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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Aug 07. 2022

군자에게 다재는 수치다?

군자에게 다재는 수치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이야기에서는 날다람쥐를 예로 들어 날기도 적당히 날고, 나무도 적당히 타고 땅도 적당히 기고하지만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식의 예시를 들었다. 주로 잡다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을 후려치는 말이고, 일리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아주 처음부터 특출 난 재능을 발견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하나에 올인하는 게 효과적인 전략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오히려 그런 강박이 되지 않는 분야에 자신을 옭아매는 주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실전이라고 하는데 '실전'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격투기를 예로 들어 '실전에는 총이 최고지!'라고 말한다면 그건 정론은 아니지만 맞는 말일 수 있다. 영악한 사람들은 토론이나 협상에서 저런 식으로 링을 키워서 위기를 탈출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안다. 현재 격투기에서 실전성이라 하면 UFC와 같이 일정 룰을 가지고 진행하는 경기에서 성과를 내 보이는 것과 같은 폼이 존재한다. 


내가 추구하는 소설, 문학에서 실전은 공모전에 입상을 한다거나, 신춘문예에 등단을 한다거나, 출간하여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 등이 될 것인데 그게 마냥 쉽지만은 않다. 예술은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to가 부족한 전형적인 불균형 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그 척박한 땅에서 될 때까지 땅을 파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3의 길을 찾아서 뭐든 해봐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생긴다.


과거에는 어떻게든 그 안에서 해결을 하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꼭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더 크게 든다. 분야에 맞는 전통과 룰이 있다고 해도 내가 무슨 왕세자도 아니고 군자는 더더욱 아니다. 생계를 무시하고 예술에만 올인할 수 있는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뭐든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한다고 해서 글을 못쓰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 글도 저런 고민을 통해 쓰게 되지 않았나? 아마 나만 하는 고민도 아닐 것이다.


내가 보는 세상은 무제한급 격투기, 또는 3 스트라이크 아웃이 없는 타석에 오른 타자와 비슷하다. 내가 얼마만큼 체질량을 키우든 그것은 룰을 위배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보기에 덕지덕지 지방 덩어리처럼 보이는 삶을 살았다 치더라도 어느 순간 성과를 내면 그만이다. 막노동을 전전한다고 해서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 법은 없지 않나? 삶에서는 몇 번의 기회를 놓쳤다고 해서 배트를 휘두를 기회를 뺏기는 것도 아니다. 잘못을 해서 감옥에 가거나 치명적인 건강상의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또는 스스로 지쳐서 배트를 던지지 않는 이상, 다양한 방식으로 배트를 휘둘러볼만하다.  


내가 나 자신을 무언가로 규정한 후라면, 그 이후의 삶은 어떻게 살더라도 이미 이룬 것에 대한 후천적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당장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원하는 일과 다른 일을 하고 있더라도 중요치 않다. 그것 역시 과정의 일부로 통합될 것이고, 우리는 제대로 된 경기장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전혀 다른 체급의 선수로 서로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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