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 오고 마음도 뒤죽박죽 한 것이 정리가 잘 되지 않아 이렇게 글을 써보기로 한다. 이자간, 또는 개인 - 집단간 발생할 수 있는 관계 갈등을 정신분석학의 개념인 초자아 / 자아 / 이드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운명을 통제하는 감각을 잃은 사람은 쉽게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를테면 자동차 급발진과 같은 상태다.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예상치 못한 속도로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 안에서 나는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다. 그 속도가 빠를수록, 그러니까 감정이 클수록 자아는 패닉 상태에 도달할 확률이 높다.
자아도 강도라는 게 있어서, 같은 일에도 무던하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은 쉽게 넘어갈 일에도 몇 시간을 고민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악플 수천 개에도 무덤덤한 사람이 있는 반면, 악플 세 개만 달려도 우울증 약을 타 먹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신체를 단련함에 있어서 개개인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정신에도 이러한 개개인별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관계의 기본은 주고받음이다. 말을 주고받고, 감정을 주고받고, 때로는 그 이상의 것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일방적인 관계란 있을 수 없다. 일방적으로 보이는 관계도 받아주는 사람의 존재로 하여금 성립되는 관계다. 왜 이혼을 밥먹듯이 이야기하는 가정을 예로 들어 '결국 이혼하지 못하고 같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그 관계를 유지하는데 서로가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거기에 대고 누군가 '그럴 거면 이혼해버려!'라고 이야기해도 어쩔 수 없다. 지리멸렬한 관계다.
관계의 다양성은 어려서부터 많이 경험해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관계 = 내가 잘해주면 좋은 것'이라는 단순한 기준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이런 초보적인 접근은 슬프게도 관계를 망친다.
지금부터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사회과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인문학적 개념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 정신분석을 가지고 이야기해보는 인문학적 개소리이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은 이드(본능), 자아(타인의 평가), 초자아(양심)을 가진 세 겹의 존재다. 좀 더 고전적으로 표현하면 이성(초자아)과 본능(이드)이라는 두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의 마부(자아)가 우리다. 우리는 타인을 자아를 통해 대면하고 자아는 초자아와 이드 사이에서 진동하며 생각하고 행동한다.
1차 준거집단인 가정 안에서 우리는 첫 번째 초자아를 부여받는데, '아버지'로 상징되는 초자아는 '신은 죽었다'를 시전 한 니체 선생님 이후의 시대에는 별로 힘을 쓰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해체는 1934년 조선 중앙일보에 올라온 이상 선생님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졸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이상 - 시제 2호(1934년 7월 25일 자 조선 중앙일보)
과거의 전통과 질서가 붕괴된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초자아를 개인이 만들어가야 한다는 초유의 과제가 주어진다. 과거에는 경험 많은 구루의 지식(이라고 쓰고 초자아라고 읽는다)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 한 번뿐인 인생에 앞서 실수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하기도 하고 그것이 심지어 부적절하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등장한 대안이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는 경계가 없을수록 좋다는 이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경계 없이 자아는 유지될 수 없다. 김곡 작가의 [과잉존재]에서 '과잉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를 잃고 비대해진 자아의 종말이다.'라고 쓴다. 자아에 바운더리가 사라진다. 거기에는 감당 못할 전능감과 전능감에 대응할 수 없는 허무함이 자리한다. 극단적이고, 위험하다.
이러한 추세를 예기한 작가님을 한 명 더 꼽자면 정유정 작가님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님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관계는 타인이 나의 초자아를 대체하는 관계다. 스스로 초자아(양심)를 세우는 것보다 타인을 통해 내 자아를 의탁하는 것이 편한 것이 사실이다. 과거처럼 종교에 기댈 수도 없고 아버지나 선생님에게 기댈 수도 없으며, 이데올로기나 사상은 유치하다.
나의 초자아에 위치한 그 사람도 '사람'인지라 초자아/자아/이드를 갖추고 있을 텐데, 만약 그 사람도 나처럼 '초자아'를 스스로 세우지 못했거나, 아주 양심이 없는 빌런이라면 어떨까? 두 사람의 집합 사이에서 마땅히 2개쯤 있어야 할 초자아를 단 1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기묘한 형태가 된다. 도식화하면 이렇다.
1. 자아(유사 초자아)이드 + 자아/이드
2. 이드(유사 초자아) + 자아/이드
집단을 예로 들어 보면 종교야말로 인류가 만들어낸 초자아의 현현이라고 봐도 무방한 곳인데, 그곳을 운영하는 종교인은 충분히 양심이 없을 수 있다. 목사를 믿고 따르는 신도를 목사가 물질적/성적으로 착취하는 뉴스들을 보자면 그 목사는 자신이 '초자아(양심)'의 결정체인냥 광고하며 자신을 초자아의 위치에 놓도록 하고 명령에 따르게 만들지만, 그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이드 덩어리일 뿐이다.
"초자아 / 자아 / 이드"로 이루어진 세 겹의 존재가 관계를 통해 "타인의 이드 / 자아 / 이드"로 햄버거처럼 눌려버린다. 자아는 타인의 이드를 철석같이 초자아로 모시고 살아간다. 통제력을 상실한 자아는 경계를 잃고 혼란에 빠진다. 이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관계에 대한 상상도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적당히 양심도 있고, 적당히 속물적이며, 적당히 쾌락을 추구한다. 그런 사람들끼리 만나서 친구가 되고, 사랑을 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아직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로 이런저런 말들을 듣다 보니 이일 저일 휘둘리는 일이 많았고 나름 정답을 찾아보려 애를 써봤지만, 실패하는 일이 잦았다. 복잡하게 생각을 해야 그나마 답이 나오는 편인데, 조금이나마 감이 잡히는 건 나는 나의 기준을 스스로 바로 세울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아무도 나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고 나의 가치관을 대신 적립해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