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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Nov 01. 2022

정미경 작가의 생애와 '밤이여 나뉘어라'

ft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밤이여 나뉘어라 외 20 - 정미경 저자


  정미경 작가는 1960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를 영문학 학사로 졸업하고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분에 '폭설'로 등단하였다. 소설이 아닌 희곡으로 등단하였고, 시나리오와 관련한 부분에서 두각을 드려내셨다고 하니, 황석영 작가님이 말한 소설가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꾼', '스토리 구성력'부분에서 검증된 작가라 할 수 있다.


  앞서 다룬 작가들에 비해 작가의 전반적인 생애나 철학이 직접적으로 잘 드러나있지는 않았다. 소설 부분을 제외하면, 에세이를 쓰신 것도 없고, 미디어에 노출된 적도 거의 없는듯하다.


  소설은 비교적 시간적 거리가 있는 2001년 단편소설 비소 여인이 당선되었으며, 장편소설 장밋빛 인생으로 2002년 오늘의 자가상을 받았다. 소설가로서는 마흔하나, 마흔둘이 되어서야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미경 작가는 '남들은 절대 할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2006년에는 '밤이여 나뉘어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지금 이상문학상은 잘 모르겠지만, 맨부커상 수상으로 이름을 날린 한강 작가가 수상한 이듬해 수상하였으며 그다음 해는 전경린 작가님이 수상하신 만큼 상당한 라인업 사이에 위치한 소설가라 말하고 싶다.



  정미경 작가를 처음 접한 건 2017년 무렵 교보문고에서 주최한 소설 프로그램에서였다. 


  당시 배모작가님이 진행을 하셨는데, 별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같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전자책을 내주는 조건이었지만 프로젝트가 반파되다시피 하면서 없던 일이 돼버렸다. 당시에는 그렇게 강단 있게 따지거나, 반박하기에는 너무 심성이 무른 사회 초년생이자 학생이었기에 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게 하나 있다면, '밤이여 나뉘어라'라는 인생 작품을 접하게 된 것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위치한 '운자크레보'라는 독특한 배경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남보다 앞서고 싶어 하는 인간의 호승심'과 '질투심과 열등감을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해소한 남자가 겪게 되는 혼란'을 다루고 있다.


  '질투'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감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이성과 웃고 떠들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고 기분이 나빠진다. 학교나 사회에서는 바로 옆 나의 경쟁자가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우수할 때, 우리는 절망을 느낀다.



  '밤이여 나뉘어라'의 주인공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의대 재학 시절까지 수재인 본인조차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천재를 마주하면서 절망한다. 그런 그가 의사가 되지 않고 선택한 길은 '영화감독'이었고, 시간이 흘러 국내외 할 것 없이 명성을 쌓는다. 마침 영화상을 받으러 유럽으로 향한 '나'는 나에게 한없이 절망을 주었던, 천재이자 괴짜였던 친구를 다시 만나기 위해 노르웨이에 들른다.


포르쉐를 사도 색깔별로 살 수 있는 녀석이 이런 차를 끌고 오다니 너무 쉬운 삶에 대한 조롱인가?



  나를 맞이하러 온 친구는 예전처럼 쾌활하고 재기 넘치는 모습이다. 나는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었음에도, 자꾸만 마음이 어지럽다. 나는 친구가 운전하는 다 낡아빠진 피아트를 타고 운자크레보로 향한다.(아마 홍상수쯤 되는 영화감독에서 캐릭터를 차용한 것 같다.)


 그리고 오랜만에 학창 시절 짝사랑이자 친구의 아내가 된 여자와 재회하게 되는데, 나는 그때부터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낀다. 뭉크의 절규, 해가 지지 않는 밤을 의미하는 백야, 그리고 그 백야처럼 언제나 밝은 쪽으로 걸었던 친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까지 소설은 각각의 층위를 결합하며 치밀하게 전개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 민음사발매2013.07.01.



  이 소설과 가장 결이 비슷한 장편소설을 하나 꼽자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정도가 될 것 같다. 한 남자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느 정도 위치에 올랐을 때 잠시 외면했던 사건의 중심으로 달려가는 전개가 그렇다.


  다자키 쓰쿠루 역시 고향에서 어울리던 친구들 이름에 '색'을 의미하는 한자가 들어간 것과 달리, 자신은 색채가 없기 때문에 '무색무취의/몰개성의 인간'이라는 소외감을 가지고 있다. 여자로 인한 상실감 또한 '밤이여 나뉘어라'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다른 점이라면 미숙했던 남자가 사회에서 일련의 성장을 거치는 지점까지는 두 소설이 비슷하지만 돌이켜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중편소설이라는 짧은 분량 안에서 '밤이여 나뉘어라'가 보여주는 이야기의 밀도는 '다자키 쓰쿠루'와는 비교하기 힘들다. 중소도시를 주로 그리는 하루키의 소설은 느슨한 관계의 연속으로 틈을 둔다면(이런 건 장편소설에서 반드시 필요하긴 하다 안 그럼 읽다가 숨이 막힌다.), 오슬로의 운자크레보라는 광막한 공간과 세 사람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밤이여 나뉘어라'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비교하자면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 정도의 차이라고 할까?


  넷플릭스도 질리고 유튜브도 볼  다 봤다 싶은데, 요즘 소설에는 도저히 손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한 번쯤, 아니 사실 여러 번 읽기를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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