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남들한테 친절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해.”
어릴 때부터 우리는 학교나 부모님 혹은 주변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랑하라는 말을 듣는다. 정작, “너 자신부터 사랑하고, 남을 사랑해야 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나보다 남을 챙기기에 급급하며 ‘나’와 ‘남’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신뿐이다. 나의 탄생과 생애를 함께하는 가족마저도 내가 될 수 없는데 우리는 안면부지였던 남을 우리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말을 듣는다.
과연 이게 옳은 것인가?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 『문명 속의 불만』에서 남에 대한 나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왜 내 몸과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은 부당한 짓이다.”
프로이트는 내 몸과 같이 남을 사랑하는 것은 내 사랑을 남보다 자신들을 더 아끼는 증거로 생각하는 가족에게 부당한 처사를 하는 것이며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을 나와 같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에는 그와 같은 입장이지만, 가족을 나와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는 그와 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다.
가족을 나처럼 사랑할 수 있고, 가족이 자신들처럼 나를 사랑해준다면 ‘남보다 못한 가족’이라는 말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보다 가족이 나의 자존감을 낮아지게 만드는 경우가 왕왕 있다.
가령 친구가 나의 자존감을 낮아지게 만들면 친구와 연을 끊거나 거리를 둘 수 있다. 친구는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안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은 그럴 수 없다.
언제나 곁에 있는 게 가족이기에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조언한다. 그 조언이 때로는 우리의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코가 콤플렉스인 사람에게는 가족이 은연중에 내뱉는 “쟤는 코만 예뻤으면 딱인데”라는 말이 비수로 꽂힌다. 혹은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에게는 “공부라도 못하면 다른 거라도 잘해야지”라는 말이 비수로 꽂힐 수도 있다.
그 말에 상처받은 내가 가족에게 화를 내면 가족은 왜 화를 내냐며 “다 네가 자식이니까, 네가 동생이니까” 등의 말과 함께 모든 게 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도 싶지 않았고,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가족의 생각은 오로지 가족, 그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당신의 행동을 바꾼다면 그건 그 사람의 행동이 되는 것일 뿐이다.
그저 당신은 당신 다움을 지키면 된다.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정의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어야만 한다.
관심을 뜻하는 영어 ‘interesse’는 본래 ‘inter-esse(exist)’ 즉, ‘~사이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남과 나 사이에는 관심이 있고, 관심은 관계를 끌고 온다. 하지만, 그 관심을 남에게 먼저 갖기 전에 나에게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너, 너는 나”라는 말처럼 자기 주체성을 상실시키는 말은 없을 것이다. ‘나’와 ‘너’는 동일시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종종 나와 남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남과 나를 동일시하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니다. 나에게 주의를 기울여야지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할 수 있다. 또한 남에게 친절을 베풀기 전에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고, 남을 사랑하기에 앞서 나를 사랑하는지 점검하며 남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하기 전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하자.
“너는 이런 애인 거 같아”라는 말을 듣기보다 “나는 그런 애야”라는 말을 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관심적 사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