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의 부력-3부
아침 공기가 유리창을 얇게 문지른다. 생일 아침 밥상은 단촐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미역국은 여전히 김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뿐. 밥솥 뚜껑에서 김이 한 번 올라오고, 반찬통 뚜껑이 ‘톡’ 하고 닫혔다. 아빠는 조용히, 그렇다고 지나치게 조용하지도 않게 움직였다. 젓가락을 내 쪽으로 바르게 놓아 두는 습관은 그대로다. 그 정렬이 이 집의 체온을 유지해 준다. 우리는 “잘 잤어?” “응.” 정도의 문장만 나눴다. 축하라는 말을 꺼낼 줄 알면서도, 서로의 입술이 먼저 주저했다. 축하받아야 하는 날이지만, 추모해야하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조용히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었다. 현관문이 ‘철컥’ 열렸다. 문틈으로 들어온 차가운 공기가 발등을 스쳤다.
차가운 공기. 작년의 오늘도 공기가 차가웠다. 현관문을 쾅하고 닫기 전까지 집 안의 공기는 그렇지 않았다. 보일러를 켜두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엄마가 있었기 때문일까. 엘리베이터 거울 속 얼굴은 낮과 밤 사이에 잠깐 멈춘 표정이다. 1층 로비의 유리문을 지나며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겨울과 봄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냄새.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가로수 잎은 덜 자랐고, 가게 셔터는 반쯤 올라가 있다. 신호가 바뀌는 동안 횡단보도 위 흰 선이 햇빛을 받아 조금 더 하얗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거리인데, 오늘은 어딘가 약간 들떠 있다. 들뜸은 기쁨이 아니라, 가벼운 긴장 쪽에 가깝다.
학교 계단은 여전히 같은 곳에 있다. 2층 복도 끝 창문에는 투명 테이프가 대각선으로 붙어 있고, 창틀의 페인트가 아주 조금 벗겨졌다. 계단참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형광등이 낮빛으로 흐린 금속성을 내며 길게 늘어져 있다. 종이 울리기 전, 복도는 늘 조금 더 넓어 보인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자리가 공간을 키웠다.
“은하야.”
목소리는 정확히 내 이름의 가운데를 눌러 불렀다. 작년 고1 담임 선생님. 손에 들고 있는 건 얇은 서류철과 작은 봉투다. 봉투 왼쪽 위, 별 스티커. 은빛이 아주 얇게 떠 있다. 그 빛깔만으로도, 나는 봉투의 내력을 안다. 선생님은 조심스레 덧붙였다.
“잠깐, 시간 괜찮니?”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복도의 사람 흐름을 한 번 보고 나를 창가 쪽, 비어 있는 교실 문 앞까지 데려갔다. 문을 밀자 힌지에서 ‘끼익’하는 소리가 짧게 났다. 빈 교실의 공기는 분필 냄새와 닦아낸 걸레 물 냄새가 섞여 있다. 창문 유리가 바깥의 바람을 얇게 훔치고, 커튼이 아주 느리게 흔들렸다. 선생님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걸… 작년 종업식 때 전해주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깜박 잊고 있었네.”
봉투를 받자, 종이의 표면이 내 체온을 아주 빨리 훔쳐 갔다. 크림색, 모서리의 단단함, 별 스티커.
“선생님께서 쓰신 거예요?”
“아니.”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께서 작년 생일 전날에 오셔서 맡기고 가셨어. ‘은하가 언젠가 선생님께 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때 은하에게 건네 달라’고, 아주 정성스레 부탁하고 가셨다.”
그 말을 들을 때, 목 안쪽에서 무엇이 천천히 흔들렸다. 1년 전,아빠가 건네 준 엄마의 편지를 끝으로 더는 편지를 찾아다니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편지를 고의로 접어서 묻어 두었다. 손에 쥔 봉투의 두께가 그 결심 위에 얹힌다. 여는 일은 생각보다 쉬울 것이다. 스티커의 아주 얇은 가장자리를 밀어 올리면 된다. 하지만 얇을수록 그리움과 원망이라는 칼날에 더 날카롭게 베일 수 있다. 나는 봉투를 열지 않은 채, 손에 조금 더 꼭 쥔다. 손가락 마디가 희미하게 하얘졌다.
선생님은 잠깐 내 얼굴과 손을 보고,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 다리와 바닥이 스치는 소리가 낮다. 칠판 쪽, 분필 가루가 가장자리에서 얇게 내려앉아 있다. 선생님이 책상 위 지우개를 한 번 집었다 놔두고, 물이 든 종이컵을 내 앞에 내밀었다.
“은하야.”
선생님이 천천히 말을 고른다.
“혹시 물 위에 누워 본 적 있니?”
나는 눈을 깜빡였다.
“물에요?”
“응. 수영장, 바다, 그 어디든.”
“어릴 때 수영장에서 수영 배울때 해봤어요. 무서워서 오래는 못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랬다. 근데, 물 위에서 오래 떠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떠오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니? 힘을 풀어야 해. 몸에 힘을 주면 가라앉거든. 우리는 당연히 반대로 생각하지. 더 힘줘야 살 것 같다고. 근데 물은 기가 막히게, 힘을 줘버리면 오히려 집어 삼키지.”
나는 봉투의 모서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종이가 만드는 아주 미세한 사각거림이 교실에 퍼진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칠판의 매끈함처럼 평평하고, 끝에서만 아주 약간 올라간다.
“내가 왜 이 얘기를 하느냐면,”
선생님이 잠시 창밖을 본다. 운동장 먼지 위 햇빛이 얇게 날아다닌다.
“슬픔도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 선생님은 대학생 때 어머니를 하늘로 보냈단다. 처음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견뎌 보려고 했어. 시간표를 빼곡히 채우고, 약속을 더 만들고, 심지어 억지로 웃는 연습도 해봤지. 근데 이상하게, 더 깊이 가라앉더구나. 밤은 자꾸만 더 깊어지고, 몸은 더 굳어만가고, 그 단단함이 내 안을 더 무겁게 만들더라.”
선생님은 작은 숨을 한 번 고른다. 손등의 핏줄이 얇게 드러났다 사라진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영장에 갔어. 아무 생각 없이. 실은 도망치고 싶었어. 물에서 울면 아무도 모를 거 아냐? 그래서 물에 들어가서 등을 대고 누웠는데, 자꾸만 가라앉는 거야. 코치가 와서 가만히 내 배 위에 손을 얹더니 그 말만 하더라. ‘힘 풀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풀었다. 배를 조금 내주고, 어깨를 조금 내리고, 숨을 길게 뿜었지. 그러자 물이 나를 들어 올리더라. 내가 물 위에 떠 있는 게 아니라, 물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다는 느낌. 그때 처음 알았어.”
나는 가만히 선생님의 손을 본다. 조용한 손이고, 어쩐지 물을 오래 만져 본 손처럼 보였다. 그 손이 한 장의 편지를 내게 건넸고, 지금은 내 손에 그 편지가 있다. 말이 흐릿해질 듯한 순간, 선생님이 덧붙인다.
“네가 지난 1년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잘 해 왔다는 걸 나는 알아.”
선생님이 말한다.
“네 표정, 자세, 학교 생활 모두에서. 그런데 오늘 네 손을 보니, 너무 힘을 주고 있구나 싶었어. 네가 힘을 그만 줘도, 어쩌면 슬픔이 네 몸을, 네 마음을 잠깐 들어 올려 줄지 몰라. 슬픔을 이기려 하지 말고 슬픔에 몸을 맡겨 보는 것. 그걸 말해주고 싶었어.”
나는 대답 대신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삼킨다. 물이 목을 지나며 낯익은 소리를 낸다. 장례식장에서부터 오늘까지 사이사이에 박음질되던 그 소리. 조금 쉰 듯, 그러나 정확히 있는 자리로 돌아오는 소리.
“힘내.”
선생님이 한 번 웃는다.
“이 말이 얼마나 무력한지, 선생님도 안다. 엄마를 잃은 사람에게 ‘힘내’ 말고 달리 말할 게 없다는 사실이, 참 슬프더라. 그래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해보려는 거야. ‘힘을 풀고 슬픔에 온전히 너를 맡겨보는 것도 괜찮다’고.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기보다, 괜찮지 않은 상태에 몸을 그냥 두어 보는 거지. 바닥을 한 번 밟고, 물이 들어 올리는 힘을 한 번 믿어 보는 것.”
“선생님…”
내가 입을 여는 데 시간이 걸린다.
“저… 사실, 작년에… 편지들을 그만 찾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게 맞는 줄 알았고, 지금도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말이 거기서 스스로 멈춘다. 봉투의 모서리가 손바닥에 둥글게 눌렸다. 선생님은 재촉하지 않았다. 자판의 커서처럼, 내 말의 끝에 조용히 서 있는 표정.
“그런 마음 나도 충분히 공감해.”
선생님이 천천히 말한다.
“사람은 커가면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너는 스스로 알아가고 있었던 거야. ‘비어 있는 것’과 ‘비워 둔 것’의 차이를 아는 사람처럼. 그런데 가끔은, 비워 둔 자리에 무언가가 스스로 흘러 들어오기도 해. 그건 우리가 막을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지. 교무실 서랍 속에서 1년을 잠들어 있다가 나온 그 편지처럼.”
선생님은 조심스레 웃었다. 미안함과 다정함이 섞인 웃음이었다.
“이 자리에서 편지를 열어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열지 않아도 좋아. 다만, 네 손에서 힘을 잠깐 빼 보는 것.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야. 그리고 많이 힘들면, 언제든 찾아오렴.”
그 문장들은 ‘힘내’란 말보다 오래 남았다. 나는 봉투를 가슴 쪽으로 가져왔다. 종이가 이불처럼 느껴지다니. 배 위에 두었을 때, 엄마가 손을 얹는 자세가 잠시 떠올랐다. 눈물이 돌았다. 이번엔 막지 않았다. 울음이 작은 소리로 시작해, 목의 뒤쪽을 지나, 어깨로 올라왔다. 선생님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아주 조금 숙인 채 앉아 있다. 다가오지 않으면서도 떠나 있지 않은 거리. 물과 몸 사이, 그 비슷한 거리.
많이 울면, 몸이 조금 가벼워진다. 울음이 가라앉자 선생님이 조용히 휴지를 내민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받았다.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지 않고, 티슈로 가볍게 찍었다.
“생일 축하한다.”
선생님이 덧붙인다.
“이 말도, 오늘은 복잡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축하한다, 은하야.”
나는 숨을 세지 않았다. 폐가 알아서 움직이도록 두었다. 창문 유리 위로 햇빛이 한 번 더 떠올랐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왔다. 문이 ‘끼익’ 하고 닫힌다. 복도의 소음이 다시, 천천히 귀로 들어왔다. 선생님은 내 어깨를 아주 가볍게 두드렸다. 그 가벼움 덕분에, 어깨가 무겁지 않았다.
점심 종이 울리기 전, 복도 공기는 급히 오르내린다. 누군가는 뛰고, 누군가는 걸으며 창틀에 팔꿈치를 올려놓는다. 나는 우리 반 교실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바닥의 지문과 신발 자국들이 햇빛에 곱게 말라 있다. 옆 반 문틈으로는 분필 가루가 미세한 비처럼 날린다. 학생부가 붙여 둔 포스터 모서리 하나가 들려 있고, 테이프의 끈끈함이 하얀 가장자리를 만들었다.
복도 끝, 창틀 앞에 서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수정이. 멀리서도 알 수 있는 표정. 멀지 않은 사람을 보는 표정. 수정이는 내 쪽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그대로 자리에서 멈춰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봐 주는’ 게 아니라 ‘본다’는 느낌. 나는 편지를 교복 포켓 깊은 곳으로 천천히 넣었다.
수정이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속도다. “괜찮아?”가 아니라, “거기 있어.” 같은 말. 나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의 어깨가 아주 조금 풀렸다. 그게 다였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하다.
수정이와 학생 식당으로 걸어갔다. 내 생일에 겹쳐진 탄생과 소멸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수정이는 장난기없는 담백한 생일 축하 인사를 내게 건넸다. 남들이 보면 너무 무덤덤해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축하 인사였다. 나는 그런 수정이가 좋았다. 깊은 공감과 배려심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묵직함. 수정이의 배려가 가득 담긴 일상적인 대화와 함께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왔다.
오후 수업에서 문학 선생님이 칠판에 ‘부력’이라는 단어를 썼다. 인물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단락에서, 선생님은 불쑥 그 단어를 꺼내 왔다.
“어떤 문장은 독자를 밀어 올립니다. 작가는 독자를 들어 올리려 애쓰지 않고, 문장 자체가 독자를 들어 올리는 때가 있죠.”
칠판의 ‘부력’이라는 글자가 교실 공기 속에서 희미한 무게를 얻었다. 오늘 아침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억지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떠오르게 하는 힘. 나는 잠깐 웃는다. 우연이 겹치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의미가 덧붙는다.
체육 시간 종이 울릴 때, 운동장 모래가 일제히 빛났다. 달리기 하는 반이 잔발로 라인을 밟고 지나가고, 줄넘기 줄이 바람을 쪼갰다. 우리반은 체육관으로 향하고, 나는 교실에 남았다. 체육 선생님께 허락을 받았다. “조용히 있어.”라는 한마디와 함께. 창틀에 팔꿈치를 대봤다. 창 밖 하늘은 얇은 구름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작게 깜빡이는 빛이 바닥까지 스며든다. 봉투가 포켓 안에서 체온을 먹고 있다. 종이는 사람의 온도를 금방 가져갔다.
종례 종이 울릴 때 쪽빛이 교실을 지나갔다. 선생님이 “생일인 사람 있지?” 하고 물었다. 몇몇 눈들이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책상 위 사탕을 밀어 놓았다. 봉지의 비닐이 ‘사각’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오늘은 너무 크지 않았다. 선생님은 숙제 공지를 하고, “내일 또 보자.”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의자를 밀며 서서히 밖으로 흘러나갔다.
교문을 나설 때, 수정이가 옆으로 슬며시 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학교 앞 가로수 잎이 햇빛을 쏟아 내리고, 그 아래로 그림자들이 빠른 춤을 추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는 동안 우리는 멈췄다. 차창에 비친 우리 머리 모양이 잠깐 합쳐졌다가 갈라졌다.
“은하야. 영희 이모네 카페있잖아.”
수정이가 말했다.
“지금 가볼래? 너 생일이니까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잠깐 하늘을 봤다. 구름이 아주 얇게 퍼져 있고, 사이사이로 작은 빛이 바닥까지 내려왔다. 수성못의 물결이 멀리서부터 봐도 그려지는 듯하다. 내 포켓 안쪽, 봉투가 몸의 움직임에 맞춰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어떤 박자를 만들어내는지 상상했다.
“그래, 가보자.”
나는 말했다.
“그래, 좋아. 그럼 지금 바로 가자.”
수정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오늘은 그냥 기대 볼래.”
스스로도 어색한 말이었다.
“물 위에 눕듯이.”
수정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발 밑의 보도 블록이 덜컥이는 소리를 냈다. 하늘빛이 살짝 바뀌는 것을 보면서, 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뒀다. 그리고 힘을 줬다. 그러나 과하지 않았다. 봉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냥 종이 무게 만큼의 질량을 가지고 있었다.
버스 도착 시간이 줄어들수록, 마음 속 물이 아주 얕게 일렁였다. 물은 여전히 차갑지만, 차갑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 물 위에, 오늘은 등을 조금 더 내어주기로 했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은 채,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은 채. ‘부력’이라는 단어가 바람에 흩어졌다가 돌아온다. 그 단어의 가운데로 햇빛이 지나가고 있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섰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계단의 금속이 햇빛을 받아 잠깐 눈이 부시다 사그라든다. 우리는 먼저 탄 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창가 쪽 빈자리. 자리에 앉자, 유리창엔 바깥 풍경이 얇은 막처럼 붙는다. 나는 그 막 위에 이마를 기대지 않았다. 대신 창틀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정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침묵은 무겁지 않은, 물 위에 떠 있는 낙엽 같은 침묵이었다.
버스가 움직였다. 골목의 분식집 간판들이 뒤로 밀리고, 공원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신호에서 잠깐 멈춘 사이, 옆 차 안에서 아이가 우리 쪽을 본다. 엄마에게 안긴 아이의 손가락이 유리창을 톡톡 친다. 유리창은 소리를 내지 않지만, 진동이 손끝에 아주 얕게 전해졌다. 그 풍경에 조금만 더 머물렀다면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
수정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질문의 모서리를 최대한 둥글게 한 어조다.
“물 위에 뜨는 방법에 대해서 말해주셨어.”
내가 답한다.
“힘을 빼고 슬픔에 온전히 맡겨보라는 이야기였어.”
“그렇구나.”
수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근데… 오늘은 조금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됐지.”
수정은 더 묻지 않았다. 더 묻지 않는 게 어떤 날에는 가장 다정하다.
버스가 신천을 스칠 때, 물빛이 유리로 들어왔다. 얇은 반짝임. 내 주머니 속 종이가 그 반짝임을 본 것처럼 아주 잠깐 가벼워졌다. 내가 만든 착각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착각 속에 살고 싶다. 모든 것이 온전한, 1년 전 오늘 이전의 시간처럼.
수성못에 가까워질수록 바람 냄새가 바뀌었다. 금속 난간, 젖은 돌, 오래된 페인트. 정류장에서 내리자, 못 위로 개들이 날아 가고 있었다. 난간에 손을 얹자 금속의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멀리 오리배가 천천히 돌아나왔다. 물 위의 그림자들이 길다. 우리는 카페 간판을 향해 걷는다. ‘YOUNGHEE’S—COFFEE & PHOTO’. ‘PHOTO’라는 단어가 바람에 조금 기울었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1년 전과 같은 풍경인데, 색온도가 약간 다르다. 내가 바뀌어서 일까.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손잡이의 금속은 낮 동안 받아 두었던 온기를 절반쯤 잃었고, 나머지 절반은 아직 남아 있다. 내 손끝이 그 남은 온기를 마지막으로 흡수했다.
“준비됐어?”
수정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내 대답을 신호삼아 수정이가 손잡이를 당겼다. ‘딩동’— 가벼운 종 소리가 우리의 발목쯤에서 맴돌다가 위로 올라갔다. 유리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카페 안의 따뜻한 공기가 한 차례에 우리를 덮었다. 볶은 원두의 향, 나무 테이블에서 올라오는 잔열, 낮게 깔린 음악의 현. 바리스타 머신이 ‘쉬익’ 하고 숨을 뱉었다. 컵과 컵이 맞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1년 전 앞산 전망대 식당의 그릇 소리와 살짝 닮아 있었다.
안쪽에서 낯익은, 그러나 오랜만인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 왔구나. 어서오렴.”
이모의 목소리다. 우리를 향해 고개를 드는 순간, 시간의 두께가 카운터 위로 얇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