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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Oct 07. 2020

균열


 4명째였다. 


  올해 들어 퇴사자가 많았다. 6년 동안 건축설계 회사에서 일하면서 이렇게까지 사람이 퇴사한 적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퇴사한 친구는 27살 신입이었는데, 젊의 과장의 질책을 한번 듣고 나더니 그 낫낫했던 얼굴을 확 바꾸곤 사직서를 제출했다. 오래 함께 지내지 않았기에 정이 붙어 붙잡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문뜩 싱숭생숭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오래 함께한 사람들이 퇴사를 선택했을 때 나는 그들을 잡아볼 수도 있었고,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중간관리자 입장에서 신입사원의 이런 모습은 낯설고도 어려웠으며, 마음속에 어떤 균열을 가져왔

  이번 주말도 일이었다. 건축설계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붙잡고 있는 건물이 하나씩 있다. 시간이 촉박했거나 예산이 부족했다거나, 이 좋은 주말까지 동역학을 기반으로 한 구조역학을 검토하고 있다는 게 상당한 피로로 다가왔다. 마음속으로 항상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게 건물뿐만 아니라는 생각에 미쳤다. 너무도 쉽게 회사를 벗어난 그 신입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잠깐 생각했다.


  주말이면 시간을 쪼개 중국어 수업을 들었다. 뜬금없이 선택한 일이었다. 워라밸과는 거리가 먼 회사였지만, 큰맘 먹고 선택한 1:1과외가 균열의 틈바구니를 메워주었으면 하는 생각에 미쳤다. 중국어 선생님은 재작년 중문과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인 취업 준비생 이었다. 평소에 사적인 질문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넌지시 말을 건네보았다.

 


  “선생님, 선생님은 나중에 죽고 나서 가져갈 수 있는 기억이 있다면 어떤 걸 가져갈 것 같아요?”


  선생님은 잠깐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어제 고양이랑 논 기억이요."


  실소가 나는 대답이었다. 삶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엊그제 퇴사한 그 친구도 그런 삶을 원했을까? 마음속에 쌓아올린 건물이 공전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도, 공부에 집중할 수도 없는 날이 이어졌다.


  무작정 연차를 냈다. 타이페이 카페스토리에 나오는 그녀처럼,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미쳤다. 수많은 리조트와 호텔을 설계했지만, 막상 이용해본 적은 거의 없었기에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티웨이 항공권을 끊었다. 목적지는 홍콩, 충동적으로 결제해놓고 생각해도 너무 무모했지만, 도저히 환불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어쩐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작가의 말]


  삼십 대 중후반 여성분으로 건축업(호텔, 리조트)에 종사하고 계셨다. 6년 차 회사원으로 6월 22일 금요일 당일에도 일을 하다 오실 정도로 바쁜 삶을 살고 계신다고 했다. 



  6년 차 직장인이다 보니 딱 중간관리자 입장에서 곤란한 부분이 많다고 하셨다. 과장은 말이 거칠고, 현재 신입으로 들어오는 90년대 세대 들은 '도무지 이해가 잘 안된다'라고 말씀하셨다.(배격하는 게 아닌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부분으로 느껴졌다.)  



  상당히 편안한 분위기에 좋은 인상을 하고 계셨고 좋아하는 영화나 취미를 물어봤을 때 '중국어 과외'를 시작한 부분,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죽고 나서 가져갈 수 있는 기억이 하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씀하셔서 ENFP 또는 INFP 성향이 아닐까 추측했다. 마침 본인이 자신의 MBTI 성향을 알고 계셔서 보니 ENFP 쪽이셨다. 


  외향형 중 가장 내면에 관심이 많은 편으로 혹시 '타이베이 카페스토리'라는 영화를 좋아하는지 물어보니 '지금 제 벨 소리가 그거예요'라고 말씀하셨다.


  여유롭고 온화해 보이지만, 인간관계와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아 보였다. 나도 처음으로 받은 손님이었기에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나머지 상담까지도 잘 끝낼 수 있었던 것 같다.


  FP라고 추측하게 된 계기는 일보다도 사내 관계에 좀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반대 성향의 TJ들이야 워낙 일쟁이들이라 남 이사 퇴사를 하든 말든 별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개인적인 성향과 중간관리자라는 직책이 맞물려 상당히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15분가량의 상담을 마치고 40분 동안 소설을 쓰면서 이런 부분이 잘 반영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두 달 전이지만, 아직도 인상이 강하신 걸 보면 내가 현재 하고 있는 고민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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