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번 카드 / 해골 / 말 / 깃발 / 떠나는 것들)
죽음을 너무 크게 생각하면
삶이 매 순간 유예가 된다.
죽음을 너무 작게 생각하면
삶이 그냥 관성으로 굴러간다.
그래서 이 카드는, 한 장으로 양쪽을 동시에 때린다.
겁을 내라고 때리고,
겹겹이 붙어 있던 헛된 의미들을 떼라고 때린다.
죽음이 외부 사건이기 전에 내부 결단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Death 카드의 얼굴은 표정이 없다.
표정이 없다는 건, 변명이 없다는 뜻이다.
미안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냥 지나간다.
사람들은 죽음을 “벌”처럼 해석하고 싶어한다.
벌은 이유가 있으니까.
이유가 있으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런데 죽음은 대개 이유가 아니라 순서다.
삶이 생긴 방식의 반대 방향으로, 조용히 정리되는 순서.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끝’이어서가 아니라
‘진행’이기 때문이다.
걸어오는 건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행하는 건 이미 내 시간 위를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Death 카드는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이다.
지금, 네가 붙잡고 있는 것들 중
이미 뿌리가 죽어 있는 것들을 손에서 떼라는 말.
어떤 사람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현실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성장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미 죽어 있는 것을 들고 있으면
살아 있는 것까지 썩힌다는 점이다.
Death 카드에서 가장 이상한 건, 깃발이 흰색이라는 점이다.
검은 기사가 흔드는 건 검은 깃발이 아니라 흰 장미다.
여기서 ‘죽음’은 살육이 아니라 치환이다.
무엇이 도태되고 무엇이 남는지, 그 우스꽝스러운 냉정함.
“생명을 잃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 도태된 것이 생명”이라는 뒤집힌 문장처럼
살아 있음은 늘 죽음 위에 얹혀 있다.
그러니까 이 카드가 말하는 죽음은
“너를 없애겠다”가 아니라
“너의 낡은 구조를 그만 쓰겠다”에 가깝다.
누군가는 왕관을 쓴 채 쓰러져 있고,
누군가는 기도하고 있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있다.
죽음은 공평하지만 친절하지 않다.
다만 공평한 만큼, 가끔은 이렇게 느껴진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 순서가 와서.”
그 생각만큼 기묘하게 사람을 살리는 것도 없다.
(불행이 내 탓이라는 위안—그 역설적인 위로는 아주 오래된 방식이다.)
지금 내 손에서 ‘이미 끝난 것’은 무엇인가?
관계/계획/자기 이미지/습관.
끝난 걸 들고 있으면 다음이 못 온다.
나는 무엇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죽여야’ 하는가?
이 질문이 잔인해 보이는데, 사실 가장 현실적이다.
(진화가 시작되는 방식이 잔인하다는 비유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 교체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소 단위는 무엇인가?
죽음이 전부를 뺏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최소 단위의 선택은 남는다.
통제와 자유가 뒤엉키는 지점—
그 묘한 감각을, 어떤 문장은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까지 말한다.
문을 닫으면 “끝”이다.
문짝을 떼어내면, 끝이 아니라 바람이다.
Death는 마지막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여기까지는 충분했다.
이제부터는 다른 구조가 필요하다.
살아남는다는 건, 교체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멀리—카드의 맨 끝—해가 떠 있다.
그 해는 위로가 아니다.
그냥 다음 장면이 있다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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