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편지

별빛의 부력-1부

by 시쓰는 충하

다음 날, 알람은 평소와 같은 시간에 울렸지만, 소리는 다른 방에서 나는 듯 멀었다. 밤사이 몇 번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면서, ‘들숨 하나—날숨 셋’만 몇십 번을 되뇌었다. 기이하게도 그 박자는 꿈에서 배운 물에서의 호흡과 집의 공기를 같은 결로 묶어 주는 것 같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발을 바닥에 내리니, 서늘한 감촉이 먼저 깔렸다. 오늘은 학교에 간다—라는 문장을 입 밖으로 조용히 내었다. 말은 가볍게 날아갔지만, 그 문장이 가슴에 내려앉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거울 앞에서 교복을 다듬고 새로 다린 와이셔츠 깃을 세웠다. 가슴쯤에서 손이 한 번 멈췄다. 단추를 잠그는 동작이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주방으로 나가려다 발길이 식탁 앞에서 멎었다. 식탁은 여전히 네 자리였고, 의자는 하나가 밀려 나와 있었다. 의자 다리 밑에 얇게 쌓인 먼지가 새벽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제 저녁에 아빠가 설거지를 마치고 물기를 닦아 놓은 그릇들이 말갛게 마른 소리를 냈다. 냄비는 비어 있었다. 빈 냄비를 보고도, 나는 한참 동안 ‘미역국’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가 멈췄다가 다시 떠올렸다. 빈 냄비를 덮고, 가방을 멨다.

현관문을 열 때, 아빠가 방에서 나와 신발장 쪽으로 걸어왔다. 어젯밤보다 눈 밑 그늘이 조금 덜 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늘은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잠깐 보고, 동시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그래. 점심 잘 챙겨 먹고.”

아빠의 말끝은 ‘먹고’에서 길게 머물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대답하는 대신, 한 번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내쉬는 동안만큼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 잠깐을 등에 얹고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평소와 같았다. 가로수 가지 끝마다 어린 잎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골목 코너의 세탁소는 아침부터 드라이 소리로 바빴다. 세탁소 아주머니가 바람같이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창밖을 봤다. 신호등이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뀌는 사이사이에, 밤새 마른 눈물이 뺨 안쪽에서 다시 젖는 듯했다. 버스 안에는 누군가의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드럼 소리, 누군가는 캔커피를 따는 소리, 누군가는 가방을 열고 닫는 지퍼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들 사이로 내 숨을 맞춰 넣었다. 들숨 하나—날숨 셋. 박자는 빨라지지도, 느려지지도 않았다.


학교 정문 앞 경비실에서 라디오가 낮게 흘러나왔다. 3일 전 택시에서 들었던 채널과 같은 채널인지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역 날씨를 말하고 있었다. ‘오늘 낮 최고 15도…’라는 말이 위로 같기도, 빈말 같기도 했다. 교문을 지나 운동장을 가로질러 본관 쪽으로 걸었다.

교무실 문을 열자 탁상 달력 위로 아침 햇살이 사선으로 떨어졌다. 화이트보드에는 오늘 날짜와 각 반의 생활지도 공지가 적혀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컴퓨터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바로 일어섰다.

“은하야.”

나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앞에서 말부터 꺼내면 울음이 먼저 나올 것 같아서, 몸짓으로 인사를 선행했다. 선생님도 고개를 숙였다. 나는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장례는… 무사히 치렀어요.”

문장마다 숨을 쉬며 말했다. ‘무사히’라는 단어를 가운데에 넣는 순간, 목젖이 잠깐 올라갔다. 울음이 그 뒤를 따라 올라오려는 걸, 나는 날숨의 박자로 다시 밀어 넣었다. 선생님은 손바닥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등을 두드릴 듯한 동작이었지만,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그래, 고생했어. 당분간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무엇이든 천천히 다시 시작해보자. 그냥 쉬고 싶으면 언제든 조용히 찾아오렴.”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조용히 교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었고, 창문 바깥으로 봄 햇살이 하얗게 깔려 운동장의 바닥 질감을 살리고 있었다. 그 질감이 이상하게 선명해 보였다.

교실 문 앞에 섰을 때, 안에서는 언제나와 같은 아침의 소란이 파도처럼 번졌다. 누군가가 내 모습을 발견하고 소리가 한순간 낮아졌다가, 다시 원래의 볼륨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위에 얇은 포스트잇 몇 장이 붙어 있었다. ‘은하야, 힘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같은 문장들이 서로 다른 글씨로 겹쳐 있었다. 어떤 글씨는 모서리를 둥글게 말았고, 어떤 글씨는 획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포스트잇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눌러 붙였다. 떨어지지 않게. 떨어지지 않게—라는 말이 손가락에서 마음으로 흘러 들어왔다.

첫 교시는 국어였다. ‘현대 소설 읽기’ 단원, 오늘의 학습 목표가 칠판 위에 적혔다. 선생님은 처음 5분 동안 말없이 판서를 하다가, 갑자기 분필을 내려놓고 우리를 조용히 보았다.

“오늘은 같이 읽는 것만 하자. 발표나 토론은 쉬고.”

그 말에, 몇몇 아이들이 숨을 내쉬었다. 나는 책을 펼치고 선생님의 목소리에 올라타는 글자를 천천히 따라가려 했다. 그러나 글자들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달아났다. 문장 끝마다 내가 따라잡지 못한 무언가가 남았다. 나는 문단 첫 줄을 손가락 끝으로 따라가다가 금세 길을 잃었다. 활자들이 종이 위에서 서로의 자리를 조금씩 바꾸는 듯했다. ‘문’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아침의 현관문이 떠올랐고, ‘식탁’이 나오자 미역국의 김이 눈앞에 번졌다. 문장 속 ‘웃음’은 영정 사진의 웃음으로 읽혔다. 책 속 이야기와 내 이야기를 분리시키려고 애쓰는 동안, 줄 간격이 점점 좁아졌다.

선생님은 계속 천천히 낭독을 이어갔다. 얇은 종이를 넘기는 소리, 뒷자리에서 누군가 숨을 고르는 소리. 교실의 모든 소리마다 자꾸 엄마가 끼어들었다. 나는 책을 읽는 척, 페이지 아래 여백만 오래 바라봤다. 여백이 하얗게 비어 있을수록, 마음은 더 쉽게 엄마 쪽으로 기울었다.

한 문단이 끝날 때마다 나도 끝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따라가지 못했다. 문장 끝마다 잡히지 않은 꼬리들이 남았다. 그 꼬리들을 붙들면 엄마가 따라 올 것 같아서, 아예 잡지 않기로 했다. 들숨 하나—날숨 셋. 날숨을 길게 끌어내리면 글자들이 잠깐 자리를 찾는 듯했지만, 그 사이 또 다른 단어가 엄마를 불러왔다.

“은하야, 어디까지 읽었니?”

딴짓을 하다가 길을 잃은 앞줄 친구가 뒤돌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페이지 오른쪽 아래 숫자를 가리켰다. 거짓말이라기보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의 표시였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선생님이 읽던 대목이 ‘돌아본다’에서 ‘나아간다’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 두 단어 사이에 오래 붙잡혔다.

이제 내게는 돌아보면 엄마가 있고, 나아가면 엄마가 없었다.

창밖에서 체육 시간 공이 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탁, 탁—탁. 그 리듬에 맞춰 숨을 세어 보았다. 탁에서 들이쉬고, 다음 탁에서 길게 내쉬고. 교실 공기가 아주 조금 더 들어왔다. 하지만 다시 페이지를 올려다보는 순간, 활자 속에 그 어디에도 ‘엄마’라는 글자가 없는 데 자꾸만 보였다.

선생님이 책을 덮고 칠판에 짧게 적었다. ‘인물의 감정 변화—표면/심층’. 나는 공책을 펴고도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표면’이라는 단어 위에 엄마의 마지막 미소가 떠올랐고, ‘심층’에는 장례식장 의자에 스며들던 내 울음이 가라앉았다. 펜 끝이 한 번 떨리다가 멈췄다. 멈춘 펜이 내 마음의 현재 위치 같았다. 움직여야 하지만,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물을 마셨다. 종이컵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에 물이 묻었고, 한 방울이 손등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 작은 물의 길이, 어제 납골당 유리문 위로 흘러내리던 내 숨의 김과 닮아 있었다.


점심시간, 수정이가 내 자리로 와서 가방을 들어 올렸다.

“입구 쪽 말고, 저기 끝쪽 탁자에서 먹자.”

우리는 식판을 받아 들고, 사람들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입구에서 제일 먼 쪽에 있는 탁자,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식판 위의 음식들이 규칙적으로 자리했다. 국, 밥, 두 가지 반찬, 그리고 작은 과일 컵. 스테인리스 표면이 창밖 하늘을 받아 미세하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숟가락 소리만 났다. 말없이 밥알을 몇 숟가락 넘기다 보니, 목 뒤에서 뜨거운 것이 모였다. 수정이의 젓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무언가를 먹는 것만 해도 잘하고 있는 거야.”

그 말에, 나는 숟가락을 식판 위에 내려놓고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숨이 길어질수록, 밥알이 아니라 지난 며칠의 장면들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유리문, 이름표, 손바닥의 열, 국화의 향, 그리고 어젯밤 꿈속 수영장의 형광등.

“어젯밤에 꿈을 꿨어.”

말을 꺼내는 동안 이미 눈이 젖었다. 수정이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예전에 엄마랑 수영장 갔었던 꿈이었어. 내가 뜨려고 하니까 계속 가라앉아서, 자꾸 힘을 빼야 했어. 힘을 빼면… 조금 떠올랐고. 또 힘이 들어가면 가라앉았고.”

수정이는 잠깐 웃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다운 꿈이다.”

나는 웃음을 흉내 내다 그만 울음을 먼저 쏟아냈다. 울음은 갑자기 오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나를 향해 오던 울음이, 여기서 멈춰 서는 듯이 천천히 왔다. 눈가가 먼저 뜨거워지고, 코가 멍해지고, 목 안쪽이 조여오는 그 익숙하고도 낯선 순서를 그대로 밟았다. 수정이가 울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티슈를 내밀었다. 티슈를 받아 들고도 나는 한동안 코에 대지 못했다. 그대로 두 뺨을 타고 떨어지는 것을 그냥 두었다. 떨어지는 동안만큼은, 덜 가라앉았으니까.

“은하야.”

수정이가 아주 낮게 불렀다.

“응.”

“오늘은 밥 다 못 먹어도 돼. 내일도 밥이 나오고, 모레도 밥이 나오고, 다음 주에도 밥이 나와. 근데 지금 이 눈물은 오늘만 이렇게 흐를 수 있어. 그러니 마음껏 흐르게 해도 돼.”

울음과 함께 어제 하지 못한 말들이 뒤늦게 입술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인사할 때, 엄마 웃는 사진이 너무 밝아서, 그래서 더 슬펐어. 현관문 세게 닫은 소리가 계속 머리에 울려. 나 이제 평생 엄마가 끓인 미역국 냄새가 생각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말이 튀어나올 때마다 수정이는 한 단어도 빼먹지 않고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필요할 때는 내 손등을 문질렀다. 말이 다 떨어졌을 때, 수정이가 내 식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이건 내가 반납하고 올게. 너는 물 한 컵만 더 마시자.”

돌아선 수정이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날숨의 끝에서, 가슴 어딘가가 아주 얕게 떠올랐다.

오후 수업은 잔잔한 비처럼 흘러갔다. 선생님들은 오늘따라 칠판을 덜 두드렸고, 친구들은 장난을 덜 쳤다. 사회 시간에는 세계 지도 위에 얇은 필름을 얹고, 강의 흐름을 색펜으로 따라 그렸다. 색이 겹치는 지점에서 펜 끝이 잠깐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는 순간, 어제 납골당의 유리 표면이 떠올랐다. 과학 시간에는 소리를 주제로 배웠다. 소리의 파형이 오실로스코프 화면 위에 그려졌다. 규칙과 불규칙 사이에 있는 선들. 선들이 닮아 있었다. 어젯밤 수영장의 물결과, 점심시간 내 울음의 호흡과.

종례가 끝나고, 선생님이 나를 복도에서 다시 불렀다.

“오늘 하루, 잘 보냈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얇은 유리잔을 다루듯 조심히 말했다.

“그래 집가서 푹 쉬고 내일 또 보자.”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감사합니다’라는 글자를 속으로 또박또박 써 보았다. 글자의 획이 하나씩 날숨과 함께 그어졌다.

교문을 나서자 오후 햇빛이 약간 기울어 있었다. 운동장 모래 위로 누군가의 발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발자국의 깊이가 제각각이었다. 깊은 발자국 옆에 얕은 발자국이 이어지고, 얕은 발자국 옆에 또 다른 깊이가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피해 걸었다. 길을 건너 골목으로 접어들자 꽃집 앞에 작은 화분들이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옅은 분홍의 프리지어, 노란 프림로즈, 이름 모를 작은 보랏빛 꽃. 사장님이 분무기로 물을 뿌리자 꽃잎 위 작은 물방울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납골당 유리 벽의 낮별들과 겹쳤다. 낮에도 별이 있다—어제의 문장을 오늘도 다시 떠올렸다.

집으로 가는 길을 일부러 조금 길게 돌아가 보기로 했다. 흔히 가는 큰길 대신, 골목 사이사이를 이어 붙였다. 누군가는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누군가는 2층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김이 나는 라면 냄새가 어디선가 흘렀고, 망치질 소리가 멀리서 두어 번 들렸다.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전화번호 숫자들이 햇빛에 하얗게 번져 있었다. 나는 그 숫자들을 읽지 않고 눈으로만 훑었다.


우리 아파트 동 입구에 다다르니, 우편함들이 복도 끝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늘 보던 풍경이었는데, 오늘은 첫 장면처럼 보였다. 금속 함 박스 앞에 서니 내 얼굴이 작게 비쳤다가 사라졌다. ‘302호’ 작은 네임플레이트 밑으로 손을 넣어 우편함을 열었다. 방울소리 같은 얇은 금속 소리가 나는 동시에, 종이의 감촉이 손등을 스쳤다. 나는 가장 위에 놓인 봉투를 집어 들어 빛 쪽으로 기울여 보았다.

크림색. 약간 두툼한 종이. 왼쪽 위 모서리에는 작은 별 스티커. 글씨는 내가 너무 잘 아는 필체였다. 둥근 획이 많고, 받침을 조금 길게 빼는 습관. ‘은하에게’—네 글자가 봉투 한가운데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순간, 복도 공기가 얇게 흔들렸다. 손바닥이 스스로 봉투를 더 깊게 감쌌다. 냄새와 기억은 자주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실제로 냄새가 났던 건 아니겠지만, 나는 분명 엄마의 사진 앨범을 넘길 때 맡던 종이 냄새를 떠올렸다.

봉투 뒤를 뒤집어 보았다. 봉합된 부분이 매끈했다. 양각으로 아주 얕게 눌린 종이 결이 빛을 받아 드문드문 반짝였다. 센서등이 천천히 꺼지려다, 내가 미동하는 바람에 다시 켜졌다. 불빛이 잠깐 숨을 고르는 듯했다. 들숨 하나—날숨 셋. 날숨의 끝에서, 봉투 모서리가 은빛으로 가늘게 빛났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어떤 문장들이, 어떤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을까. 손톱 끝이 조용히 모서리를 더듬었다가 멈췄다. 아직은 아니다. 아니 무엇인지조차 판단하지 못한 채, 그저 봉투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아주 얕게 떠오르고, 다시 가라앉았다. 그 얕음이 한 번 더 겹쳤다.

나는 봉투를 가방 속 책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지퍼를 다 닫지 않고, 손바닥을 한 번 더 얹었다. ‘은하에게’라는 네 글자가 그 안에서 계속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직전, 나는 다시 우편함을 돌아보았다. 복도 끝 창문으로 저녁 빛이 얇게 번지고 있었다. 그 빛이 봉투의 모서리를 따라왔는지, 내 손끝에서 아직도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문이 열렸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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