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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Aug 02. 2020

자기 팔자 자기가 꼰다는 말  feat. 에고(ego)

  자기 팔자는 자기가 꼰다는 말이 있다. 예쁘게 꼬아지면 다행인데(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언제부터인지 수많은 생각과, 생각처럼 되지 않는 일들에 몸부터 대뇌 전두엽까지 비비 꼬이는 상황을 누구나 한번쯤은 맞닥뜨리지 않나 싶다.



  생물의 본분은 ESR, 먹고살아서 재생산하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아가 겪는 고통은 우리의 뇌가 급격하게 진화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물음을 생산해냈기 때문이라는 식의 해석을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철학서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정신분석학에서도 주된 내용은 비슷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식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의식 아래로 가라앉혀 놓았지만, 거기서 문제가 티백에서 액기스 우러나듯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지금 네 에고(ego) 챙길 때가 아니잖아


    인간수업이라는 드라마에서 배규리가 부모님에게 반항하는 장면에서 부모님이 내뱉는 대사다. 자아라고 번역되는데, 에고에 잡아먹히지 마라, 에고 부리지 마라 등등 용례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에고이스트는 번역하면 이기주의자라는 뜻이니, 그 뜻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거나 심오한 차원에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현대인의 질병이라는 자의식 과잉이 추가되면 머리에 부하가 오기 시작한다. 버깅이라고 하는데, 마치 벌레가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맴도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거슬리는 생각이, 소리가 넘쳐흐르기 시작하고 활동성은 떨어지며, 어딘지 꿈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자아에 침착한 채로 언제부터인지 수많은 생각과, 생각처럼 되지 않는 일들에 비비 꼬이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아직까지 이런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올리는 코끼리나 호랑이, 독수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마이크 타이슨


  살다 보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 싶은 경우를 마주하게 된다.


  훈수꾼은 실제로 경기를 하는 선수보다 2단 정도 낮아도 훈수를 둘 수 있다고 한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다가도 '나라면 백종원처럼 영리하게, 효율적으로, 완벽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무능, 비위생, 나태함 등을 있을 수 없는 결함으로 치부한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나온 가장 형편없는 식당이라 할지라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식당을 만들 거야'라는 계획을 세우고 식당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도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면서 밀린 빨래와 설거지 거리를 주말에 처리하는 삶을 계획하고 산 것은 아니다.


  원래 남의 에고는 잘 보인다. 에고를 부리는 사람을 보면 곤조, 아집 등에 사로잡힌 것이 눈에 보인다. 비트겐 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렇게 보면 '에고의 한계는 개인의 한계'라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는 것은 옆에서 훈수를 두는 것과는 달리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삶에는 관성이 있다. 얼음판 위에서 방향을 바꾸기 힘든 것처럼, 한번 굳은 행동양식이나 패턴은 조정하기 힘들다. 이것은 에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마치 중력처럼 우리의 각오를 무디게 만들고,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게 고정시켜놓는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 보면 난쟁이들이 나온다. 난쟁이들은 중력에 메여있으며 중력에 의해 눌려있기에 작은 키를 갖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이라는 뜻으로 난쟁이들과는 달리 완성자, 자아실연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우리의 내면에서는 이 두 사람이 이종격투기를 벌이고 있을지 모른다.


남의 탓


  피해의식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피해의식을 경험하는 사람은 분명히 삶에 어떤 순간에서 심각한 수준의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고, 이 의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무의식으로 내려가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상처 난데 소금 뿌린다고 이런 사람이 어떤 말을 했을 때 '너 그거 피해의식이야'라고 말해봤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화살을 자꾸 외부에 쏘는 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는 사람은 그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려면 우선 피를 흘리고 있는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의 업, 카르마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건 피해를 준 사람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 살려면 상처 받은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상처와 분노는 계속해서 자신을 갉아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의 요가

  '마음을 비우세요. 형체가 없어지고 모양도 없고 물과 같습니다. 이제 물을 컵에 담으세요. 컵이 됩니다. 물을 병에 담으면 병이 되고 차 주전자에 담으면 차 주전자가 되는 겁니다. 이제 물은 흐르거나 충동할 수 있어요. 물처럼 되세요 친구.' - 이소룡


  욕심을 버리는 것과 결단을 내리는 것,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것과 현실에 순응하는 것, 뭐가 전적으로 옳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때그때 긍정적인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물과 같은 유연성은 필요한 것 같다. 아직까지 물을 꼬아봤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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