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qquniill Mar 19. 2019

“만만한 게 뭐 어때서 그래”

제4 일꾼의 말

네 번째 일꾼(콘텐츠 제작을 13년간 하다가 최근 창업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만만한 게 뭐 어때서 그래. 정말 무서운 사람은 여려 보이는데 속이 강한 사람이잖아. 만만한 사람이 그래. 주위 사람들의 요청과 부탁을 내재화하면서 만만한 일꾼들의 속에는 업무 내공이 쌓여있지. 내공이 쌓이니 일을 잘 하게 되고, 일을 잘하니까 업무가 몰리게 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너의 손을 필요로 한다는 건 엄청난 힘이야."


또 나다. 회사에 새로운 업무가 생기면 그게 왜 모두 내 일이 되고 마는건지. 내 인생의 3대 미스테리였다. 그게 중요한 일이든 잡일이든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그랬다. 팀장이 회의 막바지에 이런 주문을 던졌다.


"실장님이 2시간씩 일찍 출근해 해외 주재원들과 화상회의를 하실 겁니다. 우리 팀에서도 누가 참석해 회의 내용을 정리했으면 좋겠는데..."


팀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팀장의 말 줄임표 속에 있는 '누구든 빨리 자원하라'는 외침을. 팀원 중 몇몇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긴 듯 핸드폰을 바라봤다.(그냥 쿠팡 들어간 거 다 알아) 몇몇은 구멍을 뚫어버리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책상을 노려봤다.(눈이 드릴인 줄) 나는? 그냥 멍하니 있었을 뿐이다. 핸드폰을 봐야할지 책상 구멍을 뚫어야할지 고민하면서.


영겁 같았던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팀장이 다시 입을 뗐다. "일꾼 씨가 맡아볼래요?" 내 이름이 거론된 순간 수많은 거절 사유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집이 멀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지난번 팀 프로젝트도 내가 하고 있는데', '2시간 일찍 퇴근시켜주면 생각해보겠다' 등등. 정작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을 내 귀로 들으면서 스스로 어이없는 기분을 알까.


"네, 알겠습니다."


나의 대답에 핸드폰을 보던 동료들은 어느새 급한 일이 사라졌는지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책상 구멍도 뚫리지 않았다. 회의실을 나오는 내 발걸음만 무거웠다.


이런 일은 꼭 내 차지였다


'도를 아십니까' 사람들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나를 찾아내 팔뚝을 붙잡았다. 친구들 간의 약속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업무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왔고 결혼식장에서는 수십만원, 많게는 백만원가량의 축의금을 봉투에 나눠 담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만만한 사람'이다.  


험난한 취업난을 뚫고 입사한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까칠해지자는 다짐은 주위 일꾼들의 얼굴만 보면 아득해졌다. 일꾼들의 부탁이나 요청에 나의 답은 둘 중 하나였다. 'Yes or Yes’.


첫 시작은 회식장소 예약과 회의일정 조율 등 소소한 부탁이었다. 전화 한 통, 단톡방 공지 한 줄 올리는 게 뭐 힘들까 싶어 흔쾌히 들어준 부탁은 선배의 기획을 서포트하거나 모두가 기피하는 프로젝트를 떠맡는 일로 되돌아왔다. 누구보다 공평해야 하는 팀장도 나를 콕 짚었다. 덕분에 난 항상 일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원치 않은 조근과 야근을 하며 거절하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까칠한 내 모습에 당황할 주위 일꾼들의 표정을 상상하며 나홀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스스로 자존감을 깎아먹고 있을 무렵, 처음으로 '만만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부서가 달라 곁눈질로 봐왔던 그는 다른 회사 사람들도 이름을 알 정도로 업무 능력이 뛰어난 고참 선배였다. 그런 기라성 같은 선배가 내게 전한 말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쌓아왔던 부정을 긍정으로 뒤바꿔놓았다.


"만만한 게 뭐 어때서 그래. 정말 무서운 사람은 여려 보이는데 속이 강한 사람이잖아. 만만한 사람이 그래. 주위 사람들의 요청과 부탁을 내재화하면서 만만한 일꾼들의 속에는 업무 내공이 쌓여있지. 내공이 쌓이니 일을 잘 하게 되고, 일을 잘하니까 업무가 몰리게 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너의 손을 필요로 한다는 건 엄청난 힘이야."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함께 일하고 싶은 일꾼을 떠올려봤다. 손을 내밀었을 때 잡아주는 일꾼이지, 거절 당할 가능성이 높은 '예민보스'는 아니었다. 다른 일꾼들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흔히 일거리가 없는 회사는 가지 말라고 조언한다. 고객이든, 다른 회사이든 아무도 그 회사에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으니까. 일꾼도 그렇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일꾼은 직장생활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과 같다.


만만한 일꾼들은 주위 사람들과 일을 주고받으면서 정보와 내공을 쌓는다. 또 계획한 게 아니었더라도(영리한 일꾼은 알고 있겠지만) 그들은 앞으로의 직장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평판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만만한 일꾼들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일부러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울 필요가 없다. 결국 그 가시에 상처입는 건 본인이 될 수 있다.

이전 03화 첫 단추를 꼭 잘 꿰야만 하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