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한 줄씩, 앞으로

별빛의 부력-4부

by 시쓰는 충하

“은하야.”

수정이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어제와 같은 손짓이었지만, 오늘은 그 안에 다른 온도가 섞여 있었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수정이는 작은 캔커피를 내 쪽으로 밀었다.

“어제 어머니 편지 읽었지?”

“응.”

“어땠어? 괜찮았어?”

나는 순간, 어떤 단어로 시작해야 하는지 잠깐 멈칫했다. 숨을 한 번 길게 들이마셨다가, 얇게 내쉬고 말했다.

“나… 이제 뭘 하고 싶은지 알겠어. 엄마는 ‘그리운 사람들’ 사진 전시회를 열기 위해 미국에 가려고 했었데. 엄마가 못다한 그 일을 내가 잇고 싶어. 그래서 영어 공부 다시 시작하고, 사진은 영희 이모한테 처음부터 배우려고.”

수정이의 눈동자가 잠깐 커졌다가 바로 부드러워졌다. 입꼬리가 아주 작게 올라갔다.

“진짜 멋있다. 쉬운 일이 아닐텐데!.”

“근데 영어영문학과 가려면, 내 성적으로 가능할까? 지금…”

“가능하게 만들면 되지!”

수정이는 말끝에 힘을 살짝 주었다. 얇았지만 단단했다. 작은 캔커피를 한 모금만 마시고 돌려주었다. 단 향이 혀에 얇게 남았다.

“점심에 담임 선생님께 찾아가 보려고. 미국 다녀오셨잖아. 영어도 가르치시고.”

“그래 가봐. 선생님도 이해하실 거야. 네가 왜 이걸 하려고 하는지.”

종이 울렸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 필통 지퍼가 ‘촤악’ 열리는 소리, 분필을 쥐는 손끝의 사소한 소리들이 겹쳐졌다.칠판 위 분필가루가 공중에 떠오르다 금세 사라지는 걸 보는 동안, 마음속 한가운데서 같은 문장이 계속 올라왔다. 해 보자. 내 속도로. 할 수 있는 만큼만.

“교무실 가기 전에 정리해 보자. 뭐 질문할 거니?”

나는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얇은 종이에 짧게 적었다.


— 지금 등급(최근 모의): 전과목 4~5
— 목표: 2~3등급
— 방식: 매일, 조금씩, 오래

“쉽지는 않겠는데?”

수정이가 웃었다. 쓸 때보다 웃음이 더 오래 남았다. 나는 교무실로 향했다. 특별한 용무가 아닌, 개인적인 일로 교무실을 찾는 것은 2학년이 되고서는 처음이었다. 교무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쪽 프린터에서 종이가 ‘우우우’ 하고 밀려 나왔다. 나는 문고리를 잡기 전에 한 번만 숨을 고르고, 손가락에서 힘을 뺐다. 노크 소리가 얇게 울렸다.

“들어오세요.”

담임 선생님이 고개를 들었다. 빛이 얼굴 한쪽에 길게 앉았다가 조금 이동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잠깐… 상담 가능할까요?”

“지금? 그래, 무슨 일로?”

나는 수첩을 펴서 눈으로 한 번 훑고, 단어를 가볍게 골라 입 밖으로 놓았다.

“진로를… 영어영문 쪽으로 정했습니다. 엄마가 하려던 프로젝트를 이어 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공부를 제대로 못 했고, 지금 모의고사 등급이 전과목 4~5등급대입니다. 현실적으로 목표와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내 말을 끝까지 끊지 않고 들었다. 서랍에서 내 성적표를 꺼내,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중간중간 작은 고개 끄덕임이 있었다.

“일단, 기초는 있어. 독해 속도나 문장 감각이 완전히 없는 편은 아니야. 다만… 꾸준함이 필요해. 그건 본인이 더 잘 알겠지.”

“네.”

“서울 상위권만 봐서는 지금은 무리야. 그렇지만 2~3등급대까지 올리면 선택지가 확 넓어져. 아직 시간은 충분해. 수능까지 1년 넘게 남았으니. 루틴을 만들어서 매일, 조금씩, 꾸준히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전 과목 공부를 천천히 해간다면 성적은 서서히 올라올거야.”

“네. 저는 준비 됐습니다. 무엇이든 해볼게요.”

이상하게,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미소를 작게 지었다.

“좋아. 그 마음을 잃지 않는 게 첫 번째야. 그럼 계획표를 한 번 써 와봐.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보자. 질문 있으면 언제든 들고오고.”

“감사합니다.”

“그래, 이제 비로소 공부할 준비가 된 것 같구나. 선생님도 여러 통로로 은하의 상황을 파악하고는 있었어. 특히 작년 담임 선생님께서 잘 설명해주셨지. 힘내라 은하야. 쌤은 네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정말요? 감사합니다.”

“어머님께서 하시려던 프로젝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거야?”

“아, 엄마가 LA에서 교환 학생으로 공부하던 시절 신세를 졌던 사람들을 찾아가 사진으로 그분들의 모습을 남기고, 전시회를 여실 계획이셨던 것 같아요. 그 일을 제가 완성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렇구나. 선생님도 LA에서 유학했었는데 감회가 새롭네. 네가 직접 미국에 가려고?”

“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여건이 될 때가 오면 가보려고 해요.”

“대단하구나. 선생님이 너였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못했을거야. 나중에 전시회 열게 되면 쌤한테도 꼭 알려줘야 한다. 기다릴거야~”

“네 선생님, 꼭 알려드릴게요.”

교무실을 나오니 복도 끝 창문으로 빛이 길게 들어왔다. 먼지가 빛 안에서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지 않았고, 사라졌다는 사실만 기억했다—그 문장이 오늘따라 덜 슬펐다. 나는 그 문장을 가볍게 접어 주머니에 넣는 마음으로, 남은 하루를 보냈다. 종이 몇 번 울리고, 발자국들이 바닥에 가볍게 찍혔다가 지워졌다.


시간은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지나갔다. 한 달, 두 달, 세 달. 계절은 조용히 바뀌었고, 나는 그 바뀜에 어릴때처럼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대신 체크박스들 사이 작은 ‘V’들이 늘어가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쌓여가는 작은 ‘V’들이, 어느새 길처럼 이어졌다. 그 길 위를 걷다 보니, 모의고사 성적표 속의 숫자도 조금씩 자리를 옮겼다. 아직 불안정했지만, 그래도 ‘가능’이라는 단어가 숫자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수험 생활을 견뎌내고, 수능 시험이 다가왔다. 수능 시험 당일, 시험장의 공기는 난방기의 온기로 가득했다. 마음이 추워서 더 춥게 느껴졌던 그날, 나는 아빠에게 특별히 부탁해 미역국을 점심 도시락으로 싸갔다. 남들은 시험 치는 날 미역국 먹으면 미끄러진다고 했지만, 내게는 미역국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야 누군가 나를 도와줄 것만 같았다. 매 시간 침착하게 확실한 선택들을 이어갔다. 특히 2교시 수학 영역 마지막 주관식 문제는 솔직히 말해 행운 그 자체였다. 그 행운도 지난 1년의 ‘노력’이었겠지. 하지만 답을 답지에 옮기던 그때 나는, 엄마가 나를 도왔다고 생각했다. 내 옆에서 ‘잘하고 있다.’는 눈빛과 함께.

받아든 수능 성적표에는 내가 목표로 삼았던 성적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고2 담임 선생님의 예언대로 선택지는 실제로 넓어졌고, 나는 내가 원하는 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사실, 내게 대학은 큰 고민이 아니었다. 어느 대학이든 영어영문학과면 좋았으니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 중에서 경제적인 면까지 고려했을때 가장 나은 곳은 경북대 영어영문학과였다.


2015년 3월. 이 교정에서 맞는 두 번째 봄이 찾아왔다. 차갑지만 따스한 바람은 벚나무의 새순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일청담 물 위에 빛이 부서졌다. 햇빛이 물결과 만나 더 얇아질 때, 나는 짧은 시간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었다. 강의와 강의 사이 90분. 가방 안에는 영문학개론 책과 얇은 단어장, 그리고 작아진 카메라가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은하야!”

수정이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국어교육과 과잠을 입고,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대충 묶은 모습. 숨이 조금 가빴다.

“여기서 도시락 먹자.”

우리는 일청담 가에 놓인 긴 벤치에 앉았다. 도시락 뚜껑을 여는 소리가 새내기들의 마음처럼 경쾌했다. 김밥의 단면이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당근, 오이, 단무지, 계란. 내가 만든 도시락은 아빠의 손끝을 닮아서 항상 모서리가 반듯했고, 수정이는 그걸 알면서도 매번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와, 또 반듯하다. 넌 진짜.”

“아빠한테 배웠지 뭐.”

수정이가 입에 김밥을 하나 넣고 물었다. 나는 물병 뚜껑을 돌렸다. ‘딸칵.’ 사소한 소리가 물 위로 둥글게 퍼졌다.

“교환학생 프로그램… 알아봤는데, 길게는 어려워. 비용이 만만치 않더라. 그래서 이번 여름방학에 LA에 2주 동안만 다녀오려고. 엄마 노트에 있는 사람들 중 몇 분이라도 만나서 ‘고마워요’라고 말하고 사진으로 기록해 오고 싶어.”

“드디어 가는구나. 혼자서 가?”

“아빠랑 가는 것도 생각했는데, 일정이 안 맞아. 학교 일 때문에 힘들다고 하셔서. 그래서… 혼자 가려고.”

수정이는 젓가락을 잠깐 내려놓고, 내 눈을 똑바로 봤다. 바람이 옆머리를 아주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괜찮다면… 나도 같이 가도 돼?”

나는 당연한 반응처럼 ‘비용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렸지만, 입으로는 바로 내지 않았다. 수정이는 내 표정을 읽고 먼저 덧붙였다.

“나, 실은 고등학교 때부터 조금씩 모았어. 용돈, 알바비에서… 절친이랑 가는 첫 해외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착실히 모았지.”

물 위로 지나간 작은 파문이 둥글게 퍼졌다가, 다시 사라졌다. ‘같이’라는 단어가 그 파문 안에서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떠밀려왔다.

“근데… 진짜 괜찮아? 돈이… 만만치 않을 텐데.”

“알아. 그래도 괜찮아. 그리고… 너 혼자 가게 두고 싶지 않아. 거긴 네가 ‘여백’을 채우러 가는 곳이잖아. 영희 이모네 카페에 네가 나 데려갔듯이 이번에도 데려가줘!”

수정이는 웃었다. 그 웃음엔 언제나 나를 위한 마음이 묻어 있었다. 나는 작은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고마워. 진짜. 그러면… 곧 계획 짜자. 일정, 항공, 숙소, 들러야 할 곳들. 엄마 노트에 적힌 사람들을 같이 찾아가 보자.”

“좋아. 오늘 저녁에 전화로 1차 회의하는 거다! 항공권은 비교 사이트 몇 군데 내가 먼저 훑어 볼게.”

“나는 엄마 노트 스캔하고, 주소랑 이메일 정리해 볼게.”

우리는 젓가락을 나란히 눕혔다. ‘나란히’라는 말의 모양이 오늘따라 더 분명했다. 일청담 물 위 빛이 다시 한 번 부서졌다. 바람이 책장 가장자리를 가볍게 넘겼다.

수업 시간이 다 되어 일어나는 길에, 수정이가 뒤에서 내 어깨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은하야.”

“응?”

“너, 많이 컸다.”

나는 웃었고, 고개를 조금만 저었다.

“아니야.”

“응. 맞아.”

수정이는 먼저 강의실 방향으로 뛰었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인문대 강의동의 오래된 계단을 올라 강의실 문을 ‘찰칵’ 하고 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치고, 오늘 해야 할 아주 작은 목록을 가장자리에 적었다.


— 엄마 노트 스캔(파란 끈)
— 항공권 견적 비교(편도/왕복, 날짜 유동성)
— 연락할 주소 3곳 우선순위(홈스테이, 국제학생 사무실, 첫 친구)

샤프펜 끝이 종이 위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멈춤은 끝이 아니었다. 다음을 위한 간격이었다. 옆자리 학생의 펜이 ‘사각사각’ 움직였다.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며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이름과 이름 사이의 짧은 침묵이 여백처럼 느껴졌다. ‘돌아오라고 남겨 둔 자리’라는 엄마의 말이, 강의 시작 벨소리와 함께 아주 얇게 떠올랐다가, 나를 지나 갔다.

저녁이 되어, 방에 들어와 노트북을 켜자 냉각팬이 낮게 돌아갔다. 복합기로 엄마의 작은 노트를 장마다 스캔했다. 파란 끈의 그림자가 화면 구석에 얇게 앉았다. ‘Mr. & Mrs. Harris’, ‘Ava’, ‘Jared’—글자들이 화면 속에서도 온도를 잃지 않았다. 폴더 이름을 ‘그리운 사람들_준비’라고 적었다. 엔터를 치는 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았다. 힘을 덜어야 나아갈 수 있다.

전화가 울렸다. 수정이었다.

“접속!”

“빨리도 왔네~”

우리는 각자 오늘의 작은 목록 표를 펼쳐놓고, 칸을 하나씩 채웠다. 날짜 후보, 항공사 비교, 경유 시간, 숙소 위치, 교통편. 하나를 채우고 나면, 나란히 짧은 ‘V’를 그었다. 그 ‘V’들이 줄을 만들었다. 줄은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우리는 같은 속도로 걷지 않아도, 같은 방향으로 갔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노트를 덮었다. 표지 위에 작게 남은 손바닥의 열이, 종이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엄마가 남겨둔 자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16. 그리운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