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비워두기

별빛의 부력-2부

by 시쓰는 충하

앞치마끈을 한 손으로 풀 듯 움켜쥔 채, 이모가 카운터를 돌아 나왔다. 가벼운 러그가 발밑에서 한 번 주름졌다. 가까워지는 발소리, 얇게 번지는 왠지 익숙한 향. 다음 순간, 이모의 두 팔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은하야…”

안는 힘이 처음엔 조심스러웠다가 금세 무너졌다. 가슴팍에 박히는 울음이 있었고, 그 울음 속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나는 팔을 이모 등으로 더 돌렸다. 얇은 면 앞치마의 결이 뺨에 닿았다. 그 결 사이로 오래 묵힌 향이 올라왔다. 사진 인화지에서 나는 종이 냄새랑 비슷했지만, 더 따뜻했다.

“미안해. 미정이… 미정이 소식을 영국에서 듣고, 바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항공편을 바로 구하지 못해서 장례식에 못 갔어. 그게… 그게 너무 마음에 걸리는구나.”

이모의 목소리는 어딘가에서 자꾸 끊겼다. 끊길 때마다 더 깊은 곳에서 이어졌다. 해외에서 들은 부고란 늘 시간차를 달고 오니까, 슬픔이 늦게 도착하고도 한꺼번에 앞질러 버리는 법—이모의 어깨가 그 늦음과 앞섬을 짊어지고 동시에 떨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요” 라는 말을 입술 끝에서 삼켰다. 아무것도 괜찮지 않은 사람들끼리는, 그 말을 아껴 두는 편이 낫다는 것을 나는 깨달아가고 있었다.

옆에서 수정이가 말없이 내 등을 쓸었다. 손바닥이 넓고, 박자가 일정했다. 울음이 거기서 잠깐 방향을 잃다가 다시 흘렀다. 카운터 뒤 바리스타 머신이 ‘쉬익’ 하고 숨을 뱉었다. 금속과 증기가 섞인 소리가 우리 곁을 지나갔다. 그 소리에 울음이 조금 닦였다. 이모가 내 어깨에서 얼굴을 떼더니 손등으로 내 눈가를 닦아 주었다. 조심스러운 손놀림은 오래전 내 유치원 발표회 날, 엄마가 무대 앞에서 해 주던 동작과 닮아 있었다. 손끝이 닮으면 말이 없어도 이어진다.

“생일이었지?”

이모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목소리 끝이 무너졌다가 겨우 일어났다.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너희 둘, 저기 창가에 앉아. 따뜻한 거 마셔야지. 케이크까지 금방 가져갈게.”

“이모, 저… 네.”

내 대답이 어색하게 둘로 나뉘었다. 축하라는 단어와 케이크라는 단어가 마음 속 어디선가 서로를 피하듯 앉았다. 하지만 엄마의 편지 말미가 떠올랐다. 따뜻한 거 마셔. 목이 놀라지 않게. 그 문장을 빌려 내가 앉을 자리를 정리했다. 수정이와 나는 유리창에 가까운 자리로 걸어가 마주 앉았다. 창밖으로 수면의 은빛이 조금씩 흔들렸다. 잔물결이 유리 위에 복사되어 가느다란 선으로 떨고 있었다.


이모가 쟁반을 들고 왔다. 김이 얌전히 오르고 있는 컵 두 개, 접시 위에 작은 케이크 한 조각, 그리고 바인더식 앨범 하나.

“은하는 유자차. 수정이는 밀크티. 케이크는 당근 케이크.”

“감사합니다.”

수정이가 먼저 받았다. 뜨거운 김이 눈썹으로 올라왔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머리카락 한 올이 김을 따라 움직였다. 이모는 케이크 접시를 가운데로 밀어 두더니, 손에 든 앨범을 조심스레 내 앞에 놓았다.

“이건 너희 엄마랑 나, 둘만의 기록이야. 이모가 영국에서 너희 엄마랑 마지막으로 전화하던 날 이걸 꼭 너에게 보여줬으면 한다고 그래서 겨우 찾아서 준비해뒀었는데… 더 이상 기록을 이어갈 수 없게 될 줄은 몰랐네.”

앨범의 표지는 어두운 회색 천이었다. 모서리가 둥글었고, 손때가 말없이 새겨져 있었다. 천을 쓰다듬자 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긁힘의 소리, 마치 먼지 한 톨이 빛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 앨범을 열었다.

첫 장. 〈사진부〉 라고 쓰인 볕 바랜 제목이 붙어 있다. 고등학교 교정, 벚꽃이 긴 화관처럼 걸려 있는 사진. 장식이 거의 없는 교복, 헤어핀 대신 집게로 대충 집은 앞머리, 커다란 필름 카메라를 목에 건 두 소녀. 한 명은 미정—엄마. 다른 한 명은 영희—이모. 엄마는 렌즈를 든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 내일 할 일을 설명하는 듯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네 엄마는 항상 큰 소리로 웃고, 큰 소리로 자신있게 말하던 애였지.”

이모가 옆 의자에 조용히 앉으며 말했다.

“근데 그 큰 소리가 누굴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어. 늘 먼저 배려하고 허락을 구했거든. ‘사진 찍어도 돼요?’, ‘괜찮으세요?’ 이런 말들이 앞섰으니까. 사진은 상대에게 시간을 빌리는 일이라는 걸, 그 어린 날에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

페이지를 넘기자, 흑백 인화 사진들이 나왔다. ‘교문 앞 빛 7장’ ‘3층 복도 오후 4시’ 같은 메모가 하단에 작게 붙어 있었다. 교문 기둥에 부서지는 늦은 햇빛, 교실 문턱에서 반쯤 넘어가는 그림자, 계단참의 먼지들. 인물이 없는 사진인데도 어쩐지 사람의 기척이 또렷했다.

“네 엄마는 ‘사람 없는 사진에도 사람이 있다’고 말하곤 했지.”

이모가 사진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말했다.

“문턱, 유리, 손잡이, 그림자… 그런 곳에 머물던 사람들. 빈 자리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걸 좋아했어. 그게 그 애의 정의감이랑도 닿아 있었고.”

“정의감이요?”

“응.”

이모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교내 벽보 사건이라고 유명한 일화가 있었어. 그때 한 선생님이 한 친구가 수업 시간에 존 것에 대한 벌로 그 친구의 그림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찢어 버렸어. 네 엄마는 평소에 선생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이었지만, 그 행동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학생회랑 같이 글을 쓰고, 찢어진 그림을 찍은 사진을 벽보로 만들어 게시판에 붙였어. ‘그림에도 누군가의 노력이 있습니다’라고. 그걸 본 선생님이 노발대발하면서 주동자를 색출했는데, 그게 너희 엄마인 걸 알고는 조용히 불러다가 벽보를 제거하면 그 친구에게 사과하겠다고 했어. 미정이가 누구나 아는 모범생이니까 선생님도 더 세게 나가지는 못했겠지. 그 일로 친구들 사이에서 정의로운 친구로 소문나고 모든 학생들이 좋아하는 친구가 되었단다.”

다음 장에는 학급 연극의 순간들이 있었다. 무대 뒤에서 동료의 옷깃을 고쳐주는 엄마, 대본의 문장을 빨간 펜으로 다듬는 엄마, 막이 오르기 전, 객석의 소음을 가만히 듣는 엄마. 사진의 엄마는 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었다. 가운데 서서 말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옆에서 어깨를 눌러 주거나 마실 물을 건네주는 손. 그런 손이 이제 이 세상에 없다니—그 생각이 왼쪽 갈비뼈 아래를 잠깐 건드렸다.

“여기.”

이모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 교실 뒤쪽 칠판 앞, 엄마가 분필을 들고 있었다. 분필가루가 공기 중에 얇게 흩어지고, 햇빛에 반짝였다. 칠판에는 “여백=비어 있는 것? 비워 둔 것?” 이라고 적혀 있었다.

“너희 엄만 고등학생인데도 마치 프로 사진 작가 같은 말을 하곤 했어. ‘비어 있는 것’과 ‘비워 둔 것’은 다르고, 사진은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엄마는 여백을 아는 사람이었다. 남을 위해 자리를 비워 둘 줄 아는 사람. 영영 떠났어도, 남아 있는 자리에서 계속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

페이지를 넘기니, 졸업 직후의 사진들이 나왔다. 대구의 오래된 골목을 배경으로, 두 젊은 여자가 빨랫줄에 사진을 걸고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주민 사진관—한여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모가 웃었다.

“우리 둘이 동네 어르신들 사진 찍어 드리고, 현상해서 골목에서 전시했었어. 댓가 대신 김치 얻어 먹고, 콩나물 얻어 먹고. 네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지. ‘사진은 결국 밥이네. 사람들이 밥 먹듯 보는 게 제일 좋아’라고.”

다음 장은 바닷가였다. 바람이 큰 날, 모래 밭에 웅크린 선들, 해 질 녘 방파제 위에 앉아 있는 둘의 뒷모습. ‘늦여름·서쪽’ 이라는 간단한 캡션. 이모가 그날을 설명했다.

“대학생이 된 우리는 바다 보러 여행을 갔는데 돈이 없어서 버스터미널 의자에서 밤을 샌적이 있었지. 근데 네 엄마가 그러는 거야. ‘눈 감으면 지나가는 빛은 다시 못 잡는다’고. 졸려 죽겠는데, 내가 그 말에 꾸역꾸역 눈을 떳어. 그러다 별이 떨어지는 걸 봤지. 미정인 삶을 낭만으로 채울 줄 아는 사람이었어.”

이어진 페이지에는 아빠가 처음 등장했다. 조금 떨어져 서서 짐을 들고 있는 사람. 가로등 아래서 얼굴 윤곽만 보였다. ‘앞산·가을 저녁’이라고 누군가가 적어 두었다. 이모가 피식 웃었다.

“이날이었지.”

이모가 사진을 약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바로 그날이야. 네 아빠가 네 엄마한테 처음 ‘사귈까?’ 했던 날. 종이컵을 괜히 구겨서 꽃처럼 만들어 놓고, 손에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얼굴. 조용한 사람인데, 결정할 때는 망설이는 법이 없었어. 네 엄마가 네 아빠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지. 큰 소리로 웃는 사람과 조용히 결정하는 사람. 이상하게 잘 맞더라. 나랑 미정이의 기록이긴 하지만, 이 사진만큼은 미정이가 꼭 여기에 꽂아 두고 싶다고 그래서 꽂아뒀어. 나중에 영희 너도 남자친구 생기면 여기다 사진으로 남겨두라고 하면서 말이야.”

아빠의 옆모습은 사진 속에서도 묵묵했다. 말 대신 들고 있는 가방이 네 개쯤. 당시의 공기가 사진 틈에서 올라왔다. 저 사람은 지금도 말을 아끼고, 대신 집 안의 온도를 지키려는 사람이다. 밤마다 비틀거리는 발소리로 돌아오다가도, 아침에는 아침 밥을 묵묵히 챙겨 놓고 간다. 괜찮지 않음을 괜찮다 말해 주던 사람. 아빠는 젊을 때도 그랬구나.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사진을 가운데 둔 채 엄마의 지난 날을 살펴 봤다. 흑백과 컬러가 번갈아 나오고, 필름 가장자리의 숫자들이 날짜를 대신했다. 사진 속 엄마는 늘 눈을 크게 떠 있었다. 누군가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 사소한 모서리의 빛을 놓치지 않는 눈.

“이모.”

내가 앨범을 덮을 듯 말 듯 한 채로 말했다.

“엄마는… 사진으로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을까요?”

“음…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남기기보다, 보게 하려고 했지.”

이모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날의 빛을 보게 하고,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사람의 안쪽을 보게 하고, ‘그래도’라는 말을 입에 올리게 하는 사람. 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어.”

말을 마치고 나서 이모가 한숨을 아주 조금만 쉬었다. 그 소리엔 체념이 없었다. 숨을 고르고, 다음 페이지를 열 준비를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앨범의 마지막 페이지. 비닐 포켓 안쪽, 흰 봉투 하나가 꽂혀 있었다. 크림색, 왼쪽 위에 별 스티커. 별의 각도가 전에 본 것들과 약간 달랐다.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기울기에 사람이 있었다.

“이건, 네 엄마가 맡겨 둔 편지야. 여길 지나간다면, 마지막 페이지에서 꺼내 달라고 강조하더구나. 나는 영국에 있는데도 얼마나 상세히 설명해주던지. 귀국하자마자 이 앨범을 찾고, 알바생에게 편지를 건네 받아 여기에 꽂는데 눈물이 얼마나 나던지… 미정이와 나의 추억에 대한 마침표로 느껴져서 더 그랬던 것 같아.”

영희 이모는 겨우 멈췄던 눈물을 다시 흘리고 있었다. 나는 이모의 손등에 한 손을 포개고 한 손으로 편지를 꺼냈다. 종이의 감촉이 낯익었다. 스티커의 볼록함이 손끝에서 아주 살짝 올라왔다. 앉은 자세를 바로 하고, 봉투를 열었다. 종이가 내는 마른 소리가 또 한 번 카페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글씨가 눈으로 들어왔다. 둥근 획, 길게 빠지는 받침, 급할 때 살짝 치켜드는 ㅅ의 끝—틀림없는 엄마의 필체.


은하에게.


수정이랑 같이 왔지? (엄마의 추측이 또 맞았다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다!) 영희랑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서로의 셔터소리가 같았어. 한 명이 셔터를 누르면, 다른 한 명의 눈에도 같은 빛이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 그래서 오래갔을 거야. 너도 네 곁의 사람들과 그런 리듬을 만들었으면 해. 아주 시끄럽지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은 리듬. 서로의 박자를 조금씩 맞춰가는 일.

네가 어릴 때 많이 낯을 가려서, 엄마는 처음엔 걱정도 했지. 유치원 때, 모두가 모래성을 같이 쌓을 때, 너는 멀찍이 서서 동그란 돌 하나만 오래 굴리곤 했거든. 그런데 시간이 지나 보니 그 조심스러움 덕분에, 너에게는 오래가는 친구들이 생겼어. 넌 대충 친해지지 않아서, 한 번 친해지면 오래 가더라. 엄마는 그게 참 좋았어. ‘빨리’보다 ‘오래’를 선택하는 마음. 네 아빠를 닮았구나 하고 웃었지.

영희 이모랑 엄마의 사진은 덤으로 주는 선물이야! 페이지마다 우리 둘의 마음이 묻어 있어. 웃기고, 엉뚱하고, 때론 너무 진지한 얼굴도 있고. 너에게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어떤 친구였는지 보여 주고 싶었어. 우리는 늘 ‘먼저 물어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단다. 좋은 사진은 좋은 질문에서 나온다고 믿었거든.

따뜻한 거 마셨지? (엄마는 지금 네가 유자차를 마셨을 것 같아—아님 말구!) 그리고 수성못 앞에서도 친구랑 같이 사진 한 장 찍어 봐~ 너의 ‘영희’와도 엄마처럼 기록을 남겨가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음 편지는 엄마의 ‘첫사랑’이 전해줄 거야. 그 사람은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힌트를 조금 줄게. ‘첫사랑’은 시간일까, 사람일까?.) 그래도 편지는 사람이 전해 줄 거야.

네 이름처럼, 은하처럼, 멀리 있어도 서로를 비춰주는 별들이 널 따라다닐 거야.


사랑해~

엄마가.


P.S. 아빠가 밥 잘 챙겨주고 있지?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널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엄마는 멀리서도 걱정하진 않아! 가끔은 아빠랑 이야기도 하고 해~


마지막 줄까지 읽는 동안, 컵에서 올라오는 김이 얇아졌다. 유자 향이 목 뒤로 부드럽게 내려갔다. 종이를 접지 못한 채, 나는 손끝으로 글자의 모서리를 한 번 더 쓸었다. ‘첫사랑’이라는 두 글자가 손끝에서 오래 걸렸다. 아빠의 얼굴이 떠오르고, 동시에 어떤 장면들이 겹쳤다. 어두운 교정, 필름을 감는 손, 누군가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던 시간들. 엄마가 말한 ‘첫사랑’은 ‘사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편지는 사람이 전해 준다고 했으니—누구일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모가 내 표정을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편지에 ‘첫사랑’ 얘기가 있구나.” 이모가 컵받침 끝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그 사람,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네가 알아갈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는, 엄마의 첫사랑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확히는 몰라.”

이모가 웃었다.

“우린 서로의 모든 걸 알았지만, 몇 가지는 서로 남겨 두기도 했거든. 다만 확실한 건 있어. 네 엄마의 첫사랑은 늘 ‘사람’ 쪽이었다는 것. 허공에다 사랑을 쏘지 않았어. 눈 맞춤이 있었고, 손이 있었지. 그리고 아빠 얘기는 언젠가 아빠에게 직접 듣는 게 맞다. 아빠가 엄마의 어떤 ‘첫’인지는, 아빠만이 아는 게 있을테니까.”

“네.”

아빠의 방에서 들리던 아주 낮은 기침 소리, 식탁 위에서 말라 가던 그릇의 표면, 현관문이 닫히던 소리—그 소리들이 함께 떠올랐다. 언젠가, 우리가 둘만의 방식으로 이 얘기를 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다음 편지로 가는 길이 먼저였다.

이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진기를 꺼냈다. 오래된 필름 카메라였다. 무광 검정, 손때가 번들거리는 그립, 상단의 셔터 뭉치가 묵직했다. 렌즈 캡을 벗기는 금속 소리가 컵과 컵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겹쳐 들렸다.

“엄마가 부탁했지? 사진 한 장.”

이모가 미소를 조금 더 단단하게 정리했다.

“유리창 앞에 가서 수정이랑 함께 서볼래? 수성못의 야경을 배경으로 한 장 남겨보자.”

우리는 카운터 옆, 큰 유리창 앞에 섰다. 바깥의 물결이 유리로 들어와, 우리 어깨 높이에서 작은 반짝임을 만들었다. 유리 위에 매달린 작은 집게들이 바람을 아주 조금씩 흔들었다. 집게마다 작은 필름 스트립이 매달려 있었다. 반쯤 노출됐던 누군가의 오후, 흔들린 누군가의 밤길, 빛이 조금 과했던 어느 날의 계단참—그 조각들이 투명하게 빛났다.

“여기 서 보자.”

이모가 우리를 유리의 비스듬한 반사선 위로 살짝 옮겼다.

“어깨를 붙이고. 은하는 약간만 옆으로. 수정이는 턱을 아주 조금 내리고. 손은… 그래, 여기에. 은하는 편지를 살짝 보이게 들어도 좋겠다.”

편지를 가슴께에 들어 보였더니, 크림색이 유리빛과 섞였다. 종이의 여백과 물의 여백이 한곳에 겹쳤다. 수정이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준비됐지?”

“응.”

내 목소리는 더 이상 컵 테두리처럼 떨리지 않았다.

이모가 초점을 맞췄다. 숨이 군더더기 없이 정돈되는 소리. 한 박자, 두 박자. 셔터 소리가 낮게 났다. ‘찰칵.’ 소리는 금빛 반점처럼 공중에 잠깐 떠 있었다가 사라졌다.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한 장을 더 찍었다. 이번에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바꿔, 서로를 잠깐 봤다. 이모는 셔터를 누르기 전, 꼭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는 습관이 있었다. 마지막 ‘찰칵’이 카페 안의 모든 소리를 잠깐 묶었다 풀었다.

자리에 돌아오자, 이모가 앨범의 뒤 포켓을 벌려 보였다.

“여기에 오늘 한 장을 나중에 끼워 넣자. 그러면 이 앨범은 오늘까지 오게 되는 거고, 내일도 계속될 거야.”

우리는 케이크를 조금씩 떼어 먹었다. 달콤함이 과하지 않았다. 과일의 산뜻함이 살짝 혀끝을 깨웠다. 목이 놀라지 않게 마시라는 엄마의 당부대로 유자차를 한 모금 더 삼켰다. 따뜻함이 배꼽 아래로 내려앉았다.

“영희 이모.”

내가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마는… 여행을 나가기 전에, 이 편지들을 얼마나 오래 준비했을까요?”

“엄청 오래 걸렸을거야.”

이모가 즉답했다.

“미정이는 늘 오래 준비했지. 그런데 티를 내지 않았어. 누군가에게 퍼붓는 방식이 아니라, 자리 깔아 주고 물 따라 놓고 빛을 켜 두는 방식. 그걸 네가 알아봐 줘서, 그 애는 많이 고마워할 거야.”

말이 다시 줄었다. 줄어든 자리를 유리창의 물비늘이 채웠다. 창틀 위에 놓인 작은 화분 하나가 고개를 약간 숙였다. 이모가 우리를 한 번씩 번갈아 보고, 종업원에게 손짓했다. 주문도, 계산도, 오늘은 묻지 않았다. 그냥 잠깐 쉬어가라는 뜻의 손짓이었다.


이모가 포장 봉투에 작은 쿠키를 몇 개 담아 건넸다.

“가다 허기지면 하나씩 꺼내 먹어. 이건 아빠 가져다 드리고.”

“고맙습니다.”

수정이가 먼저 인사했다. 나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은하야.”

이모가 나를 불렀다.

“다음 편지…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와. 내가 아는 선에서 도울게. 그리고 네가 울고 싶으면 여기 와서 울어. 그런 건 예약 안 해도 돼.”

웃음이 났다. 울음과 웃음이 서로의 순서를 양보하는 표정이었다.

“네.”

나는 대답했다.

“올게요.”

문을 밀고 나오자, 저녁이 한 톤 더 내려앉아 있었다. 못 위에 가는 안개가 생겼다. 난간에 손을 얹자 금속의 냉기가 손바닥을 잠깐 타고 올라왔다. 뒤에서 ‘딩동’ 하고 문종 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가 멎었다. 카페의 유리문에 우리의 뒷모습이 작은 그림자로 붙었다가, 곧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지 않았다. 사라졌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며, 나는 봉투를 가방 안쪽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지퍼 머리가 작은 은빛을 내며 움직였다. 수정이가 옆에서 말했다.

“은하야.”

“응.”

“오늘은, 잊지 말자. 억지로 붙들지도 말고. 그냥, 오늘을 기억하자. 그리고 날 데려와줘서 고마워.”

“응.”

내 목소리는 얇았지만 또렷했다.

“나도 고마워.”

정류장 벤치에 앉자, 못에서 올라온 냄새가 옷깃에 얇게 묻었다. 버스 도착 안내 전광판 숫자가 줄어들었다. 숫자가 줄어들수록, 마음속 어떤 칸이 천천히 비워졌다.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워 둔 것. 엄마가 칠판에 적어 두던 그 차이를, 오늘은 조금 더 이해한 것 같았다.

버스가 와서 우리는 나란히 올라탔다. 창밖으로 카페 간판의 ‘PHOTO’ 글자가 바람에 한 번 더 기울었다 돌아왔다. 앨범의 마지막 페이지, 흰 봉투가 들어 있던 자리—그 자리가 눈꺼풀 안쪽에 오래 남았다. 다음 편지가 기다리는 어딘가로 가는 길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길은 있을 것이다. 엄마가 늘 그랬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문부터 찾으라고.

창밖의 불빛이 한 점씩 뒤로 미끄러졌다. 그 불빛들 사이로 마음이 조금씩 자리 잡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램프를 켜고, 오늘 카페에서 찍은 사진을 앨범 뒤 포켓에 넣자. 그리고 다음 편지를 기다릴 준비를 하자. 준비라는 건 물건을 챙기는 일만이 아니라, 빈 칸을 남겨 두는 일도 포함된다는 걸 오늘 배웠으니까.

어둠이 더 이상 무겁지만은 않았다. 물 위에 놓인 얇은 나뭇잎처럼, 흔들리면서도 가라앉지 않는 밤이었다. 다음 ‘찰칵’이 어디서 울릴지 모르는 채, 우리는 각자의 집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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