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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Oct 07. 2020

오프닝 시퀀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모니터에 까만 화면을 주시하고 있으면 작가들이 느낀다는 백지 공포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노트북을 덮고 밖에 나갔다 와도 좀처럼 환기가 되지 않았다.


  학원에서 만들어온 포트폴리오를 재생해 보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다른 프로젝트를 구상해 보아도 항상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것 투성이었다. 자신감 빼면 시체였건만 시체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이 길이 맞나?

                                               아직 이걸로는 모자라,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너무 고민이 많았을까? 까만 화면 안에서 스멀스멀 글자들이 기어 나오는 이미지를 상상했다. 스타워즈의 오프닝 시퀀스 같기도 했다. 언젠가 학원에서 오프닝 시퀀스에 대해 배웠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확장할수록 초기에는 가독성만을 고려했던 몇 장의 이미지가 영화의 상징과 결합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단서로 다가왔다. 감독의 영화적 감각, 예술적 감각이 전면에 드러나는 장치이기도 했다.


                                  ‘영화 오프닝 시퀀스를 참고해보면 어떨까?’

                                                    문득 생각했다.


 


***


 

  새로 구성한 포트폴리오는 반응이 좋았다. 영화의 시퀀스를 참고하다 보니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강렬한 이미지의 광고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잘 그린 네 컷 만화 같은 구성은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고 이미지 짤로 제작되어 커뮤니티에 올라오기도 했다.


  상품에게 광고는 책의 표지 같아서 광고를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졌다. 요령이 붙기 시작하면서 4컷을 3컷으로 3컷을 다시 2컷으로, 마지막으로 하나의 톤으로 영상을 제작할 수 있게 될 즈음 런던 소재의 회사 ‘넥스트 프로덕션’에서  입사 제의를 받게 되었다. 2002년부터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뮤직비디오, 광고 등을 제작했던 회사였다. 며칠을 망설였지만, 나는 곧 사표를 제출하고 비행기 표를 끊었다.


  출국 날 당일 인천에서 런던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처음 포트폴리오를 구상했을 때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넥스트 프로덕션에서 작업했던 스필버그 감독의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오프닝 시퀀스도 공항에서부터 시작했다.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 마음에 드는 제목이었다. 휴대폰을 끄고 창가로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마름모꼴로 쭉 뻗은 활주로에 글자들이 겹쳐 보였다.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거기서도 잘 할 수 있을까?


  비행기가 이륙하자 글자들이 사라졌다.


  11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런던에서는 그동안 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됐다. 런던 한가운데 새로 지어진 마름모꼴은 현대 건축물에 프로젝터를 사용해 이미지를 투영하는 미디어 파사드 작업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일임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작가의 말]


  모션 그래픽 디자인과 관련하여 링크 보내주신 영상 잘 봤습니다. 영상을 보다가 문예 창작학과에 재학 중이었을 때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에 대해 공부했던 게 생각났어요. 처음에는 까만 화면에 메인타이틀과 로고만 있었던 게 1930년부터 서서히 이미지가 추가되고 70년대 스타워즈에 들어서야 우주 공간으로부터 글자들이 밀려나오는 식의 오프닝 시퀀스를 구성했다고 해요. 이 분야에 대해서는 UJ님이 저보다 훨씬 잘 아시겠지만, 지금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와 분리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것 같아요. 저는 이런 식의 발전이 앞으로 UJ 님에게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하시는 고민들은 앞으로 UJ님의 삶을 구성하는데 훌륭한 오프닝 시퀀스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부족한 소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https://youtu.be/7nv2S_S9MlU 캐치미 이프 유 캔 오프닝

  https://youtu.be/Sy0iewac5CY 007 스카이폴 오프닝 시퀀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오프닝 시퀀스를 두개 골라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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