람과 미팅을 잡거나 뭐든 해야 할 거 아니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밖으로 나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를 부른 건 20번째 일꾼이었다. 


“내가 25년 동안 뭐 하나 믿고 살아온 지 알아? ‘액션 버튼’ 하나야. 일단 일이 떨어지면 움직여. 머릿속으로 이걸 이렇게 하면 더 좋은 보고서가 나올까, 저렇게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만 하면 답이 나와? 절대 안 나와. 그러다가 흐지부지되는 거야. 당신이 만약 책을 한권 낸다고 칩시다. 이미 머리 속에는 책 표지나 목차, 출판사를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게 하루이틀 보내면 책이 뚝딱 완성돼 있을까. 일단 매일 매일 쓰기 시작해야지. 일도 마찬가지야. 미리 앞서서 결과물을 그리는 것보다 중요한 게 일단 당장 코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거야. 그래야 이 일이 맞는건지 틀린건지 알 수 있지, 머리 속으로만 그리고 있으면 절대 알 수 없어. 일을 잘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게 일단 하는 거야.”


고약한 캐릭터로 묘사했지만 사실 20번째 일꾼은 내 인생 최애 상사 중 하나다. 이때 전해 준 ‘일단 해’ ‘액션버튼부터 눌러’는 10년째 나의 일꾼 지침서 1순위다. 3개월 인턴 기간이 끝나고 난 뒤에도 약 1년간 그 조직에 몸을 담았는데 이때 족히 20년은 버틸 수 있는 굳은 살과 맷집이 생겼다.  


무슨 일을 하든 일단 하고 봤다. 그래야 이게 ‘될 일’인지 ‘안 될 일’인지, 똥인지 된장인지 알 수 있었다. 업무상 누군가를 섭외해야 할 때에도 “아, 이 사람은 왠지 안 할 것 같아요”보다는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물어봤는데 섭외 거절했어요”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안 해보고 안 된다고 하는 것과 해보고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더라도 “제가 일단 해봤는데요”라는 이 한 문장에는 힘이 있었다. 경력이 오래 되었다고 해서 나의 예측이 온전히 답인 것은 아니었다. 


꼭 일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오랜 연인이 TV를 보다가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소규모 전시회도 하고, 그림책도 낼 계획이라고 했다. 본인은 모네처럼 따뜻한 그림을 그릴 거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모네 같은 소리 한다 싶어 조심스럽게 조언을 하나 해줘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했다. 


“그림 잘 그리고 싶다는 얘기만 5년째 하고 있는 거 알아? 일단 미술학원을 등록하거나, 원뿔 하나라도 그려보고 얘기하는 건 어때? 진짜 그림을 그릴 생각이 있다면 펜슬 달린 아이패드라도 생일선물로 사줄게. 대신 그걸로 유튜브만 보고 있으면 압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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