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내가 죽였다. 근데 어쩔건데? 잡아넣기라도 하게? 나 변호사야~ 대한민국 최고의 HK로펌 변호사!"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시그널의 한 장면.
검사장의 아들인 한세규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당당하기 그지없다. 그의 주변에는 부와 권력에 기생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으며 그에게는 죄를 지어도 빠져나갈 구멍이 수도 없이 많다.
한세규, 남규만, 그리고 지난 해 큰 인기를 끌었던 조태오. 이들은 모두 남부러울 것 없는 권력가, 재벌가에서 자랐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어둡고 포악하며 미성숙하다. 쉽게 발끈하고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해 폭발하는 모습은 이들에게 상당한 열등감이 있으며 이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했음을 짐작케한다.
이들처럼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도 쉽게 발끈하고 폭발적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 이 아이들은 화를 잘 참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충동적 행동을 일삼는다. 나 역시 중학생임에도 도박과 음주, 반복적 폭력 행동을 멈추지 못하는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이 아이의 부모는 재벌 수준은 아니었지만 제법 돈이 많았고, 아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주려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해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아이가 떼를 쓰면 결국 모든 것을 들어줬다. 학교에서 친구의 돈을 훔쳤을 때도 엄마가 나서 아이를 구제했다. 아이는 일주일 간 화장실 청소를 하기로 했으나 이마저도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냥 어쩔 수 없는 애'라며 주변의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해를 받은 아이의 행동이 더욱 심해졌다. 친구를 때려 수시로 돈을 갈취했고 그 돈으로 온라인 도박을 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또 애가 돈을 좀 땄더라고요. 차라리 아예 못했어야 되는데, 도대체 어떡해야하죠?"
약간의 자랑이 섞인 듯한 어조에 머릿 속이 멍해졌다. '진짜.. 어머니, 어떡하죠?'
반면 아이의 아버지는 법조인으로 아주 엄한 분이셨다. 하지만 관심사는 아이의 폭력이나 잘못된 행동이 아닌 오직 성적이였다.
공부를 꽤나 하던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성적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아이를 호되게 혼냈다.
"이해를 할 수가 없네. 너는 이 점수가 이해가 되냐? 내가 너처럼 과외하고 학원 다녔으면 아무리 못해도 이러진 않았을 거다. 넌 대체 누굴 닮아 이 모양이냐?"
모진 말과 체벌로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고 아이는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 한편으론 증오했다.
그렇게 아이는 일그러져갔다. 마음에는 분노와 열등감이 쌓였고, 이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해소하기 시작했다. 돈과 힘을 남용하며 잘못을 저질렀지만 어머니의 어긋난 애정이 아이를 더욱 부추겼다. 그 사이 아이의 몸은 훌쩍 자랐지만 올바른 도덕관이나 가치관을 확립할 기회나 자기를 조절해 볼 경험을 갖지 못했다.
아이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유치원생 같았다. 다만 어릴 때는 힘을 줘 집어던져도 망가지지 않던 장난감이 이제는 쉽게 부숴져나갔다. 그리고 망가뜨려선 안되는 것들까지도 집어던지고 있었다.
이야기의 끝은 자명하다. 아이가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결국 본인의 삶, 그리고 자기 자신이다. 부모가 이를 잡아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결국 망가진 자기 세계에 고립되고 외로워질 것이다.
자기심리학의 창시자 코헛은 '최적의 좌절'이 인간을 성숙시킨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너무 약한 좌절은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 한계를 깨달을 수 없게 하며 성장의 계기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한 좌절을 부여해서도 안된다. 아이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심리적 외상 경험, 즉, 트라우마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야말로 부모로서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문제 행동을 돈이나 권력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내 행동으로 인해 다른 이가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이해시켜주어야만 한다.
부모는 아이의 모든 짐을 대신 지워주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가 자랄수록 자신의 짐을 스스로 들 수 있도록, 시련이 있더라도 본인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더 나은 부모의 모습이 아닐까.
※ 상담심리사 윤리 강령에 따라 제가 쓰는 모든 글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상당 부분 각색된 것이며 내담자의 사적인 내용은 수록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