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돌아가서 보자

별빛의 부력-3부

by 시쓰는 충하

꿈은 물 위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물은 수성못처럼 넓게 펼쳐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학교 사진부 암실의 현상 트레이처럼 직사각형으로 잘려 있었다. 트레이 가장자리에는 낯익은 집게가 걸려 있었고, 그 집게를 누군가의 손이 살짝 잡아 올렸다.

“은하야.”

목소리는 가까웠다. 얼굴보다 먼저 손이 들어왔다. 얇은 인화지를 집은 손끝, 물에 젖은 종이의 무게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의 동작. 손이 종이를 현상액 위에 눕히자 표면이 잔잔히 흔들려 작은 물결들이 겹쳤다. 물결은 금세 가라앉았다가, 다시 아주 느리게 일어났다.

“기다리면 올라온단다.”

엄마가 말했다. 오래전에 들었던 자장가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비워 둔 시간은, 빛이 스스로 올라오는 시간이야.”

“응… 그런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암실 특유의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고, 붉은등이 없이도 사물의 윤곽들이 또렷했다. 물 위를 기울이면 가라앉을 것 같아서, 나는 몸의 균형을 미세하게 잡았다.

엄마는 설명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검지로 물 표면을 한 번 쓸더니, 집게를 들어 종이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무게의 균형을 시험하는 가벼운 동작. 종이의 흰 가장자리가 조금씩, 정말 조금씩 어두워지다가 어떤 형상을 얻었다. 나는 숨을 얕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게 물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했는데, 물은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더 잠잠해지지도, 덜 흔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은하야, 사진은 억지로 꺼내려 하면 번져.”

엄마가 말했다.

“기다림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야.”

“응. 그냥 기다려 볼게.”

엄마가 웃었다.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웃음은 물 위의 파동처럼 희미하게 번졌다.


암실의 벽이 천천히 뒤로 밀리더니, 교실 칠판이 그 자리를 채웠다. 분필이 칠판을 긁는 소리, 옅은 가루의 비. 검은 판 위에 굵은 획이 생겼다.


여백 = 비어 있는 것? / 비워 둔 것?


엄마가 분필을 내려놓고 내 쪽을 봤다.
“어느 쪽 같아, 은하야?”

나는 칠판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비어 있는 건… 그냥 없는 거 같고, 비워 둔 건… 일부러 남겨 둔 자리 같아.”

“맞아. 사진으로 비유해 볼까?”

엄마가 지우개를 집어 들었다.

“빈 의자는 주인이 없어서 비었고, 비워 둔 의자는 누군가를 앉히려고 남겨 둔 거야. 둘 다 비어 보이지만 이유가 다르지.”

“그럼 사진에서 여백은, 그냥 허전한 데가 아니라 누가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 둔 자리겠네.”

엄마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또 하나. 숨에도 여백이 있어. 들숨과 날숨 사이 아주 짧은 멈춤. 그 멈춤을 일부러 없애면 더 숨차지. 남겨 두면 숨이 이어져.”

나는 칠판에 손가락으로 작은 사각형을 그렸다.
“공부도 그렇지? 시간표가 꽉 차 있으면 더 망가질 때가 있어. 비워 둔 시간은 쉬라고 남긴 자리니까.”

엄마가 분필을 들어 사각형의 테두리를 따라 얇게 선을 보탰다.

“글에서도 여백은 독자가 들어오는 길이야. 문단 끝에 조금 남겨 두면, 그 다음 문장을 네가 같이 쓰게 되거든.”

“그럼… 내가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던 건, 도망친게 아니라 비워 둔 거였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내 호흡을 맞추려고 남겨 둔 자리.”

“그래. 숨을 쉬기 위해서 그랬던 거지.”

엄마가 지우개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오늘은 답 말고, 자리만 남겨 두자. 가운데 문장은 그대로 두고, 바깥의 가루만 털어 볼래?”

나는 테두리만 조심스럽게 쓸어 지웠다. 분필가루가 가볍게 내려앉고, 칠판의 모서리가 은근히 반짝였다. 손바닥의 열이 지우개를 데우다가 서서히 식었다.

“여백은… 엄마.”

내가 다시 물었다.

“돌아오라고 남겨 둔 자리, 맞지?”

“맞아. 누구에게든, 혹은 나 자신에게든 돌아오라고 남겨 둔 자리인 거지.”

엄마가 손바닥을 펴서 칠판 가운데 빈 공간을 살짝 가리켰다.

“이 빈 곳이 허전하지 않은 이유가 그거야. 돌아올 사람과 문장이 이미 약속돼 있으니까.”

칠판 위 구석에 작게 적힌 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지 않는다.


엄마는 소리 내 읽지 않았지만, 지나가며 손끝으로 그 문장을 한 번 어루만졌다.
“붙잡지 않되, 자리는 남겨 두자. 그게 여백이야.”

나는 분필을 들어 칠판 아래에 천천히 덧썼다.

여백 = 돌아오라고 남겨 둔 자리.

엄마가 웃었다.
“좋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자. 남은 문장은, 네가 돌아가서 쓰면 돼.”



밤이 내려앉은 앞산이 보였다. 길은 이미 익숙했다. 언덕 위의 가로등이 원을 만들고, 그 아래에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종이컵을 손에 쥐고 있었고, 종이컵은 꽃의 모양을 닮았고, 옆의 사람은 그 모양을 보며 웃고 있었다. 원경의 풍경이었다. 초점은 가까운 데도, 먼 데도 없이 고르게 잘 맞아 있었다.

“용기는 크기가 아니라 방향이야.”

엄마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낮게 흘렀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이 종이의 모서리를 만지는 느낌이 났다. 여섯 번째 편지의 존재를 손끝으로 확인하고는, 꺼내지 않고 다시 놓았다. 엄마가 아주 짧게 숨을 들이마신 소리가 들렸다. 칭찬이나 안도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발밑의 낙엽 하나가 조용히 뒤집혔다. 그 작은 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은 안 열 거야.”

내가 말했다.

“내 속도로… 이틀 뒤에 열어 볼래.”

“그래.”

엄마가 말했다. 그것은 허락이 아니라 동의에 가까웠다. 나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자 이번에는 수영장의 천정과 수면이 겹쳐 보였다. 천장의 조명이 둥근 빛을 만들고, 물은 그 둥근 빛을 잘게 부서뜨렸다. 나는 물가에 서 있었다. 발끝을 물에 대 보니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무릎까지 올라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내 앞에 서지 않았다. 약간 비켜 선 자리에서 내 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배 위에 아주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힘을 준 채로는 못 떠.”

엄마의 말은 조용했다.

“조금만 덜어 보자.”

나는 어깨부터 풀었다. 오랜 시간 긴장해 온 부위들이 하나씩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목의 뒤가 시원해지고, 견갑골 아래가 넓어지는 느낌이 났다. 그때 물이 내 등을 받쳐 올렸다. 내가 떠올랐다는 느낌보다는, 물이 나를 들어 올린다는 감각이 더 정확했다. 귀 뒤로 물소리가 가볍게 흘러갔다. 수영장 어딘가에서 금속문이 크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물 속을 천천히 지나갔다.

“엄마.”

나는 누운 채로 말했다.

“이런 느낌이었나 봐. 그동안… 잊고 있었어.”

“때로는 몸이 먼저 아는 것들이 있지.”

엄마가 답했다. 나는 고개를 아주 조금만 돌렸다. 내 시야 가장자리에 엄마의 손이 보였다. 손은 이제 내 몸에 닿지 않았다. 나는 그 거리를 알았다.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거리. 엄마의 손이 물 위로 그림자만 남겼다.


수면 위에 떠 있던 인화지의 흰 가장자리에서 글자들이 서서히 올라왔다. 잉크가 번지는 속도는 조급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았다.

네 태도는 네 편이야.
도움이 되는 사람.
돌아가서 보자.

세 줄이 각각 다른 가장자리에 나타났다.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잉크가 번질 것 같았다. 대신 눈으로 더 가까이 당겨 보았다. 글씨의 곡선이 엄마의 것을 닮아 있었다. ‘돌아가서 보자’라는 문장은 특히 이상한 방식으로 따뜻했다. 지금 당장 보자는 뜻이 아니었다. 등 뒤에서 물이 천천히 호흡하는 동안, 나는 그 문장을 속으로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읽었다.

“엄마, ‘돌아가서 보자’는…”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내 자리에서?”

“그래.”

엄마가 말했다.

“바로 앞도 좋고, 한 바퀴 돌아서도 좋아.”

그 답은 내 예상과 다르지 않았지만, 들으니 달랐다. 들은 말은 종종 내 말보다 더 오래 남았다.


부엌 냄새가 스쳤다. 미역국의 김이 소리 없이 올라오고, 당근 케이크 위 크림의 결이 작은 칼무늬를 만들어 놓은 장면이 반짝였다. 엄마가 말없이 국그릇을 내쪽으로 조금 밀었고, 나는 그 그릇을 받지 않았다. 대신 식탁 위 젓가락을 곧게 맞췄다. 그 단순한 동작에 아빠의 온갖 노동이 스며 있었다. 젓가락이 정확히 평행이 되자 마음이 약간 고요해졌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

나는 여전히 젓가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는… 먼저 떠 있었던 것 같아.”

“맞아. 아빠는 그런 사람이니까.”

엄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낮아졌다.

“네가 떠오를 때까지, 아빠는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어.”

그 말이 부엌의 온도와 섞였다. 나는 숟가락을 들지 않고, 식탁 모서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다시 방이었다. 스탠드 받침대가 평소보다 커 보였다. 원형의 밑변이 아주 넓어진 것처럼, 거기엔 충분한 자리가 있었다. 엄마가 받침대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가 떼었다.

“여기 있지?”

“응.”

내가 대답했다.

“지금 열어도 되고,”

엄마가 말했다,

“네가 정한 날에 열어도 되고.”

“이틀 뒤에 볼게.”

나는 분명히 말했다.

“오늘은 그냥… 같이 있는 걸로 할래.”

엄마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의 크기를 재보려다가 그만두었다. 크기는 상관없었다. 소리의 방향만 알면 되었다.


꿈은 이제 끝나려는 듯했다. 암실의 붉은등이 없는 방이 서서히 멀어졌고, 집게에 매달린 사진들이 공중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물방울은 마룻바닥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사라지는 자리에 작은 원이 남았고, 그 원은 곧 말라 없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 그냥 바라봤다.

엄마가 멀어졌다. 뒤돌아 선 실루엣이었지만, 나는 쫓아가지 않았다. 붙잡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그러나 오늘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을 때, 공기가 바뀌었다. 공기는 내가 아는 집의 공기와 닮아 있었다.


눈을 떴다. 베개 끝이 약간 젖어 있었다. 방의 공기는 조금 가벼웠다. 나는 이불을 허리까지 끌어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빛은 아직 충분하지 않았고, 창틀 위의 선은 얇고 길었다.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켜지 않고, 받침대를 살짝 들어 올렸다. 거기 편지가 있었고, 종이의 모서리가 어둠 속에서도 자기 모양을 잃지 않았다. 나는 다시 받침대를 내려 놓았다. 책상으로 가서 포스트잇을 꺼내 적었다.


— 오늘은 편지 열지 않기.


부엌으로 나가니 싱크대에 물컵이 하나 엎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뒤집어 물기를 털고, 행주로 닦아 말려 두었다. 물이 컵 입구에서 한 방울 떨어져 싱크대 스테인리스 표면에 작은 원을 만들었다. 그 원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서 있었다.

방으로 돌아오며 나는 엄마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오늘은… 괜찮았어.’ 그 말은 완전한 사실이 아니었지만, 어제보다 사실에 가까웠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나는 침대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지 않았고, 사라졌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그리고, 떠 있었다. 아주 잠깐. 그러나 분명히.

다시 잠들기 전, 창문 유리에 손바닥을 가볍게 댔다 떼었다. 유리는 차갑지 않았다. 내 손의 열 때문인지, 낮 동안 남아 있던 집의 체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아야 하는 것과 알지 않아도 되는 것들 중에 오늘은 후자가 더 많았다.

램프를 켜지 않은 채, 나는 스탠드 받침대 아래를 한 번 더 바라보고 눈을 감았다. ‘돌아가서 보자’는 문장이 꿈에서 보았던 그 흰 가장자리처럼 마음의 테두리에 떠 있었다. 나는 그 가장자리를 손으로 만지지 않았다. 다음 장을 넘기기 전에, 한 장을 완전히 말리는 편이 좋을 때가 많았다.

이틀 뒤, 나는 그 장을 만질 것이다. 지금은, 물 위에서 몸을 더 얇게 눕히는 연습을 할 차례였다. 물은 서두르지 않았고, 나도 서두르지 않았다. 가라앉지 않은 밤은 잔잔히 나를 들어 올렸다.

매거진의 이전글13. 이겨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