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의 부력-2부
엘리베이터 거울 속 내 얼굴은 낮과 밤 사이를 건너다가 잠깐 멈춘 표정이었다. 현관 문이 닫히는 소리가 꽤 또렷하게 들렸다. 소리의 끝자락이 복도 벽에서 반사되어 다시 내게 돌아올 때, 마음도 한 번 접혔다가 펴졌다.
램프를 켰다. 낮은 원이 책상 위에 착륙하고, 그 경계가 종이의 모서리에 부딪혀 부서졌다. 가방에서 조심히 꺼낸 봉투—크림색, 왼쪽 위에 작은 별 스티커. 같은 별인데, 앞산 식당에서 보던 빛과는 다른 색온도로 반짝였다. 종이를 쓰다듬는 일만으로도 어딘가가 진정되는 밤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가위를 쓰지 않기로 했다. 스티커의 아주 얇은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밀어 올리자, 종이가 내는 마른 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작게 흔들었다. 봉투 입이 천천히 갈라지고, 흰 면이 나타났다. 엄마의 필체는 여전히 내가 알던 그 모양이었다. 둥근 획과 길게 빠지는 받침, 생각을 고쳐 적을 때 생기는 가느다란 멍. 종이는 보이지 않는 시간을 품고 있었다.
은하에게.
눈 감지 않고 사진 찍었지? 네 눈으로 들어온 빛이 오래 남기를 바라! 앞산 전망대는 사실 아빠가 엄마에게 사귀자는 말을 처음 꺼낸 곳이야. (그날 아빠는 종이컵을 괜히 계속 구겨서, 종이컵이 한 송이 꽃처럼 됐지.) 그날 밤, 우리는 걸음을 나란히 하기로 약속했어. 아빠의 용기가 있었기에 지금, 은하라는 사람이 엄마와 아빠에게 올 수 있었지.
다음 편지는 ‘수성못’에 있어. 영희 이모네 카페—잘 알잖니. 내가 오래 아껴 온 친구야. 거기에 봉투를 맡겨 두었어. 가능하면, 네가 가장 편안해지는 친구와 함께 가면 좋겠다. (엄마의 추측: 수정? 맞지?)
너는 어릴 적 낯을 많이 가렸지만 그래서 오히려 오래가는 좋은 친구들을 얻었지. 그게 엄마는 늘 든든했어. 수성못 바람을 맞으며 너의 이야기를 한번 해 봐. 엄마 없이도 너의 하루는 앞으로 간다는 걸, 그 길에서 천천히 느껴 보자.
카페 문을 열면 ‘딩동’ 소리가 날 거야. 영희 이모가 반갑게 맞아줄테니 너무 어색해 하진마~ 영희 이모가 은하를 반갑게 맞아 줄 생각을 하니 내가 다 기쁘네! 오랜만에 수성못에 들러서 기분전환도 하고~ 절친이랑도 자그마한 추억 하나 더 쌓아보렴!
언제나 사랑해!
엄마가.
P.S. 따뜻한 거 마셔. 목이 놀라지 않게. 그리고 수성못에서 사진 한 장 찍어봐~—너의 절친과 함께!
문장을 다 읽고서도 종이를 접지 못했다. 종이 위에 앉은 목소리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네가 가장 편안해지는 친구’라는 말이 한 번 더 방 안을 한 바퀴 돌고 내 어깨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원을 그리며 맴도는 동안, 이름 하나가 중심에 조용히 들어왔다. 수정.
싱크대에 물을 받았다. 얇은 수면 위에 주방 등이 반사되어 길게 늘어졌다. 컵을 입술에 대니, 물이 목을 지나갈 때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오늘 하루의 문장들 사이사이에 박음질하듯 들어가는 소리.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연필로 짧게 적었다.
— 수성못 · 영희 이모 · 함께.
글자 아래에 선을 그어 두었다. 선은 지도처럼 보였다.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수성못, 수성못에서 카페. 선과 선이 만나는 지점에 작은 별표를 찍었다. 별표 옆에 아주 작게 ‘빛’이라고 썼다. 지난밤 베란다에서 마음속으로 붙인 이름과 같은 이름이었다.
냉장고에 또 자석 메모를 붙였다. ‘하교 후, 수성못 카페에 들렀다 오겠습니다.’ 자석이 붙는 순간 ‘딸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오늘의 마지막 마침표가 되어 주는 것 같았다. 아빠 방 앞은 조용했다. 문틈은 어둠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복도 센서등이 내 움직임에 반응해 한 번 켜졌다 꺼졌다. 불빛이 잠깐 호흡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은 특별한 표정 없이 도착했다. 세면대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물을 튕겨 올렸다. 물방울이 이마에서 턱으로, 턱에서 목으로 내려가는 길이 정해져 있는 듯 보였다. 학교에 갈 준비를 하면서 와이셔츠 깃을 세우다 손이 한 번 멈췄다. 단추를 잠그는 동작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어제 늦지 않게 들어온 아빠는 이미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문 손잡이에서 나는 금속 소리가 집 안의 공기를 환기시켰다.
“다녀올게요.”
“그래. 추우면 목도리 하고.”
짧은 대화가 복도 끝까지 가서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지 않았다. 사라졌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버스 정류장. 기다리는 사람들의 신발 바닥이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각자 다른 박자를 냈다. 날씨는 분명 어제와 비슷했는데, 오늘은 공기가 조금 더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손잡이를 잡고 창밖을 봤다. 노란 포대자루가 포개져 있는 골목, 빛이 약간 늦게 닿는 건물의 북쪽 벽, 귤 상자를 내놓은 과일가게의 앞치마. 어제의 경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내 눈의 높이가 한 칸 바뀐 듯했다. 편지의 문장들이 눈의 높이를 조금 바꾸어 놓은 셈이었다.
점심시간. 식판 위 국이 얇게 김을 올렸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한 번 돌린 뒤, 나는 수정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자연스럽게 닿을지, 입 안에서 단어들의 순서를 바꾸어 보았다. 쉬운 말부터. 사실부터. 나는 천천히 말했다.
“엄마가… 내 생일을 위해 편지를 여러 군데 맡겨 두셨더라. 대구 여기저기. 우리 가족이 기억을 두고 온 장소들에. 내가 순서대로 찾아가게끔.”
수정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놀란 표정을 크게 짓지 않는 사람답게, 반응의 폭을 절제할 줄 아는 얼굴. 그래서 말이 더 잘 닿는 친구.
“편지… 이벤트 같은 거야?”
“응. 어젯밤에 그걸 알게 됐고, 두 번째 편지를 지금 집에 가져다 놓았어. 다음 장소가 수성못에 있는 영희 이모네 카페야. 영희 이모는 우리 엄마의 오랜 친구거든. 거기 가서 다음 편지를 받으래. 그런데 가능하면 내가 편안해지는 친구와 함께 가라고 엄마가 편지에 미션을 남겼더라..”
‘편안해지는’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동안, 어깨에 올려 둔 보이지 않는 힘이 조금 빠져나갔다. 말이 만들어 내는 틈. 그 틈으로 공기가 들어갔다.
수정이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같이 가자.”
“오늘 하교하고 바로, 괜찮아?”
“당연하지!”
세 글자. 가볍지만 단단했다. 그 대답에서 오는 온도가 국물보다 먼저 가슴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굳이 꽃을 꽂지 않아도 완성되는 화병처럼, 침묵이 그때는 충분했다. 수정이 내 식판에서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자기 식판 구석에 올려두었다. ‘이따 먹어’라는 뜻. 별 말이 없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기호들.
오후 수업은 필요한 만큼만 판서가 채워졌다. ‘인물의 동기’라는 단어가 칠판에 적히고, 그 아래 ‘표면/심층’이 다시 등장했다. 표면이라는 말 위에 엄마의 웃는 사진이 떠올랐고, 심층이라는 말 아래에는 아직 열지 않은 봉투의 두께가 놓였다. 나는 공책 여백에 작은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두었다. 그 동그라미를 손톱 끝으로 한 번 눌렀다. 눌린 자리에서 종이가 조용히 돌아왔다.
종례가 끝나고, 가방을 매며 수정이와 눈이 잠깐 마주쳤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는 짧은 순간 같은 눈빛. 우리는 함께 교문을 나섰다. 바람이 복도 끝에서부터 줄곧 따라왔다가 운동장으로 빠져나갔다. 하늘 색이 반 톤 낮아졌다.
학교 앞 정류장에서 가지런히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우리는 나란히 섰다. 버스가 들어왔다. 고무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놓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뒷문으로 올라타 중간쯤 좌석에 앉았다. 유리창에 앉은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가 교차했다가 어긋났다. 어긋남이 오히려 균형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영희 이모는 어머니랑 언제부터 친구이셨대?”
수정이 물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대. 서로 사진 찍어 주고, 숙제하고, 일기장을 바꿔 읽고. 이모 말로는, 엄마가 발표할 때 목소리가 크고 맑아서, 교실이 갑자기 고요해졌다고.”
“네 목소리는 어머니를 닮은 게 맞구나?”
수정이가 오랜만에 농담을 먼저 건냈다. 장례식 이후로 수정이는 평소 같은 농담을 삼가하는 눈치였다. 나를 위해 그런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수정이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편하게 만들었다.
“맞아. 아빠 닮았으면 나 완전 목소리도 작고 발표도 못하는 소심쟁이였을걸?”
수정이 덕분에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웃었다.
버스 안 방송이 다음 정류장을 알렸다. 지명에 ‘못’이 들어간 발음은 언제 들어도 물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차창 밖의 간판들이 하나씩 뒤로 넘어갔다. 꽃집 앞 분무기에서 나온 물방울이 분홍 프리지어에 얇은 껍질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붉은 신호에서 잠깐 멈춘 사이, 사람들의 시선이 서로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구도 오래 붙잡지 않았고, 누구도 오래 남지 않았다.
하차 버튼을 눌렀다. 버튼에 들어온 붉은 빛이 손끝을 잠깐 물들였다. 내릴 때 몸이 앞뒤로 흔들렸지만 바로 균형을 잡았다. 도로의 질감이 보도블록의 질감으로 바뀌는 지점, 공기가 달라졌다. 금속 난간과 젖은 돌, 민트색 페인트가 벗겨진 벤치의 냄새가 섞인 공기. 수성못은 이미 오후를 한 번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펼쳐 놓은 듯한 빛을 깔고 있었다. 물 위에 작은 반짝임들이 촘촘했다. 오리배가 지나간 뒤의 잔물결이 난간 그림자를 길게 깨뜨렸다.
“여기 오면 늘 살결이 느슨해져.”
내가 말했다.
“맞아. 마음의 속도가 발걸음 속도랑 맞춰지는 느낌이 있지.”
수정이 대답했다.
오리 두 마리가 동시에 방향을 틀었다. 방향을 틀어도 물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 난간에 팔꿈치를 얹어 잠깐 물결을 바라보았다. 물결의 리듬에 맞춘다는 건, 결국 내 안의 초침을 조금 늦춘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카페 간판이 멀리서부터 손짓을 했다. ‘YOUNGHEE’S—COFFEE & PHOTO’. ‘PHOTO’라는 단어가 바람에 조금 기울었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유리창 안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작은 집게에 매달려 있었고, 그 앞줄에는 엄마와 이모가 팔을 걸고 웃는 사진이 있었다. 사진 구석에 검은 마카로 ‘98년 봄’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손잡이의 금속은 낮 동안 받아 두었던 온기를 거의 다 잃은 참이었다. 내 손끝이 그 남은 온기를 마지막으로 흡수했다. 수정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됐어?”
“응.”
손잡이를 당겼다. ‘딩동’—편지 속 괄호가 소리로 나타났다. 가벼운 종 소리가 우리의 발목쯤에서 맴돌다가 위로 올라갔다. 유리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카페 안의 따뜻한 공기가 한 차례에 우리를 덮었다. 볶은 원두의 향, 나무 테이블에서 올라오는 잔열, 낮게 깔린 음악의 현. 그 온도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자, 뒤에서 문이 조용히 닫혔다. 안과 밖의 경계가 정리되는 소리였다.
카운터 쪽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오늘 구운 파운드케이크가 얌전히 놓여 있고, 오른편 벽에는 액자들이 가지런했다. 검은 필름이 투명한 케이스 안에서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현상 중’이라는 메모가 작게 붙어 있었다. 바리스타 머신이 ‘쉬익’ 하고 숨을 내뱉었다. 컵과 컵이 맞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어제 앞산 식당의 그릇 소리와 살짝 닮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안쪽에서 낯익은, 그러나 오랜만인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를 향해 고개를 드는 순간, 시간의 두께가 카운터 위로 얇게 내려앉았다.
카페 안의 공기는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듯한 온도였다. 바깥의 물빛을 바로 데려오지 않고, 한 번 걸러서 들이는 방식. 커튼이 아주 얇게 흔들렸다. 의자 다리와 바닥이 맞부딪히는 소리, 유리 스푼이 컵 벽을 가볍게 건드리는 소리, 바리스타가 포터필터를 탬핑할 때 나무 손잡이에서 나는 묵직한 소리. 그 사이로 영희 이모의 앞치마 끈이 한 번 흔들렸다.
수정이와 나는 나란히 서서, 동시에 아주 짧게 숨을 골랐다. 동시에였다는 걸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같은 못가로 들어온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큰 설명이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떼었다.
“이모.”
목소리가 컵 테두리처럼 가늘게 떨렸다가 금세 잡혔다. 이모가 고개를 완전히 들었다. 우리가 아는 표정이 얼굴 위로 올라왔다. 오른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가고, 왼쪽이 그 뒤를 따라가는 방식. 엄마와 사진 속에서 자주 보던 미소였다. 그 미소가 카운터를 넘어 우리에게 왔다.
문 뒤에서 바람이 아주 가볍게 한 번 더 흔들리고, 종소리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