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의 부력-2부
집에 돌아와서도 쉽게 편지를 열지는 못했다. 발신인이 누군지 왠지 알 것만 같았기에. 함부로 열었다가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은하에게.’ 네 글자가 조금 더 숨을 쉴 시간을 주어야 했다. 샤워를 마치고 잘 준비를 끝낸 뒤에 마침내 책상 앞에 앉았다. 램프 불빛이 낮은 원을 그려 봉투 가장자리까지 닿았다가, 종이결에서 한 번 부서졌다. 방 안 공기는 얇았고, 유리창 밖의 빛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의자 다리와 바닥이 맞물리며 내는 마찰음이 길게 끌렸다가 사라졌다.
손바닥을 배 위에 올리고, 들숨 하나—날숨 셋. 내쉬는 끝에서 손을 들어 봉투 모서리를 쓸었다. 크림색 표면, 미세하게 솟은 종이 결, 별 모양 스티커의 은빛. 스티커 가장자리는 아주 얇게 들려 있었다. 가위를 집었다가 내려놓고, 손톱으로 스티커 한쪽을 살짝 밀어 올렸다. 종이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갈라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나는 숨을 한 번 더 길게 내쉬었다. 공기가 목을 지나가며 내는 가벼운 소리가 책상 표면을 따라 펴졌다.
봉투 속에는 접힌 흰 종이 한 장이 있었다. 꺼내는 순간, 오래된 사진 앨범을 넘길 때의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엄마가 앨범을 정리하던 밤들의 냄새. 포토 코너에서 흘러나오던 접착제의 달큰함, 코팅지에 반사되던 조도. 나는 종이의 접힌 자국을 따라 조심히 펼쳤다. 글씨는 내가 아는 그 필체였다. 둥근 획, 길게 빠지는 받침, 급할 때 살짝 올라가는 ㅅ의 끝. 첫 줄이 내 눈으로 들어왔다.
은하에게.
은하야 생일 축하해! 우리 집의 가장 반짝이는 별, 내 은하. 오늘 하루만큼은 잔소리도, 늦잠도, 너의 조금 엉뚱한 표정도 다 선물로 받아줄게. 아침에 미역국 냄새가 집 안 가득했을 거야. 국물 간은 맞았을까? 잡채는 면이 너무 불지 않았을까? 너는 분명 “엄마, 시간 없어!” 하면서도 한 젓가락은 몰래 먹었을 것 같아. (맞지?)
내일 이후로 엄마가 1년 동안 집을 비우게 됐네. 그 결정을 한 뒤로 마음이 자꾸 길을 잃어버려. 너 없는, 엄마가 없는 일 년—생각만으로도 목 뒤가 뜨거워진다. 그래서, 작은 일을 하나 준비했어. 이름을 붙이자면 ‘은하의 일 년’이야. 대구 안에서 우리 가족의 추억이 있는 장소들에 너를 위한 편지를 가져다 두었어. 너무 멀지 않은 곳들이니 학교 생활에 지장을 주진 않을거야~ 거기서 편지들이 엄마대신 너를 기다릴테니 한번 잘 따라가보길 바라. 엄마가 옆에서 “여기 봐, 너무 아름답지 않니?!” 하는 목소리 대신, 글자로 너에게 말을 걸어볼게!
은하야, 네가 커 가는 걸 보면서 나는 정말 매일 고마웠어. 너는 우리가 서로에게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는 아이니까. 사진을 찍다가도, 장바구니를 들다가도, 빨래를 개다가도, 문득 네 이름을 속으로 부르면 마음이 한 칸 더 밝아졌어. (아빠도 그래. 조용하고 겉으로는 덤덤한 척하지만, 네 얘기만 나오면 눈꼬리가 먼저 웃는 사람이니까.)
엄마가 없는 일 년이 너한테 너무 길지 않았으면 해. 길다면—그 길이를 우리가 조금씩 나눠 들자. 내가 앞에서 몇 보, 네가 뒤에서 몇 보. 너 혼자 많은 걸 들지 않도록. 그러니까 가끔 편지를 찾아줘. 편지를 찾으러 걸어가는 그 시간들이 네 하루를 조금 덜 무겁게 해주기를.
첫 번째 목적지는 ‘앞산 전망대’야. 예전에 아빠랑 셋이 밤공기 맡으러 갔던 곳, 기억나지? 그곳 전망대 식당에 다음 편지를 맡겨 두었어. 사장님이 친절하시더라. “생일이면 반드시 전해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하고 왔어.
오늘 밤엔, 촛불이든 가로등이든 네가 보는 빛 하나를 골라서 ‘내 빛’이라고 마음속으로 불러보렴. 그 빛이 네 방 천장에 붙어 있는 별 스티커처럼 오래 가라앉지 않기를 바랄게.
사랑한다, 내 은하.
엄마가.
P.S. 전망대에 가면 꼭 야경 한 장 찍어. (눈은 꼭 감지 말고!)
마지막 괄호까지 읽는 순간, 종이가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내 손바닥이 먼저 바닥이 됐다. 그 바닥 위에서 글자들이 한 줄씩 흔들렸다. 생일 축하해—라는 문장과 1년—이라는 단어가 서로를 향해 다가오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다. 1년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단어가 내 뒤통수에서 먼저 일어났다. 나는 그 단어에 등을 부딪혔다. 숨이 끊겼다. 아니, 숨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가 아무 데도 닿지 못하고 도로 밀려나왔다.
“엄마—”
소리가 방 안에서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멈추지 못했다. 억울함도, 미안함도, 사랑한다는 말도 순서를 잃고 한꺼번에 쏟아졌다. 입을 막았다. 소매가 금방 젖었다. 들숨 하나—날숨 셋. 셋을 세는 동안 울음도 같이 셌다. 셋의 끝마다 가슴 어딘가가 아주 얕게 떠올랐다가, 그대로 무너졌다. 그 무너짐들이 겹겹이 포개졌다. 누가 위에서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러도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높이로.
책상의 나무결이 눈가에 닿았다. 나무결 사이사이에 내 숨이 낀다. 흐릿한 김이 생겼다가 금방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사라졌다는 사실이 늦게 아팠다. 울음은 한 번 멎는 척하다가, 날숨 끝에서 다시 어깨를 잡아끌었다. 오늘 하루 내내 배우고 있던 그 리듬—들숨 하나, 날숨 셋—을 천천히 되살렸다. 셋이 길어질수록 울음은 아주 조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돌아올 곳을 찾아 놓은 사람처럼, 방 모서리에 앉았다.
한참 만에 겨우 물컵을 채웠다. 정수기의 물줄기가 얇은 초록빛처럼 컵에 떨어졌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니 손끝의 열이 물을 덜 차갑게 만들었다. 물이 목을 지나갈 때, 작은 소리들이 났다. 그 소리들이 오늘의 문장들 사이사이에 재봉선처럼 박혔다. 눈가의 소금기가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나는 조심히 편지를 다시 펼쳐, 처음부터 한 줄씩 소리 없이 읽었다. 엄마의 필체는 여전히 둥글었고, 둥근 글자는 사람처럼 숨을 쉬었다.
생일 축하해. 내 은하.
한 줄 한 줄, 엄마의 입김이 글자 옆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글자의 모서리를 짚었다. 잉크가 아주 살짝 번진 곳에서 엄마의 숨이 느껴졌다. 쓰는 동안 잠깐 멈추었다 다시 시작한 획, 생각을 고쳐 적으면서 만든 작은 흠집. 그 미세한 망설임들 속에 엄마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종이 가장자리를 따라 엄지손톱으로 쓸었다. 종이가 여백을 품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여백은 흰색이 아니라, 아직 쓰지 않은 숨이었다.
편지 속 ‘은하의 일 년’이라는 말이 눈에 다시 걸렸다. 지도. 스스로 그리기도, 누군가에게서 받기도 어려운 것. 신기하게 엄마는 늘 지도를 잘 그렸다. 사실의 경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그 사이사이 여백을 넓게 남겨 두는 지도. 우리는 그 여백에 늘 앉았다. 앉아 과자를 먹고, 사진을 한 장 더 찍고, 서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 여백들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여백은 흰색이었고, 흰색은 빛을 잘 모았다. 빛이 모이면, 모서리가 둥글어졌다.
앞산 전망대.
마지막 줄의 괄호를 손가락으로 덮었다. (눈은 꼭 감지 말고!) 엄마의 장난이 그 괄호 안에서 아직 따뜻했다. 그 온기가 내 눈꺼풀을 밀었다. 감지 말 것. 나는 눈을 감지 않으려 노력했다. 눈을 뜨면 더 또렷해지는 슬픔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자, 편지의 첫 줄로부터 방금 덮은 괄호까지, 글자들이 가늘게 반짝였다. 별 스티커와 같은 빛이었다. 방 안 공기가 그 빛에 잠깐 얇아졌다.
나는 편지를 한 번 더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 접힌 자국이 조금 더 진해졌다. 봉투에 넣지는 않았다. 식탁 위에 펼쳐 둔 채, 모서리에 엄마가 남겨 놓은 별 스티커와 닮은 작은 별을 하나 더 붙였다. 스티커가 아주 조금 비뚤어졌다. 비뚤어진 별은 더 별 같았다. 별은 원래 정확한 선 위에만 있지 않았다. 밤하늘 속 별들의 배치처럼, 약간의 어긋남이 오히려 질서를 만들었다.
아빠 방 앞에 조심스레 걸어가 문틈을 바라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방문 손잡이가 희미하게 은빛을 띠었다. 오늘은 술 냄새가 덜했다. 복도 센서등이 내 움직임에 반응해 한 번 켜졌다 꺼졌다. 불빛이 잠깐 숨을 골랐다. 나는 ‘내일 하교 후에 앞산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메모를 짧게 써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였다. 자석이 ‘딸깍’ 하고 붙는 소리가 오늘의 임시 마침표가 되어 주었다.
방으로 돌아오니, 램프 아래 책상의 편지가 여전히 흰 얼굴로 누워 있었다. 불을 끄려다 다시 켰다. 어둠 속에 두면 편지가 혼자 남을 것 같았다. 켜진 불 아래에서 편지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편지 쪽을 보며 의자에 앉았다. ‘은하에게’—네 글자가 또렷했다. 글자들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내가 내쉬는 숨과 글자의 미세한 떨림이 한 박자 어긋난채로. 그 어긋남이 이상하게 편했다. 완벽히 맞추려 하면 더 불안해지는 밤이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노트를 열고 간단히 목록을 만들었다.
— 교복 위에 바람막이
— 물 한 병
— 손수건 두 장 (하나는 울음용)
— 작은 노트, 펜
— 이어폰 (케이블카 안에서 음악 대신 엄마 편지 읽기)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한 줄기 들어왔다. 커튼이 아주 느리게 흔들렸다. 흔들림과 편지의 흰 면이 겹쳤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차갑기만 한 건 아니었다. 볼을 스치며 지나가는 동안, 피부 아래 깊은 곳의 뜨거운 부분을 알고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어제 납골당에서 스쳤던 공기와 닮았지만, 오늘의 공기는 방의 냄새와 섞여 새로운 온도를 만들었다.
잠시 베란다에 나가 서 있었다. 엄마는 편지를 언제 썼던 것일까. 생일 전날 밤? 아니면 생일날 새벽? 부지런한 엄마는 미역국에 불을 올려두고 식탁에서 편지를 작성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엄마는 내가 한 술도 안뜨고 갈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
방으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다. 지퍼가 움직일 때 나는 소리는 ‘지지직’ 하고 얇게 갈라지는 빛의 소리 같았다. 지퍼 머리에 걸린 작은 은빛 고리가 손끝에서 찰칵거렸다. 빈 칸을 만들었다. 빈 칸이 있다는 사실이 안심이 됐다. 비어 있는 것들 덕분에, 채울 수 있었다.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램프 스위치를 눌렀다. 딸칵. 방이 어두워졌다. 어둠이 방을 채웠다. 하지만 식탁 위 편지의 흰 면은 눈꺼풀 안쪽에서 한동안 계속 빛났다. 나는 그 흰 면 위에 얇은 선을 그렸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의 선, 정류장에서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의 선, 케이블이 하늘로 올라가는 선. 선과 선이 만나 작은 별표가 생겼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지 않았다가, 결국 감았다. 눈을 반쯤 뜨는 건 의외로 어렵다. 감으면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수영장의 물결이 아직 잔잔히 살아 있었다. 배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 들숨 하나—날숨 셋. 내쉬는 끝에서 눈꺼풀이 가벼워졌다. 벽 너머로 아빠의 기침 소리가 아주 낮게 한 번 났다. 우리는 서로의 방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숨을 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 편지의 괄호를 떠올렸다. (눈은 꼭 감지 말고!)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아주 작게 새어 나왔다. 그 소리는 방 안에서 금방 사라졌지만, 내 귀 속 수영장에서는 한 번 더 울렸다. 멀리서 엘리베이터가 ‘딩’ 하고 울렸다가 멈췄다. 집 안의 공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는 아주 길게—길게—날숨을 내보냈다. 잠이, 편지의 여백에 스며들 듯이 천천히 찾아왔다.
거울 앞에서 교복을 다듬고 새로 다린 와이셔츠 깃을 세웠다. 가슴쯤에서 손이 한 번 멈췄다. 단추를 잠그는 동작이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거실로 나가려다 발길이 책상 앞에서 멎었다. 편지는 밤새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흰 면은 더 흰 면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위에 손바닥을 조용히 얹었다. 종이를 만지면 종이가 나를 만지는 감각. 얇은 온기가 오갔다.
현관에서 신발끈을 결대로 당겼다. 매듭의 모서리가 반듯해지는 것을 확인하고, 손을 한 번 털었다. 문손잡이를 당기기 전, 심호흡. ‘철컥.’ 도어록이 잠깐의 망설임 끝에 열렸다. 문을 닫는 소리는 어제와 같았지만, 의미는 달랐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 안심이 됐다. 가방 끈을 한쪽으로 고쳐 매고, 1층 로비의 유리문을 지나며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창밖을 봤다. 아침 햇빛이 벤치의 금속 팔걸이를 은빛으로 덮었다. 학교까지의 길은 늘 같았지만, 오늘은 길의 표정이 조금 낯설었다. 낯설음은 늘 먼저 오는 감정이었다. 익숙해지기 전의 얇은 층. 그 얇음 위에 발을 올려놓고, 균형을 잠깐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수업은 어제와 비슷했다. 칠판의 분필 가루가 흰 비처럼 옅게 떨어졌다가, 지우개 자국 사이로 사라졌다. 교실 창턱의 선인장은 밤새 새 잎을 조금 더 밀어 올린 듯 보였다. 나는 공책에 여백을 많이 남겼다. 여백을 많이 남길수록 마음이 더 쉽게 엄마 쪽으로 기울었지만, 오늘은 막지 않았다. 억지로 막는 일은 오히려 더 오래 걸렸다. 점심시간에는 물을 오래 마셨다. 종이컵의 얇은 벽이 손끝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종례가 끝나고, 복도에서 바람이 길게 지나갔다. 교문을 나서며 나는 가방 어깨끈을 한 번 더 조였다. 준비라는 말은 물건을 챙긴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마음의 끈을 정돈하는 일, 호흡의 길이를 미리 늘려 두는 일, 가야 할 길의 첫 발짝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 나는 버스 앱을 열어 앞산으로 가는 길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집에 들러 가볍게 짐만 바꾸기로 했다. 현관문을 열자 집 안 공기가 어제와 거의 같은 냄새로 나를 맞았다. 책상 위 편지는 그대로였다. 나는 그 위에 짧게 손바닥을 얹었다.
“다녀올게.”
편지가 종이의 방식으로 대답했다. 모서리가 아주 미세하게 들렸다 내려앉는 움직임. 가방에는 손수건을 하나 더 넣었다. 바람막이 지퍼를 올리고, 휴대폰 배터리를 확인했다. 카메라 앱을 열었다가 닫았다. 눈은 꼭 감지 말기—괄호 속 엄마의 농담이 다시 떠올랐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고, 신발끈을 두 번 확인했다. 매듭이 단단히 묶인 것을 보고 나서도 손이 한 번 더 갔다. 불필요한 동작처럼 보였지만, 오늘은 모든 불필요가 필요한 쪽에 더 가까웠다. 문을 닫자 ‘철컥’ 하고 마침표가 찍혔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문장이 시작되었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이미 누군가를 내려놓은 직후였다. ‘딩.’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숨은 오늘 따라 나보다 먼저 앞서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아파트 동 입구를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낮게 깔렸다. 구름 사이로 아주 얇은 빛 한 줄이 보였다. 그 빛이 길까지 닿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제 붙여 둔 이름을 속으로 다시 불렀다. 내 빛. 빛은 그대로였다. 그대로인 것들이 오늘은 더 고마웠다. 나는 가방 끈을 고쳐 매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초록 신호가 한 번 켜지고, 한 번 꺼지고, 다시 켜졌다. 신호가 바뀌는 잠깐 동안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앞산을 향해 걸었다. 아직 케이블카를 타지 않았다. 아직 전망대 식당 문턱을 밟지 않았다. 아직 다음 편지를 손에 넣지 않았다. 하지만 길은 이미 시작되었다. 길은 늘 문 앞에서 시작되었고, 문은 늘 숨 앞에서 열렸다. 나는 내 숨의 길이를 조금 더 늘렸다. 오늘의 마지막 한 줄을 속으로 적었다.
— 하교 후, 앞산.
그 문장은 단순했지만, 오늘 내가 쓸 수 있는 문장들 중 가장 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