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엄마의 자리

별빛의 부력-3부

by 시쓰는 충하

하교 길 공기는 살짝 눅눅했다. 가로수 잎이 바람을 한 번 훑고 지나가면, 그 사이로 햇빛이 쌀알처럼 부서져 떨어졌다. 신호를 기다리며 유리문 너머의 작은 케이크 가게를 보았다. 쇼케이스 안에는 당근 케이크가, 크림의 결을 잔잔하게 세우고 있었다. ‘오늘은…’ 망설임은 짧았고, 발걸음은 길지 않았다.

나는 작은 당근 케이크 두 조각을 주문하고, 초 하나를 함께 샀다. “숫자 초로 드릴까요?”라는 점원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숫자에 의미를 담을 필요가 없는 날이니까. 케이크를 담은 종이 가방의 무게는 가벼웠다.

현관문이 ‘철컥’ 하고 닫혔다. 신발을 벗는 동안, 싱크대에서 물방울이 한 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부엌에서 나왔다.

“왔니?”

“네. 아빠… 케이크 사 왔어요.”

작은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렸다. 아빠가 상자를 한 번 바라보고, 나를 한 번 보았다. 눈빛은 뭐라 말하지 않고도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당근 케이크네?.”

아빠가 컵을 꺼냈다. 나는 접시와 포크를 놓았다. 젓가락은 오늘도 내 쪽으로 바르게 놓여 있었다. 그 정렬은 항상 집의 체온을 지키는 아빠의 반듯함으로 느껴졌다.

“아빠, 초 하나만 꽂을게요.”

“그래.”

초에 불을 붙였다. 불꽃은 작고 또렷했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대신 불을 함께 보았다. 불빛이 흔들릴 때, 아빠의 눈동자도 아주 조금 흔들렸다. 나는 그 불을 한 번에 껐다. 얇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며 사라졌다.포크가 접시를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얇게 뜬 케이크 한 입이 목을 지나갔다. 당근의 달큰함이 늦게 올라왔고 크림이 혀에서 천천히 녹았다.

“아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문장 앞에 숨을 하나 길게 붙잡았다가 놓았다.

“저… 엄마 얘기, 오늘은 하고 싶어요.”

아빠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접시 가장자리에 작은 ‘딸깍’ 소리가 맴돌았다.

“그래, 하자.”

말은 짧았지만, 오래 준비된 대답처럼 들렸다.

“그동안… 많이 슬펐어요. 그건 아빠도 아시죠? 근데… 슬픔만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편지를 읽을 때마다 엄마한테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는데, 더는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벽처럼 앞을 막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원망도 했어요. 이렇게 편지로만… 계속 울게 만드니까. 엄마한테 화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다가, 또 울고…”

말이 끊겼다. 포크를 쥔 손등의 힘이 조금 들어갔다가 풀렸다. 아빠는 조용히 물잔을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물의 온도는 집과 같았다.

“그래도… 이젠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슬픔에 온전히 저를 맡겨 보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아빠의 대답은 아주 작았다. 그런데도 정확히 들렸다. 아빠가 숨을 한 번 고르고, 손바닥을 포개 식탁 위에 올렸다.

“아빠도… 엄마 가고 나서, 한동안 버티려고만 했어. 낮에는 반듯하게 젓가락을 맞추고, 쓰레기 봉투를 반듯하게 묶고, 장보기 메모를 정리하고. 그러다 매일 밤 조금 기울기도 했었지.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고, 돌아와선… 네 방 문틈에만 잠깐 서서 잠든 널 바라만 봤지. ‘잘 자’라고 말하려다가, 그 말이 너를 깨울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틈의 빛을 나는 기억했다. 매일 밤, 노란빛이 바닥을 얇게 스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겠더라. 네가 숨을 쉬려면, 누군가는 먼저 떠 있어야 한다는 걸. 그래서 아빠는 힘을 덜기로 했지. 슬픔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슬픔 옆에 두고 앉아 있자고.”

아빠의 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케이크를 작게 잘라 접시 옆으로 옮겼다.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빠는… 엄마한테 화난 적 없었어요?”

아빠가 잠깐 웃었다.

“있지, 사람인데. 병원도 못 가 보고, 그 자리에서 떠나 갔잖아. 사고 난 날 오전 통화 기록을 나중에 봤어. 너 생일 준비하려고 몰래 전화하고, 케이크 예약 문자도 보내고… 정작 더 빨리 꺼내 줬으면 좋았을 말들은 끝끝내 농담 사이에만 묶어 둬 버리고 떠난 게 얄밉기도 했어. ‘나 괜찮다’고만 하는 습관도. 아빠가 평소에 더 물어봤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수십 번 했고.”

아빠가 말을 멈췄다. 부엌의 시계가 한 번 울렸다. ‘딸칵’. 그 소리가 마음의 박자를 정했다.

“근데… 엄마를 오래 본 아빠는 알지. 엄마는 ‘준비하는 사람’이었어. 허락을 먼저 구하고, 질문을 먼저 꺼내고, 사진을 기다리던 그런 사람이 엄마잖아? 편지도 네가 그리움에 너무 깊이 잠길까봐, 조금 늦게, 조금씩 떠오르라고 그런 식으로 남겨 둔 거겠지. 마음만 앞서 서두르면 번져 버리는 사진처럼.”

나는 고개를 숙였다. 크림의 결이 빛을 받았다.

“저도… 엄마가 밉다고 느낄 때가 있었어요. 특히 다섯 번째 편지에서… 엄마가 ‘애인이 생기면 엄마에게 먼저 알려 달라’는 데서요. ‘먼저’라는 단어가… 소용이 없으니까. 그게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일부러 안 읽었어요. P.S.는.”

아빠가 나를 보았다. 비난도, 놀람도 아닌 눈이었다.

“잘했어.”

“네?”

“네 마음의 속도에 맞게 해야지. 비워 둔 자리라는 게 있잖아. 엄마도 알았을 거야. 네가 어느 날은 접고, 어느 날은 펴고, 어느 날은 읽고, 어느 날은 덮을 거라는 걸. 그게 호흡이고, 삶이니까.”

‘잘했어’라는 말이 오늘만큼 슬프게 들린 날이 있었나 싶었다. 목 안쪽이 따갑게 뜨거워졌다. 이번엔 막지 않았다. 눈물이 천천히 올라왔다. 아빠가 티슈를 내밀었다. 나는 대각선으로 접힌 그 모서리를 잡아, 눈가를 한 번 찍었다.

“아빠… 엄마랑 함께했던 마지막 날 아침 기억해요? 저랑 엄마… 싸웠잖아요. 진짜 사소한 거였는데… 왜 그날엔 사소하지 않았는지…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더… 또… 미워질까 봐. 엄마가 아니라 제가요. 미숙하고 어리석고 철없는 제가.”

“아빠도… 엄마가 간 뒤로 계속 그날에 매여 있었어.”

아빠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손등의 혈관이 아주 얕게 드러났다 사라졌다.

“아빠는 그날도 엄마한테 아무런 말 없이 바쁘게 준비만하고, 너처럼 아침도 안 먹고, 갔다 온다는 말만 하고 출근해버렸거든. 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게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야. 아마 아바는 평생… 평생 후회할거야.”

나는 숨을 조금 길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가슴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공기의 길이 사이에 아주 짧은 멈춤이 생겼다. 선생님이 말한 ‘부력’의 간격과, 이모가 말한 ‘마음껏 울기’의 허락이 겹쳤다.

“아빠.”

“응.”

“엄마의… 여백 있잖아요. 그건… 비워진 게 아니라, 비워 둔 거였네요. 우리가 돌아오라고 남겨 둔 자리.”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엄마가 사진에서 여백을 쓰던 것처럼. 의자 하나를 남겨 두고, 언젠가 올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워 두던 것처럼. 엄마의 자리는… ‘없음’이 아니라 ‘남겨 둠’에 가까워.”

우리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대신 같은 방향을 보았다. 케이크의 잘린 면, 초의 검은 심지, 접시에 눌린 크림의 미세한 결. 사라진 것과 남은 것 사이의 경계가 오늘은 얇게 느껴졌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이 주신 편지는… 읽었니?”

“네. 다섯 번째까지는요. P.S.에는… ‘다음 편지는 네가 밤마다 켜는 작은 별 아래에서 기다린다’고… 적혀 있었어요.”

“그랬구나.”

아빠의 얼굴에 아주 작게 안도 같은 빛이 지나갔다.

“여섯 번째 편지는 제 책상 스탠드 아래에 있었어요.”

“엄마가 이벤트를 정말 치밀하게 준비해 뒀구나.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조금 웃음을 지었다.

“아빠.”

“응.”

“편지, 오늘말고 내일 읽어도 엄마가 실망하지 않겠죠?”

아빠가 미소 어린 눈으로 내 눈을 보았다.

“그래. 오늘은 같이만 있자.”

나는 작게 웃었다.

“내일 열어 볼게요.”

아빠의 어깨가 아주 조금 풀렸다. 그 변화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느껴졌다. 말이 끝나자, 집 안 공기가 한 번 얇게 섞였다.

설거지는 함께했다. 그릇이 물 속에서 한 번 잠기고, 다시 올라왔다. 거품이 컵 입구에 얇게 앉았다가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지 않았고, 사라졌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행주로 물기를 닦는 동안, 아빠가 불쑥 말했다.

“엄마가 너 생일날 해 주려고, 한동안 미역을 다른 데보다 더 좋은 걸로만 사더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응. 바람에 잘 말린 거, 향이 좋은 거. 그걸 골라서, 냉동실 한쪽에 따로 넣어두곤 했어. ‘은하 생일 가까워지면 꺼내야지’ 하면서. 그게… 아빠가 자꾸 미역을 사게 된 이유야.”

나는 웃음과 울음의 사이 어딘가에서 숨을 쉬었다.

“그날… 미역국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싸우지만 않았어도.”

“그렇지.”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리 둘 다 알아. 싸움이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걸. 편지도, 미역도, 케이크도… 그 뒤에 남겨 둔 엄마의 손길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잖아.”

나는 젖은 컵을 엎어 말려 두었다. 스테인리스 위로 물방울이 원을 만들고, 그 원이 조금씩 사라졌다.

“아빠, 고마워요.”

“뭘?”

“힘드셨을텐데 저를 지켜 줘서요. 제가 떠오를 때까지… 먼저 떠 있어 줘서요.”

아빠가 잠깐 웃었다. 따뜻한 웃음이었다.

“네가 오늘 이렇게 말해 주니까, 아빠도… 떠오르는 기분이다.”


우리는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을 닦았다. 나무결을 따라 행주가 움직였다. 물기가 번졌다가 사라졌다. 집의 표면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방으로 돌아와 스탠드 받침대를 내려다보았다. 둥근 밑면 아래에서, 종이의 모서리가 아주 얇게 빛을 흘렸다. 나는 받침대를 살짝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내일의 나에게 남겨 둔 자리였다.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오늘 날짜 아래에 짧게 적었다.


— 오늘은 ‘같이 있는’ 날로 충분했다.
— 엄마의 여백 = 비어 있는 것 X, 비워 둔 자리 O.
— 내일, 여섯 번째 편지 읽기.


불을 끄기 전, 거실을 지나가는 아빠의 발소리가 한 번 들렸다. 멈추지 않는 일상의 리듬. 집의 온도는 오늘도 유지되었다. 방을 어둡게 했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창틀 위에서 아주 얇은 빛이 남았다. 나는 속으로 아주 조용히 말했다. ‘내일.’ 그 한 단어로 충분했다.

불을 끄자, 밤은 가라앉지 않았다. 대신, 떠 있었다. 그 위에 등을 눕혔다. 아주 잠깐. 그러나 편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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