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솟아나는 것

창작에 대한 단상

by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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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예술 경향을 한 가지로 표현하자면 '마이크로 인포멀'이다. '작가'는 진입장벽이 낮은 직군이 되었다. 누구나 글을 좀 썼거나 음악을 좀 했거나, 그림을 그려 퍼블리싱했다면 작가가 될 수 있다. 이런 추세 때문인지 하위문화와 관련하여 재밌는 역전 현상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기존에는 기성의 완성된 예술을 즐기는 입장에서 주변부 작품, 하위문화까지 골고루 이해하고 즐기는 사람이 많았던 반면 아방가르드나 얼터너티브, 전위예술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특정 예술, 특정 아티스트를 추앙하며 '이거 빼고는 쓰레기'라는 식의 배타성이 두드러지는 게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완성된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에서 구분 짓기가 더 두드러지고, 언더/하위문화 쪽의 주류 선망이 더 커진 듯하다. 대표적으로 '사운드 클라우드'를 통해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언더에 포진해 있는 사람들이지만, 하는 음악은 대중음악의 도식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대표적으로 빌리 아일리쉬가 이런 루트를 밟았다.


그렇지 않은 예술가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전략을 취한 사람을 한 명 꼽자면 '펫두'라는 래퍼가 있다. 그는 '랩으로 이솝우화'를 한다는 랩 씬의 조롱을 받은 사람이다. 중산층 수준의 집안에서 태어나 삼십 대 중반까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랩이라는 양식을 차용해서 무조건 퍼블리싱했다.


그렇게 낸 곡이 멜론에 400곡이었다. 랩을 하려면 우선 흑인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고, 라임과 훅은 어때야 하고, 그런 관념 자체가 없었기에 본인도 이것을 힙합이라고 해야 할지, 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다만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고, 현재로서는 나름의 포지셔닝에 성공하여 교수로 대학 강의를 하고 있다.


국내 시에서 탑이라 할 수 있는 나태주 시인은 총 229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생명력, 지구력 부분에서 둘은 차원이 다르다. 나는 고작 세 권의 책을 냈으면서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을 하는데, 이분들은 그냥 한다는 전제를 깔아놓고 사는 듯하다. 이건 주변에 대한 신경을 꺼야만 가능한 일이다. 만약 펫두가 '랩으로 이솝우화를 한다'는 말에 좌절하고 주류 하위 구분 짓기에 절망했다면 400곡을 퍼블리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태주 시인 역시 등단이 아닌 자비 출간으로 시작하여 다작하였다.


나는 여전히 얼터너티브와 하위문화를 사랑하고, 그걸 꼭 주류 문화와 구분 짓기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내 글을 쓰는 일에 앞으로도, 아마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혜성처럼 내려오는 것이 있는 반면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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