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 연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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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실패는 신비스러운 승리이고…”
- 보르헤스 독일 진혼곡 중
나는 이 문장을 좋아한다.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만큼, 사람을 살리는 것도 없으니까.
그릇은 완벽할수록 물을 가둔다.
가둘수록 고인다.
고이면 썩는다.
그래서 나는 종지 바닥에 구멍을 뚫고 싶다.
바보처럼.
허술한 시작이 좋다는 말은 대개 위로로 쓰인다.
“처음부터 잘할 필요 없어.”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위로로만 두고 싶지 않다.
허술함은 전략이다.
구멍은 통로다.
The Fool은 보따리를 든다.
그 보따리 속에는 대단한 계획이 없다.
(대단한 계획이 있었다면 보따리가 아니라 캐리어였겠지.)
그는 흰 꽃을 들고, 절벽 끝을 향해 걷는다.
여기서 사람들은 말한다.
“미쳤나?”
“떨어진다.”
“개가 말리잖아.”
“왜 하필 거기야.”
그런데 바보는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그 사실을 짐으로 만들지 않는다.
시작이 허술한 이유는 간단하다.
초반부터 단단하면, 그 단단함을 유지하느라 여행을 못 한다.
삶의 많은 ‘준비’는 사실상 출발을 미루는 기술이다.
처음부터 매끈하게 시작하려는 마음은 아름답다.
그리고 잔인하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늘 같은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너는 시작과 동시에 증명해라.”
증명은 무겁다.
무거우면 늦어진다.
늦어지면, 시작이 아니라 사전검열이 된다.
바보는 검열을 하지 않는다.
그는 대충 시작한다.
대충 시작한다는 말이 싫다면 이렇게 바꿔도 된다.
“일단 시작 가능한 형태로 최소화한다.”
허술함은 ‘능력이 없음’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덜어내는 능력’이다.
카드 속 개는 종종 “경고”로 해석된다.
물어뜯는 현실감각.
혹은 말리는 양심.
하지만 나는 저 개를 조금 다르게 본다.
불안은 늘 짖는다.
짖는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불안은 대개 사실을 말한다.
떨어질 수도 있다.
다칠 수도 있다.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불안이 아니라,
불안의 짖음에 내가 무릎을 꿇는 것이다.
바보는 개를 데리고 간다.
그건 불안을 데리고 가는 일이다.
불안이 있어도 걸을 수 있다는 증명.
불안이 있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역설.
초반에 완벽하게 각 잡아놓은 것들은
나중에 수정하기 어렵다.
이미 그 형태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정은 소화액이다.
(너를 녹여서, 남이 삼키기 좋은 형태로 만든다.)
허술한 시작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러니 방향을 틀 수 있다.
도망칠 수도 있다.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바보는 원래 0번이라, 0으로 돌아가는 게 “후퇴”가 아니라 “원점 회복”이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허술함은 안전장치다.
스스로를 붙들어매지 않으니까.
첫 시도는 공개하지 않는다
허술함을 보호해라.
씨앗은 박수 속에서 싹트지 않는다.
‘성공’ 대신 ‘재개’만 목표로 한다
오늘 실패해도 내일 다시 펼치면 된다.
바보는 ‘연속성’으로 승리한다.
너무 큰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거창한 제목을 달면
그 제목을 감당하느라 내용이 죽는다.
처음엔 그냥 “메모”, “연습”, “초안”이면 충분하다.
절벽 끝에서 한 발 내딛는 순간,
사람들은 결과를 상상한다.
추락. 실패. 망신. 종료.
하지만 바보의 세계에서
그 한 발은 결과가 아니라 조건이다.
시작이 허술할수록 좋은 이유는,
그 허술함이 너를 가볍게 해서
바람이 들어올 틈을 만들기 때문이다.
구멍이 난 종지는 물을 못 담는 대신,
물이 흐르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흐르는 것만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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