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 스릴러 / 웹소설
“왜 그래? 이거 싫어해?”
여선이 말했다.
“아뇨 잠깐 옛날 생각이 나서요.”
아말은 우리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제 고향에서는 돼지고기를 먹는 게 죄에요. 그런데 구호 식량마다 돼지고기가 들어있었죠. 전 사람들이 버리고 간 통조림을 주워 다가 신물이 날 정도로 먹었어요. 아, 미안해요…. 이상한 이야기 해서.”
아말은 나이프로 소시지를 잘랐다.
“다 지난 일이야.”
내가 말했다.
“그럼 우리, 미래의 열쇠공을 위해 건배 한번 할까요?”
여선이 잔을 들며 말했다. ‘프로스트’라는 건배사가 이어졌다. ‘당신의 행운을 빈다.’라는 의미라고 했다.
“좀 신나는 거로 듣자”
여선은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쇼팽이 사라지고 비트 섞인 빠른 랩이 들려왔다. 여선은 젊은 애가 만날 방구석에서 지루한 음악만 듣는다며 아예 클럽에 데려가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너는 분명 인기가 있을 거야.”
여선은 팔짱을 끼고 확신하듯 말했다. 아말은 수줍은 듯 머리를 긁는다. 확실히 또렷한 이목구비에 회색 눈동자가 제법 매력적이었다. 나는 강아지를 선물했다. 다리가 짧은 잡종이다. 애견샵 창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외면하지 못했다. 이름은 아인, 여선이 지어주었다. 녀석은 이미 동거인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내 집에서 기르기로 했다.
“너는 어쩌다 아저씨랑 같이 사는 건데?”
아말은 살짝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결심한 듯 와인을 한잔 비우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일에서 난민을 받는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난민 캠프에 합류했죠. 정착교육을 받고 지원금으로 운 좋게 집을 구했어요. 그걸로 다 끝난 줄알았는데….”
아말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여선은 그만해도 좋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제 비명을 들은 아저씨가 절 찾아왔어요. 이야길 듣더니 또 악몽을 꿀 거 같으면 여기서 자도 좋다고 했어요. 건물 관리도 맡겨줬고요.”
아말이 나를 은근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건 자꾸 민원이 들어와서 그런 거야 세입자들이 비명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고 보채길래 어쩔 수 없었어. 관리인도 필요했고.”
절반은 사실이었다. 여선은 대견하다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긴, 저도 동거해본 적 있는 걸요. 알 것 같아요.”
제멋대로 단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여선은 뱅쇼를 만들어 주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술 끓이는 향이 거실까지 퍼져왔다. 아말은 약간씩 리듬을 탔다.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잔에서 뜨거운 김이 솟았다. 계피와 설탕을 넣고 끓인 와인으로 독특한 향기가 났다. 건배를 하는데 음악이 멎었다. 곧 아나운서의 경직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프랑스에서 발생한 테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IS의 소행으로 의심된다는 내용이었다. 여선은 라디오를 껐다.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아말은 불편한 듯 잔을 내려놓았다.
여선의 손이 어깨에 닿았다. 취기 때문인지 적막 때문인지 잠시 정신을 놓은 듯했다. 여선은 나에 관해 묻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저 소시지만 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 년 전, 그날도 방금처럼 침묵과 취기 속에서 깨어난 듯했다. 수많은 꿈을 꾸고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 나를 깨운 것은 여선의 손이 아니라 자동응답기의 목소리였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안전합니다. 금고를 확인해 보십시오. 곧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얀 벽에 흰 가구들,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야말로 공간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진공관 오디오만이 방 안에 둥둥 뜬 느낌이다. 집에는 생필품부터 식재료까지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전혀 일상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호텔에 갓 체크인한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닐 테다. 거실에 나가 금고문을 열었다. 상당한 금액의 현금과 통장, 건물등기를 포함한 서류가 들어있었다. 서류철 안에는 한국여권과 독일 영주권이 포함되어 있다. 붉은색 명함도 발견할 수 있었다. ‘슈나이더’라는 이름과 주소가 적힌 심플하기 이를 데 없는 명함이다. 이 남자가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겼음을 직감했다. 그 어색한 말투, 주소는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아래 칸 깊숙이 도시락처럼 생긴 알루미늄 케이스를 열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케이스 안에는 탄창과 탄알, 부담스러운 크기의 자동권총이 들어있었다. 무거운 수수께끼였다.
면도날이 지나갈 때마다 모르는 얼굴이 드러났다. 집에는 금방 적응할 수 있었지만, 내 모습은 아무리 봐도 낯설었다. 서류상 나이는 43살, 생일은 이 집에서 깨어난 날이다. 자동응답기의 의사는 어떤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리셋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부작용이 좀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하지만 제대로 된 프로그램이 없었을 때이니 안심하십시오. 당신은 안전합니다. 제 처방을 따라주기만 한다면.’ 어떤 부작용이 있었는지 묻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곤 ‘당신은 안전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퍽이나 위로가 되었다. 면도를 끝내고 면도칼과 거울 속의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당신을 위한 길입니다.’
의사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예고편 : part.2 임대업자는 혼란스럽다.
기억을 잃는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임대업을 시작한다. 악몽을 꾸는 나날이 이어지고 모든게 낯설기만 하다. 그러던 중 나는 매일밤 빌라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와 잠을 잘 수 없다는 민원을 받게 되는데...
다음화 링크
https://open.kakao.com/o/s5iB5Tjd
제보/아이디어/피드백 등 환영합니다!!
큐플릭스QFLIX 기부형 자율구독료 : 신한은행 110-311-434110 허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