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물레

창작에 대한 단상

by 허블
KakaoTalk_20231021_015625093.png

간디는 물레를 통해 인간 중심의 노동을 장려했다.


간디가 생각하기에 물레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인간적인 생산도구였던 셈이다. 하지만 역사는 휴먼스케일을 포기하고 대량생산을 통해 큰 이윤을 남기는 방식의 노선을 잡았던 쪽이 대세를 차지해 왔다. 모던타임즈의 컨베이어 벨트와 톱니바퀴 사이에 낀 찰리 채플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기 힘들다.


개인은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나뉘고, 고용주와 피고용인으로 나뉘고, 그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다. 평범한 개인은 짜인 체계 안에서 노드로서 기능하며 급여를 받는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경우(우리나라 기업 중 중소기업의 비율은 전체 기업의 99%이고, 거기서 근로하는 종사자는 전체 근로자의 83%를 차지한다) 급여는 딱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주어진다.


그 사이 개인은 시간과 기회비용, 그리고 에너지를 잃는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기계군단을 위한 전기 생산을 위해 몸에 케이블을 박아 넣은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면, 너무 비관적일까?


하루키는 젊은 시절 재즈바를 차릴 수 있었던 이유로 임대료가 저렴했던 시대상을 꼽았다. 적당히 이일 저일 하더라도 도태되지 않을 정도로 호황기가 아니라면, 즉 도피할 구멍이 많은 사회가 아니라면, 개인은 피 터지는 경쟁 속 무리 지음에 안도하는 초식동물처럼 원치 않는 노동에 부역하거나, 사회로부터 논외인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일례로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아파트에 사는 4인 가구 청소년에 맞추어져 있는데, 빌라나 연립주택에 살면서 용돈 없이 청소년기를 보내는 수많은 청소년들은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비율이 높다. 과잉 대표된 일반적인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짜인 시스템 안에서 그들은 논외인이 된다.


그렇게 자산 감각, 교육, 친목 등에서 초기경험을 형성하지 못한 많은 청소년이 이렇다 할 대책 없이 성인이 된 후에는 사회와 노동시장 안에서 온갖 시행착오를 겪는다. 자연에는 선이 없지만(있어 봐야 수평선, 해안선이다), 인간 사회에는 선이 많다. 시간은 시야를 넓힐 틈도 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혼자 가부좌를 틀고 물레를 아무리 돌려도 사회의 바운더리 안에서 '무쓸모'가 된다면, 누리호 2호가 화성에 식민지를 개척하든, 다음 월드컵에서 한국 팀이 우승을 하든, 새로운 UN 결의안으로 전 세계가 통일을 하든 개인의 비참함이 사라질 수는 없다.


그리하여 선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 언더독으로 살아가기보다는, 가용한 자원을 동원하여 도피할 구멍을 찾아 새로운 바운더리를 만들어 내고 싶다. 비록 간디의 물레는 실패했지만, 최소한의 인간성, 인간적임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다. 전 인류의 휴머니즘과 같이 거대한 이상은 아니고 다만 내가 한 사람으로서 가지는 본래성을 잃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려면 나만의 물레가 필요하다. 그게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느낄 수 있다. 나에겐 글쓰기도 그 방법 중 하나다.


이전 03화예술과 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