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상대를 이해하고 나를 내려놓기
"내가 진짜 그 시키 때문에 답답해 죽겠다. 점수가 꽤 나왔어. 그럼 거기 맞춰서 괜찮은 데 가면 되잖아. 근데 기껏 한다는 말이 경호학과에 가고 싶다는거야."
"그래도 하겠다는 게 있네요. 그래서 뭐라 하셨어요?"
"내가볼 때 경호는 그냥 심부름꾼이나 똑같아. 그걸 한다고 비싼 등록금 들여가며 대학에 가? 그럴거면 그냥 가지말라 그랬어. 그랬더니 아무것도 안하고 집구석에서 저러고 있는거야. 내가 나 좋자고 그래? 아빠가 하는 말은 들을 생각을 안해.'
삼촌은 학생때부터 수십년간 운동을 해오신 분이다. 우리 집안에서 누구보다 순수하고 좋은 분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종종 무섭고 고집스러운 아버지가 되곤 한다.
'내가 나 좋자고 그래? 다 지들 생각해서 이러는 거지.' 삼촌이 가끔 하시는 말이다. 우리 삼촌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자주 쓰는 표현인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엄마는 맨날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래요. 진짜 나를 위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안타깝게도 내가 상담실에서 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이쪽에 가깝다.
이제껏 내가 만난 부모님들 중 아이를 망치고 싶거나 아이와 어떻게든 싸우고 싶어서 애를 쓰는 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말 모두 하나 같이 아이를 위하고, 사랑하고, 어떻게든 아이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님들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모님들이 상담실에 오기까지는 아이들과의 숱한 갈등의 시간이 배경에 있었다.
의도와 달라도 너무 다른 결과가 발생하는 안타까운 상황.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아이의 말에 담겨있다.
"엄마는 맨날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래요. 진짜 나를 위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가 "엄마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죠."로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아이를 이해해야 하고, 진정 아이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상담을 할 때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다.
A는 수시로 상담에 지각을 하는 내담자였다. 그 날도 A는 지각을 했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기분이 조금 상했다. 고민이 됐다. '과연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하는 것이 내담자에게 도움이 될까?' 결론은 'yes' 였다.
내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첫째, 내담자에게 반복해서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이슈가 있었고, 둘째, 내담자가 이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었으며, 셋째, 내담자와 나의 치료적 관계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답이 'no'였다면 나는 이와 다른 반응을 했을 것이다.
상담 시간을 15분 지나 내담자가 도착했고 내담자의 사정을 들어봤지만 지각에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나는 기분이 나빴던 마음을 내담자에게 표현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인상을 많이 찌뿌릴 필요는 없었다. 그저 솔직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나의 마음을 전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늦었다고 하니 나와의 약속이, 그리고 내가 존중받지 못한 것 같아 조금 기분이 나쁘네요."
이어 설명과 이해의 시간을 좀 더 가졌고, 내담자가 내게 미안함을 표현했다. 물론 나도 흔쾌히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A와 나는 감정을 정화하고 갈등을 회복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상담에서 내담자는 5분 일찍 상담실에 도착했다. 물론 매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수시로 어떤 말이나 행동이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가, 과연 그를 위한 것인가'를 점검하려 노력한다.
왜냐하면 온전히 상대를 위하는 마음과는 다른, '내 안에서 올라오는 나의 욕구'가 섞여 있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특히 질문을 할 때 그렇다. 상대를 위한 질문도 있지만 그저 내 궁금증을 채우고 싶은 욕구에서 질문이 떠오를 때가 더 많다. 이것을 구분하고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다. 상담실에 있을 때도 그렇지만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참 어렵다. 이유를 묻지 않고 위로해줬어도 될 일이었는데 끝까지 나의 궁금증을 채우려다 갈등이 생겼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참 미안하다.
부모-자식 간에도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마음'과 '나의 욕구가 발현하는 순간'을 잘 구분해야 한다.
아이가 좋은 직업을 갖고, 괜찮은 연봉을 받으며 윤택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부모의 마음이다. 누가 이를 탓할 수 있으랴. 하지만 좋은 직업이라는 것이 아이의 기준에서 좋은 직업인지, 나의 기준에서 좋은 직업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봐야한다.
또한 아이가 '윤택한 삶(나의 기준에서)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아이를 향한 부모의 애정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부모의 역할은 이러한 바람을 아이에게 잘 전달하는 것. 거기까지다. 아이가 바라는 삶은 부모의 생각과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결국 선택은 아이 스스로 해야 할 몫이니까.
이러한 선택이 나와 조금 다른 것일뿐, 틀리지 않았음을 존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믿고, 또 그에 앞서 '괜찮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아이로 잘 키웠을 나 자신'을 믿자.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를 위해 고민하고 마음 쓰는 부모라면 이미 부모로서의 자기 자신을 믿어도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닐까?
글을 끄적이면 '나 자신을 믿는 마음, 그리고 아이를 향한 믿음'을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