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의 부력-2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 벽에 부딪혀 한 번 더 작아졌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세워 두고, 가방을 벽에 기대었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은 낮 동안 남아 있던 온기를 얇게 붙들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등을 붙였다. 천장 모서리마다 그림자가 접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아주 미세한 먼지가 떠다녔다. 수성못 카페의 나무 냄새와 커피, 물안개가 섞인 기운이 옷깃에서 아직 가시지 않았다.
‘첫사랑.’
카페에서 읽은 문장의 한가운데가 밤까지 따라왔다. “엄마의 ‘첫사랑’이 전해줄 거야.” 이모가 “정확히는 몰라”라고 웃으며 말하던 표정이 곁에 선 듯했다. 엄마의 첫사랑이 아빠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동시에 머릿속에 놓였다. 어느 쪽으로 기울여도 무언가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감정에 서둘러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단어들을 책상처럼 네모 반듯하게 정리해 본다. 아빠. 엄마. 사진. 빛. 그리고 ‘처음’. ‘처음’은 사건이면서도 시간이라, 늘 손에 잘 쥐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처음’이 되는 일은 감정이 반, 나머지 반은 꾸준함이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장례식 이후, 밤마다 일정한 시간에 현관이 열렸다. 방향감이 조금 흐트러진 발의 리듬, 문턱을 넘을 때마다 아주 짧게 멈추는 호흡, 넥타이를 풀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되돌리는 작은 동작. 아빠는 낮에는 반듯했고, 밤에는 조금 기울었다. 아침이면 다시 반듯해져 식탁 위에 두 개의 그릇을 단정하게 올려두고 나갔다. 젓가락은 늘 접시의 정중앙에 맞춰져 있었다. 그런 정렬이 슬픔을 대신해 주는 날들이 있다. 나는 그 정렬을 깨지 않으려 말을 아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세요” 같은 문장을 휴대폰에 썼다가 지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같은 집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서로의 잘 보이는 면보다 보이지 않는 면 앞에서 더 조심스러워진다. 어쩌면 내가 더 조심하는 쪽인지도 모르겠다.
거실에서 금속이 스치는 낮은 소리가 났다. 도어록이 ‘철컥’ 하고 열리고, 바람이 한 번 드나들었다. 신발 밑창이 바닥을 긁는 소리, 코트가 옷걸이에 닿는 소리, 냉장고 문이 가볍게 열렸다 닫히는 소리. 나는 방문을 조금 열었다. 문틈 사이로 아빠의 어깨선이 보였다. 셔츠 깃이 약간 돌아가 있었고, 손목의 시계는 한 칸 느리게 빛났다. 아빠 시선이 식탁 위에서 멈췄다. 하얀 상자—이모가 챙겨 준 당근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기 전에 올려둔 것을 깜빡했던 게 떠올랐다.
“은하야.”
“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억지로 밝지도, 지나치게 낮지도 않았다. 하루를 조용히 접는 어조였다.
“이건… 어디서 났니?”
“수성못 영희 이모네 카페요. 이모가 챙겨 주셨어요.”
아빠의 눈매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반가움, 그리움, 놀람, 그리고 금방은 닦지 못하는 미안함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나는 티슈를 건넸다. 아빠는 고개를 숙여 받았다. 티슈를 눈가에 대는 동안 숨소리가 한 번 무너졌다가 곧 정리되었다.
“같이… 먹자.”
“네.”
접시 두 개를 꺼내고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반으로 나눴다. 칼끝에 크림이 얇게 묻었다. 당근과 계피 향이 가볍게 올라왔다. 아빠는 작은 조각을 들어 입에 넣었다. 씹는 동안 잠깐 눈을 감았다가 바로 떴다. 눈을 감은 시간만큼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끄덕여졌다.
“아빠.”
내가 먼저 물었다.
“이 케이크, 엄마랑… 자주 드셨어요?”
아빠가 웃었다. 미소는 크지 않았지만 오래 남았다.
“자주 먹을 형편은 아니었지.”
포크를 내려놓으며 접시 가장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드렸다. 금속 소리가 잔처럼 얇게 울렸다.
“그래도 백일같은 기념일엔 어떻게든 챙겨 먹었던 것 같네.”
“백일이요?”
“사귄 지 백일되는 날 말야.”
아빠가 물잔을 입술에 대었다.
“그 얘기부터 해야겠다.”
말투가 느려지지 않았다. 오래 잠겨 있던 필름을 물에 담그듯, 차분하게 이야기의 표면이 젖기 시작했다.
“아빠가 경북대 국어국문과 입학하고 학교 다니다가 2학년이 되던 때 군대를 갔었어. 제대하고 복학한 뒤에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영어영문학개론을 들어보고 싶어서 교양 과목 수업으로 수강 신청 했지 뭐야. 수업 첫날, 맨 앞줄에서 손을 번쩍 드는 학생이 있었어. 질문을 던질 때 상대방 눈을 똑바로 보는 방식, 목소리의 힘, 말과 말 사이에 공백을 남기는 법을 아는 사람. 엄마였어.”
나는 엄마의 교실 사진들을 떠올렸다. 발표 전에 “질문 있어요?”라고 먼저 묻던 사람, 사진을 찍기 전에 “찍어도 될까요?”라고 허락부터 구하던 사람. 먼 데서도 먼저 손을 흔들어 주던 사람.
“아빠는 그때 말을 잘 못 했어.”
아빠가 짧게 웃었다.
“복학하면 저절로 달라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조용해지더라고. 대신 글로 쓰는 건 자신이 있었지. 첫 과제로 ‘로맨스의 정의’를 짧게 쓰라 해서, 아빠는 칠판 옆 창틀을 썼어. 해 지기 직전, 창틀 위로 올라오는 보라빛이 잠깐 사람들 얼굴에 앉았다가 사라지는 그 순간. 그게 왜 사랑 같았는지.”
“엄마가… 그걸 읽으셨어요?”
“읽었지.”
아빠 눈가에 작게 빛이 걸렸다.
“조별 과제에서 조장을 맡은 엄마가 과제를 걷었거든. 과제 돌려받은 뒤에 뒤쪽 모서리에 작게 적어 놨더라. ‘창틀 위 보라—좋네요. 근데 사랑은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에요. 내일도 있어요.’ 하고.”
엄마의 둥근 필체가 바로 떠올랐다. “좋네요” 같은 단정한 말끝, 괄호 안 농담의 온도. 나는 엄마의 그 글씨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처럼, 수없이 본 것처럼 동시에 느꼈다.
“그 다음부터 스터디도 같이 하게 됐어.”
아빠가 계속했다.
“엄마는 사람들을 모으고 질문을 던지는 쪽, 아빠는 자료를 모으고 조용히 정리하는 쪽. 식당에서는 늘 엄마가 먼저 ‘오늘은 누가 먼저 말할래요?’ 하고 웃었어. 그러면, 이상하게 내가 먼저 말하게 되더라.”
말을 아끼는 사람에게 말을 열게 하는 사람.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 고백하셨어요?”
“앞산에 갔던 날이었지.”
아빠가 짧게 답하고, 미소를 삼켰다.
“가을 저녁. 엄마가 야경 찍자고 해서 올라갔어. 따뜻한 차를 종이컵에 담아 들고. 내가 긴장을 했나 봐. 종이컵을 괜히 쥐었다 폈다 하다가… 종이가 구겨져 꽃처럼 됐어. 엄마가 보고 웃더라. ‘종이컵 꽃’이라고. 그래서 그냥 말했지. ‘사귈까?’라고. 그 말은 이상하게 준비가 필요 없더라. 준비하면 더 못 하겠더라고.”
나는 앨범 속 사진을 떠올렸다. 가로등 아래 윤곽으로만 보이는 둘, 손에 들린 종이컵 꽃. 사진 속 공기가 지금 탁자 위로 얇게 올라오는 듯했다.
“엄마는 뭐라고 했어요?”
“엄마는… ‘종이꽃도 준비해서 오셨으니, 좋아요’라고 했지.”
아빠가 어깨를 작게 들썩였다.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농담을 놓치지 않는 대답. 그게 엄마였어.”
고백 뒤에 이어진 날들도 또렷해졌다. 책을 닫는 소리, 도서관 문턱의 그림자, 인문대 앞 벤치의 삐걱거리는 소리. 아빠는 말을 줄이고 대신 편지를 썼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 앞에서 작은 흰 봉투를 쥐어 주고 도망치듯 뒤돌아섰고, 엄마는 그걸 읽고 같은 크기의 답장을 만들어 왔다. 서로의 문장들이 신발끈처럼 맞물렸다. 거기엔 시의 단락과 사진의 여백이 번갈아 섞였고, 하루의 소음 대신 몇 줄의 호흡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졸업 후 진로를 정할 때에도 정말 주체적이었어. 아빠는 아빠의 장점과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고민을 해본 결과 국어 교사가 되어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고 싶었단다. 문학을 좋아해서 국어국문학과에 갔는데, 전공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국어 선생님이 제일 보람찰 것 같았거든. 그래서 교직 이수를 하는 방향을 정했지. 엄마는 영어영문이라는 전공을 살리기보다 좋아하는 걸 택했지. 아빠는 엄마도 아빠처럼 교직 이수를 해서 같이 학교 선생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기도 하긴 했어. 그렇지만 사진을 찍을 때 엄마의 모습, 그리고 이미 프로 같이 느껴졌던 엄마의 모습에 같이 교직이수를 하자고 말할 수는 없더구나.”
아빠가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컵 바닥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낮게 났다. 두 사람은 정말 두 사람 다운 연애를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이 이렇게 다른데도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된 것은 운명. 말 그대로 운명이었기에 그런 것 아니었을까.
“그럼 아빠는…”
내가 머뭇머뭇 물었다.
“엄마한테 첫사랑은 누구였는지… 안 물어봤어요? 엄마가 나한테는 먼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어서…”
“나도 물어볼 수는 있었지.”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빠에겐 누가 처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어. 매 순간, 지금의 미정이라는 사람이 중요했거든. 다만, 가끔 생각하긴 했어. 그렇게 환하고 당찬 사람이라면, 아빠보다 먼저 엄마를 좋아했던 누군가 있었겠지. 그래서 내가 첫사랑일 확률은 아마도 낮겠구나, 하고.”
아빠는 그 말을 하면서 멋쩍은 미소를 띄었다.
“근데 아까 말했던 백일날.”
아빠 목소리가 아주 약간 밝아졌다.
“학교 앞 작은 카페에서 돈이 없었던 우린 제일 싼 당근 케이크 하나 시키고, 촛불 하나 꽂고, 알바생 눈치 보면서 조용히 ‘백일 축하합니다.’ 하면서 노래를 한 번 불렀지. 엄마가 폴라로이드로 사진을 찍고, 그 자리에서 엄마가 사진 뒤에 펜으로 뭔가를 쓰더라.”
아빠는 손을 들어 공중에 사각형을 그렸다. 그 사각형이 사진의 테두리처럼 보였다.
“뭐라고… 쓰셨는데요?”
“항상 사랑하고 고마워요! 나의 첫사랑—미정 드림.”
아빠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그걸 보고… 조금 울었나 봐. 엄마가 휴지를 건네며 ‘울면 촛불 꺼져요~’ 했지. 그날 이후로 아빠는 가끔 스스로에게 칭찬하곤 했어. ‘내가 엄마의 첫사랑이라니, 복이 많구나.’ 하고.”
숨이 얕게 들어왔다가 나갔다.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쓸쓸했다. 세상에서 제일 소박한 축하가 가장 빛나는 증명이 됐던 날. 당근 케이크 조각 위 작게 흔들리는 불꽃, 사진 뒤의 짧은 글, 휴지 한 장. 엄마와 아빠의 러브스토리는 큰 장식 대신 작은 물건들로 기억되었다.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갔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두 번. 돌아오며 손에 크림색 봉투를 들고 있었다. 왼쪽 위에는 역시 별 스티커.
“엄마가 가기전에 부탁한 게 있었어.”
아빠가 봉투를 내 앞에 놓았다.
“언젠가 네게 건네달라고. ‘타이밍은 당근 케이크야’라고 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네.”
봉투는 따뜻했다. 종이 위의 온기가 사람의 온기와 다르지 않았다. 아빠는 내 옆에 앉지 않고, 마주 보고 약간 떨어져 앉았다. 나를 바라보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함께 같은 면을 보는 자세였다.
스티커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살짝 밀어 올렸다. 종이가 갈라지며 내는 마른 소리가 방 안 공기를 조금 바꾸었다. 한 장의 흰 종이. 둥근 획, 길게 빠지는 받침, 괄호 속 작은 농담—또 다시 틀림없는 엄마의 필체.
은하에게.
우리 은하, 요즘 네 표정 살짝 어른 같더라? ^^ 혹시 좋아하는 사람 생겼니? ㅎㅎ 아직 남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은 없다고 (엄마의 강력한 추측!) 알고 있는데, 그래서 더 궁금해! 어떤 사람이 네 쪽으로 걸어올지, 네가 어떤 말로, 어떤 침묵으로 그 사람을 맞이할지.
엄마에게도 학창시절 네 아빠 말고 네 아빠가 아닌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은 건 아니야. 근데 신기하게도 그때는 사진이 더 중요했어. (그리고 공부도! 이 말 내가 하게 될 줄 몰랐다…) 빛을 기다리는 법, 질문을 먼저 꺼내는 법, 허락을 구하는 법을 배우는 게 사랑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다 대학에 가니까—이상하지? 애인이 생기더라. (이 대목에서 아빠에게 미안… 하지만 사실이니까!)
은하는 어쩌면 아빠보다 더 ‘재밌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다. (아빠, 정말 미안!) 재밌다는 건 웃음이 많다는 뜻만은 아니고, 너를 궁금해하고, 네 속도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먼저 물어보고, 먼저 듣고, 먼저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사진처럼, 좋은 질문이 좋은 사랑을 만든다고 엄마는 믿거든.
나중에 애인이 생기면 엄마에게 먼저 알려 줘! (아빠보다 먼저! 약속!) 엄마는 분명 전화기를 들고 “누군데? 어디서 만났는데? 그 사람은 왜 너를 좋아한대?” 하고 쏟아낼 거야. 네가 귀찮아할 만큼. 그래도 말해 줘.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엄마는 분명히 네가 어릴 때처럼 손뼉을 칠 거야.
무엇보다, 너 자신을 먼저 좋아해 줘. 네가 너를 아껴야, 누군가가 와서 너를 더 좋아해 줄 수 있거든. 그러면 아무리 은하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밝혀 주는 별들이 네 뒤를 따라다닐 거야. 당연히 아빠와 엄마가 그런 것처럼.
오늘도 사랑한다, 은하야.
엄마가.
P.S. …
손끝이 그 아래에서 멈췄다. 잉크가 아주 미세하게 번진 자리. 본문이 끝난 자리의 여백이 유난히 넓어 보였다. ‘엄마가.’라는 서명의 곡선 옆에서 종이가 살짝 눌려 있었다. 쓸 때 손이 오래 머물렀다는 뜻일까, 아니면 눈물이 아주 얇게 닿았다는 뜻일까. 그 둘을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읽었니?”
아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내 목소리는 평평했다.
“고마워요.”
말끝이 덜컹거리지 않도록 속도를 천천히 낮췄다.
편지를 반으로 접었다. 모서리를 정확히 맞춰 또 한 번 접었다. 접힐 때마다 종이의 두께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P.S.는 접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아래에는 또 엄마가 내게 건네는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있을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다음 편지의 행방’이 담겼을 그 문장.
남자친구가 생기면 엄마에게 먼저 알려 달라는 문장을 읽고 나니, 갑자기 마음에 커다란 공허가 생겼다. ‘먼저’라는 단어가 설 자리가 없으니까. 그 사실이 갑자기 너무나 큰 해일이 되어 목 안쪽을 천천히 긁었다. 억누르면 더 아파질 것 같아, 억누르지 않았다. 그냥 밀려오도록 두었다. 이상하게도, 좋은 말들이 내 안의 빈 곳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낼 때가 있다. 그 선명함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오늘은 너무나,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아빠는 내 표정을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만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거실 시계가 ‘딸칵’ 하고 한 번 울렸다. 그 소리가 오늘 이 집의 유일한 박자 같았다.
“아빠,”
내가 물었다.
“엄마는 이 편지를 맡기면서… 뭐라고 했어요?”
“그냥, ‘나는 첫사랑에게 부탁할래’라고. 그러고 웃었어.”
카페에서 들은 이모의 문장과 포개졌다. 퍼즐이 맞춰졌는데, 이상하게 퍼즐이 조금 더 커진 기분. 빈칸이 채워지는 동시에 다른 모서리가 생겼다.
우리는 접시를 싱크대에 포개고 행주로 식탁을 닦았다. 나무결을 따라 물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지 않았다. 사라졌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아빠는 방으로 들어가 불을 낮췄다. 문틈에서 노란빛이 얇게 새어 나왔다가 금방 멎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책상 위 노트를 펼쳤다. 연필로 짧게 적었다.
—이제 그만.
글자 아래에 얇게 선을 그었다. P.S.는 접힌 안쪽으로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다음 편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지만 알지 않기로 하는 선택. 나에게 필요한 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워 두는 것’이었다. 엄마가 고등학생 때 칠판에 적던 그 차이를, 드디어 내 방식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침대에 앉아 휴대폰 사진첩을 열었다. 앞산의 야경, 토끼 조형물 옆에서 찍은 사진, 수성못 카페의 유리창 앞에서 수정이와 찍은 사진. 화면 속의 빛은 내 쪽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 유리창을 한 번 거쳐 나에게 왔다. 그 거리감이 편안했다. 화면을 끄고 램프 불빛을 낮추었다. 커튼을 반쯤 열자, 복도형 아파트의 긴 유리창들이 바깥 불빛을 조용히 받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같은 층 어딘가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밤은 늘 하던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아주 작은 마찰음. 아빠가 물컵을 싱크대에 내려놓는 소리였다.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소리, 다시 넣는 소리. 움직임들이 서로의 경계를 건드리지 않는 밤. 나는 귀를 기울였다가, 곧 귀를 거두었다. 듣는 것도 멈추는 것도, 오늘은 다 내 선택이었다.
마음속에서 엄마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나, 애인 생겨도… 엄마한테 먼저 말할수가 없어. 엄마가 없으니까.’ 소리 없이도 방을 꽉 채운 울음이 터졌다. 장례식장에서 이후로 터뜨린적 없었던 규모의 울음.
그 울음의 바다 속에서 헤엄쳐 나오기 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동안에, 내 숨을 되찾으려 호흡의 길이를 조금씩 바꾸어 보았다. 길게 내쉴 때 가슴이 덜 당겼다.
겨우 일어나 책상 위 봉투를 다시 보았다. 별 스티커의 은빛이 아주 약하게 반짝였다. 봉투를 조심스럽게 뒤집어 스티커 면이 아래로 가게 놓았다.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들이 있다. 오늘은 그 사실만 알면 되는 밤이었다.
불을 끄려다, 손이 잠깐 멈췄다. 다시 램프를 켜고, 서랍에서 앨범을 꺼냈다. 카페에서 가져온 작은 사진—유리창 앞에서 수정이와 서 있는 사진—을 뒤 포켓에 넣었다. 이모가 말하던 자리. 필름 냄새가 아주 약하게 올라왔다. 오늘의 한 장이 과거의 마지막 페이지를 밀어 오늘로 가져왔다. 그 다음은 아직 비어 있었다. 비어 있지만 비워 둔 상태. 그 차이가 안쪽에서 작게 울렸다.
엄마가 미워서가 아니다. 내가 버티기 위해서. 엄마가 남겨둔 흔적, 엄마가 생전에 남겨둔 마지막 흔적들을 나 역시 너무나 찾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매일 쫓다보면 내 일상은 슬픔으로 잠식될 것 같았다. 엄마라면, 엄마가 지금의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상상해보았다. 엄마도 나처럼 더 이상 흔적을 더듬지 않는 방법으로 견뎌내지 않을까? 계속 편지를 찾아가는 여정을 따라가도 슬프고, 멈추어도 슬프다면 난 후자를 선택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울다가 지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살아야지. 나도 내 삶을 살아야지.
램프를 끄자 방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창틀 위에 아주 얇은 빛이 남았다. 그 빛을 마음속에서 한 번 이름 불렀다가, 부르지 않기로 했다. 이름 붙이지 않으면 더 오래 남는 것들이 있다. 오늘은 그렇게, 살고 싶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눈을 감을까 말까 하다가, 감기로 했다. 감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다. 엄마가 부탁한 “먼저 물어보는 사람”이 되는 일은, 오늘은 충분했다. 내일부터는 묻지 않는 법을 배울지도 모른다. 어떤 질문은 다음 페이지를 열고, 어떤 질문은 한 페이지를 덮는다. 덮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둠이 방을 차지했다. 그러나 틈이 있었다. 아주 얇은 빛이 창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틈이 숨 쉴 공간이 되었다. 나는 그 틈에 몸을 기댔다.
…
새벽 쯤, 꿈과 깸 사이에서 엄마 편지를 읽는 꿈을 꾸었다. 글씨의 획마다 엄마의 손끝이 붙어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P.S.가 없는 편지를 들고 웃고 있었다. 웃음엔 소리가 없었지만, 창문 유리 어디쯤에서 얇게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나를 깨웠다. 눈을 떴을 때,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붙잡지 않았다. 아무것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대로 둔 채, 조금 더 잤다.
아침이 오면, 아빠와 처음 보는 듯한 표정으로 “잘 잤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말은 짧아도 충분한 날들이 있다. 언젠가, 아빠와 조금 더 여유로운 속도로 엄마 이야기를 더 할 날이 오겠지. 그날까지, 나는 편지의 여백을 내 쪽에서 조금 더 키워 보기로 했다. 다짐이라고 부르지 않고, 정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정리는 울음을 줄이지 않지만, 자리를 만들어 준다. 자리가 있으면, 앉을 수 있다. 앉을 수 있으면, 버틸 수 있다.
빛이 조금 더 올라왔다.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