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
휘슬 소리와 함께 선생님이 깃발을 힘차게 내렸다. 정신 없이 팔, 다리를 움직여보지만 하나 둘 앞서가는 뒷모습에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목을 앞으로 쭉 빼고 온힘을 다 쏟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운동장에 널부러져 쇳내나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난 진짜 최선을 다했는데..'
기록에 따라 당연한 결과를 받았지만 어린 마음은 아쉽고 억울했다. '나도 최선을 다했는데 어째서 내 점수는 낮아야하지? 12초, 13초가 아니라도 20초에서 18초로 2초나 시간을 단축한 내 노력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걸까?'
작고 어린 물음에 대한 답은 모질었다. "세상은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더 중요한 건 잘하는 거야."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객관적 평가지에 '노력'이란 항목은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했다는 것을 누가, 어떻게, 점수로 매길 수 있겠는가. 다분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이 평가는 또 다른 분노와 억울함을 야기할 것이다. 실제로도 직장에서 근무 태도를 이유로 어떤 처분을 받는 것만큼 화가 나는 일은 없으니까.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노력보다 눈에 띄는 것은 성적이요, 결과다. 상담실에 오는 엄마들도 그렇고,대부분의 부모가 내 자식이 공부든, 음악이든, 운동이든, 뭔가는 한 가지 잘 하는 게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처음부터 재능을 타고 나지 않은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잘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노력하는 것'뿐이다.
늘 그렇듯 우리는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아이가 백점을 받아오면 파티를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했더라도 제자리걸음인 성적에는 쉽게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정신줄을 다잡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줄 것이 있다. 바로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일의 과정일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 아이가 다른 무엇보다 노력을 잘 하는 아이이길 바란다. 그럼 커서 공부든, 음악이든, 운동이든, 아니면 미래의 뭐가 됐든 그에 따른 결과를 자연스레 얻게 되지 않을까?
아이가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노력의 힘을 키우는 것은 부모의 신념과 태도에 달렸다. 학교에서는 점수를 줄 수 없었던 '노력'에 부모가 점수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해준다면 아이들도 노력이란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제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다. 어려도, 잘해야 칭찬 받고 좀 더 많은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각기 다르게 타고난 재능은 언제 빛을 발할지 알 수가 없어서, 우리는 그것이 발화하기 전까지 아이가 주저앉지 않도록 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어야한다. 그 사이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해 자신의 노력에 따른 결과를 누리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