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 일꾼의 말: 일잘러의 태도를 만들어준 말들
제9의 일꾼(영상 프로덕션 회사를 다니고 있다. 약 6년 동안 같은 업종에서 서너번의 이직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잘못 끼운 단추 하나 없더라고요. 처음엔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지 싶었는데 거기에서도 다 배우는 게 있어요."
고3 시절 같은 반에 전교1등이 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고 똑단발에 안경을 써서 누가 봐도 모범생인 친구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시나 수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내 이야기를 듣던 전교 1등 친구가 나에게 "너는 참 우회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이 장면이 1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친구의 의도는 "너는 꼭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돌아가더라"라는 관찰성 발언이었는데 그게 내게는 꽤 단정적으로 내 인생을 규정짓는 말로 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 친구가 예언자라도 된 듯 나는 이후 '우회인생'을 걸었다. 사람들이 줄 세워 말하기 좋아하는 대학교에서 우선 원하던 곳을 가지 못 했다. 대학교 안에서도 항상 비교되는 그룹이 형성돼 있는데 난 상위그룹이 아닌 하위그룹에 속한 곳에서 대학 4년을 보냈다. 대학 4년 내내 상위 대학그룹과 비교하는 발언을 농담처럼 들어왔다.
한번에 원하는 어딘가로 직진을 한 적이 없다. 첫번째 직장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의 비주력 부서였다. 회사는 돈이 필요하자 이 비주력 부서를 '양수도계약'이란 이름 아래 자회사에 팔아버렸다. 엄마는 늘 주변 친구들에게 "우리 딸이 이 대기업을 다니고 있다"고 자랑하고 다녔지만 실은 아니었다. 우리 팀 사람들은 우리 회사를 놓고 "대문만 큰 회사"라고 했다.
건물의 입구에는 '누구나 들으면 알 만한 기업명'이 찍혀있었지만 내가 들어가는 곳은 그 건물의 3층, 회사에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은 창고 같은 부서였다. 한 건물 안에서도 등급이 있는 것 같았다. 8층은 본사, 3층은 자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누르는 층수만 봐도 그 사람의 '명함'이 보였다. 두번째 직장도 비슷했다.
그런데 10년째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애인은 나와는 좀 달랐다. 대학도 SKY는 아니지만 어느 곳과 비교할 이유도 없는 상위 대학이었고, 첫 직장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인생에 ‘우회전’ ‘좌회전’이란 없어보였다. 그래서 연애기간 우리 둘의 패턴은 매우 달랐다. 나는 늘 열심히 어딘가로 달려가는 중이었고, 그는 현재의 안정적인 상황을 더 안정적으로 다지는 중이었다.
어느 날은 애인의 후배를 함께 만날 일이 있었다. 후배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영상감독이 되고 싶은데 쉽지 않다고 했다. 이미 3, 4개의 작은 회사를 짧게 다녔다가 회사 비전과 맞지 않아 그만 둔 상황이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애인이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기 시작했다.
"첫번째 단추를 잘 꿰는 게 중요해. 일단 좋은 회사를 들어가는 게 먼저야"
이 말은 듣는데 이상하게 버럭 화가 났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을 쏟아냈다.
"처음부터 좋은 회사, 좋은 대학 들어가면 좋다는 걸 누가 몰라? 그걸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그래? 차근차근 올라가는 과정이 훨씬 더 재밌는 걸 네가 몰라서 그렇지 얼마나 다이내믹하고 내가 성장하는 즐거움이 있는데. 너는 종종 현재 회사 다음에 갈 만한 곳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하잖아. 나는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중에서 내가 고르고 골라 또 연봉이나 직급도 높여서 이동해보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데."
와다다 쏟아내버렸다. 집에 가서 '이불킥'이나 하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후배가 고맙게도 말을 덧붙여줬다.
"형수님 말이 맞아요.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잘못 끼운 단추 하나 없더라고요. 처음엔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지 싶었는데 거기에서도 다 배우는 게 있어요. 그리고 신기한 게 그게 다 경력이 되더라고요. 이상한 곳에서 구른 경력을 높게 쳐준다고 해야 하나? 말이 좀 이상하다 싶지만 정말 그래요. 안정적이거나 불만족스러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이 다음 스텝에서 인정을 해주더라고요. 그리고 정말 점프해가는 맛도 있고요. 나에게 맞는 회사를 찾아가는 기쁨도 있고요."
흔히들 첫번째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고 말한다. 잘 안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그런가. 이런 세상에서 첫 단추를 잘못 꿰었으니 그럼 나는 처음부터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잘못 꿰어진 단추란 없다. 잘못 꿰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다시 차근차근 다시 꿰어도 된다.
나는 내 인생이 우회인생이라서 좋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었고, 더 의지가 충만했고, 훨씬 재밌었다. 그때의 그 똑단발 전교 1등 친구는 인생 어디쯤 가고 있을까. 첫 단추를 잘 꿰었을까. 그런데 그 친구는 알까. 나는 단추있는 옷보다 그냥 막 입고 벗어던질 수 있는 후드티를 훨씬 더 좋아한다는 것을. 빨리 가는 직진 코스보다는 빙빙 돌아가는 제주도 해안도로를 사랑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