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온전한 존재이기 위해

별빛의 부력-4부

by 시쓰는 충하

비행기편은 수정이와 함께 예약을 끝냈다. 화면에 ‘ICN → LAX’가 또렷했고, 미국에서 예정된 체류 날짜는 7월 7일부터 7월 21일까지였다. 파란 확인 버튼을 누르는 순간 짧은 진동이 손바닥을 지나갔다. 마우스 포인터가 파란색에서 회색으로 바뀌자, 메일함에 자동으로 ‘예약 완료’라는 제목이 하나 더 생겼다. 제목 옆 작은 별표를 눌렀다.

지도를 확대해 숙소 위치를 확인했다. 직선으로 뻗은 회색 도로 위에 사각형 블록들이 줄을 맞춰 서 있었고, 코리안 타운 한 가운데에서 조금 벗어난 모서리에 작은 마당이 있었다. 위성 사진으로 보면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 두 그루가 옅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울타리 그림자는 오후의 각도로 길게 누워 있었다. 숙소 이름 끝에 ‘guesthouse’라는 단어가 얌전히 걸려 있고, 사진 속 현관 앞에는 신발 두 켤레가 나란히 있었다.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사진이었다.
나는 예약 확인서를 프린트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바탕화면 폴더에 ‘LA_여정’이라는 이름을 만들고, 그 안에 ‘항공’, ‘숙소’, ‘연락’ 세 폴더를 나눠 넣었다. 메일에서 첨부파일을 저장하는 동안 프로그레스 바가 천천히 차올랐다. 24%, 57%, 100%. 숫자들이 고르게 늘어나는 걸 지켜보는 일만으로도 마음이 가지런해졌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식탁 위에 컵을 하나 올려두고, 물을 절반쯤 채웠다. 아빠가 싱크대 옆에서 행주를 짜고 있었다. 물줄기가 손끝에서 얇게 흘러내려 스테인리스 표면에 둥근 자국을 만들었다가 옅어졌다. ‘톡, 톡.’ 두 번 떨어지는 사이에 공기가 아주 조금씩 바뀌었다.

“숙소는… 그 집으로 했니?”

아빠가 물었다.

“네. 아빠가 예전에 추천해 줬던 그곳으로요.”

아빠 눈이 잠깐 먼 데를 다녀왔다. 눈꼬리 근처가 아주 얇게 접혔다가 펴졌다.

“엄마랑 미국 갔을 때 거기 묵었었지. 내가 호텔 가자고 몇 번 말했는데, 엄마가 ‘사람 만나는 게 더 좋아’ 그러더라. 새로운 사람들하고 얘기 나누는 재미가 크다고. 경제적인 생각도 있었을 거고.”

아빠가 웃었다. “그 집 주인 부부가 정말 따뜻했어. 늦게 들어가도 현관등 켜 놓고 기다려 주고, 아침엔 커피 먼저 내주고. 많이 바쁘실 텐데도 꼭 ‘오늘 계획 있어요?’ 하고 물어보고. 아마 기억 못 하실 수도 있겠지만… 네가 가 보면 좋겠다.”

“사진만 봐도 집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현관 앞 나무 냄새 같은 거요.”

“맞아, 그래서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숙소지. 수정이랑 같이 간다며?”

“네. 근데… 많이 놀랐어요. 수정이가 고등학생 때부터, 저랑 미국 같이 가보려고 조금씩 돈을 모아 왔다는게.”

아빠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고개 끄덕임이 식탁 위 젓가락을 아주 얇게 흔들었다.

“수정이, 정말 든든하다. 나중에 임용 준비하든, 학교 들어가서 일 시작하든, 도움이 필요하면 아빠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준다고 전해줘.”

“정말요? 고마워요! 수정이도 좋아하겠다.”

“여행 가기 전에 수정이 데리고 와. 저녁 한 번 같이 먹자. 날짜는 네가 잡아.”

“네. 연락해 볼게요.”

말이 끝나자 부엌 시계가 한 번 ‘딸칵’ 하고 울렸다. 식탁 위 젓가락을 내 쪽으로 곧게 맞추었다.

방으로 돌아와 스탠드 받침대를 살짝 들어 올렸다. 둥근 금속의 그림자가 타원으로 길어져 책상 가장자리를 넘어 벽지로 흘렀다. 그 아래에서 크림색 봉투 여섯 장이 얌전히 있었다. 별 스티커의 반짝임은 항상 똑같은 각도였다. 지난 몇 년간 그랬듯 한 장씩 꺼내 순서대로 펼쳤다.

여섯 장을 모두 펼쳐 책상 위에 겹치듯 나란히 두었다. 종이의 크기는 같았지만, 스티커의 반짝임은 약간씩 다른 길로 번졌다. 그 길들이 책상 위에서 서로 엇갈리며 작은 ‘십’자를 만들었다. 나는 손바닥을 종이 위에 올렸다가 천천히 떼었다. 손바닥에 종이의 온도가 아주 얇게 남았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은 편지를 보며 엄마의 마음을 생각해보곤 한다.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을 두고, 긴 시간을 비워 미국으로 향해야 겠다고 결정한 그때의 마음. 예전의 나는 그 결정을 원망으로만 받아들였다. ‘왜 지금이야?’라는 문장이 마음속에서 힘을 쓰던 시절. 지금의 나는 그 결정을 설렘으로도 받아들인다. ‘엄마’라는 역할에만 묶이지 않고,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기억을 찾아가려 했구나. 어릴 적 신세를 졌던 사람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때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사진으로 전하려 했구나. 그 길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그 두근거림을 나에게도 나누고 싶어 했을까? 그런 생각이 뒤이어 왔다. 고마웠다. 엄마가 은하 엄마가 아닌, 세상 속에 한 사람으로서 살아보려고 노력했다는 그 모습 자체가 고마웠다.
‘엄마라는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가려고 했던 사람.’ 나는 그 문장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따라 그었다. 힘을 덜자 물이 등을 받쳐 올렸다. 나는 이제 슬픔 위에 온전히 떠 있다고, 아주 조용히 생각했다.

노트북을 열어 ‘LA_여정’ 폴더를 다시 확인했다. ‘항공’ 폴더 안에 e-티켓 PDF가 놓여 있었고, ‘숙소’에는 위치 안내와 체크인 안내 메일이 저장되어 있었다. ‘연락’ 폴더에는 엄마의 파란 끈 노트에서 옮겨 적은 이름 세 개가 상단에 있었다. Harris, Ava, Jared. 각 파일 제목 옆에 작은 별표를 하나씩 붙였다.
캘린더 앱을 열어 날짜에 색을 칠했다. 7/7, 7/21. 색이 들어간 칸이 두 개뿐인데, 그 사이에 길이 생겼다. 윤곽이 얇고 길었다. 나는 길 위에 작은 점을 몇 개 더 찍었다. ‘현지 유심’, ‘카메라 청소’, ‘SD카드 백업’, ‘전시 구성 구상’. 점들이 점선을 만들었다. 점선을 보고 있자니, 나도 점처럼 가볍게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카메라 가방을 열어 장비를 점검했다. 바디, 렌즈, 배터리 두 개, 충전기, 카드리더, 64GB SD카드 세 장, 미세먼지 브로어, 마이크로 화이버 천. 체크박스를 그려 하나씩 ‘V’를 넣었다. ‘V’가 들어갈 때마다 종이가 아주 얇게 들어갔다가 올라왔다. 오르내림이 호흡과 맞았다. 들숨 하나—날숨 셋. 아니, 오늘은 굳이 세지 않기로 했다. 굳이 세지 않아도 숨은 들어오고 나갔다. 들어왔다가 나가면서 자리를 고르게 만들었다.


유리문을 열자, 카페의 ‘딩동’ 소리가 언제나처럼 발목을 감싸고 지나갔다. 원두 냄새가 얇게 퍼졌다. 카운터 위 유리돔 안, 식혀 둔 케이크의 표면에 길게 칼무늬가 남아 있었다. 오후의 빛이 유리를 스치고 갔다가, 테이블 모서리에 가볍게 눕는 걸 보았다.

“왔네~”

영희 이모가 손을 들었다. 검지와 엄지가 만드는 작은 원 사이로 빛이 한 번 지나갔다.

“얼굴이 밝아졌다?”

“비행기표도 숙소도 예약 다 끝냈거든요! 7월 7일부터 21일까지.”

“잘했다.”

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끄덕임이 귀걸이를 아주 얇게 흔들었다.

“자, 오늘도 카메라부터 보자.”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건넸다. 지난 4년 동안 배운 것들이 손의 자세에 묻어 있었다. 그립을 잡는 손가락의 순서, 엄지의 안착 위치, 검지가 셔터를 기다리는 모양. 전원을 켜자 작은 불이 들어왔다. 이모가 그립을 한 번 보고, 엄지와 검지 사이 간격을 아주 조금 고쳐 잡게 했다.

“노출은 요즘 감으로 맞춘다더니, 감이 좋아졌네.”

이모가 웃었다.

“은하야, 있는 걸 잘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포토그래퍼는 말을 거는 사람이야. 카메라로. 누군가 사진을 볼 때 그 사람에게 건네고 싶은 문장이 있어야 해.”

“네. 미국에 가면… 엄마 흔적이 남아 있는 풍경, 엄마가 그리워했던 사람들을 제 방식으로 담아 보려구요.”

“그렇게 해. 프레임 안에 들어온 것들뿐만 아니라, 프레임 바깥의 여백도 같이 활용해봐. 보는 사람이 자기 말을 넣을 자리를 남겨 두는 거지.”

이모가 창가를 가리켰다.

“오늘은 빛이 오른쪽에서 떨어지네. 역광에서 사람 세울 때, 어깨선이 배경에서 분리되게 반 발만 틀어 줘. 그림자와 인물이 겹치지 않게. 네가 이미 아는 거지만, 오늘 한번 더 연습해보자.”

창가로 걸어가 머그컵 하나와 유리병을 프레임에 넣었다. 배경의 나무결이 사선으로 걸려 있었다. ‘찰칵.’ 셔터 소리가 나무결을 따라 얇게 흘렀다. 컵의 곡선과 유리병의 직선이 겹치는 지점에서 초점이 정확히 붙었다. 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보다 더 낫네. 급하게 하지 않는 게 좋아. 사진도 호흡이 필요하거든.”

“네, 이모. 그런데 전시회는…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지 못했는데 이제 곧 미국에 갈 생각을 하니 조금 막막하게 느껴져요. 어디서 언제 하는게 좋을지 모르겠네요..”

“여기서 해~”

이모가 카페 벽을 가리켰다. 흰 벽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낮은 그림자가 모서리에 얇게 붙어 있었다.

“이 벽에 액자를 걸자. 나무 액자. 너무 번쩍거리지 않는 걸로. 문에서 들어와 한 걸음, 두 걸음—관람객이 걷는 속도에 맞춰 호흡이 달라지게 걸면 돼. 사람들을 초대하고. 커피 한 잔씩 주고, 작가와 대화도 나누고..”

“정말요?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내 목소리도 빛을 조금 먹었다.

“전시회 제목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그래. 제목은 마지막에 지어도 돼. 때로는 사진이 제목을 꺼내서 들고 오기도 하니까.”

이모가 웃었다.

“미국 갔다 와서 한 달쯤 숨 돌리고 사진들을 인화하자.”

이모는 카운터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임시 도면을 그렸다. 입구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 첫 벽은 인물, 다음 벽은 장소, 마지막 벽은 물건. ‘사람-장소-물건’이라는 단순한 배열이지만, 걸어가는 사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배열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는 걸, 지난 4년 동안 배웠다.

카메라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어깨끈이 손바닥에 얇은 선을 남겼다. 카페 문을 밀자 ‘딩동’ 소리가 다시 울렸다. 바깥 공기가 팔꿈치를 스쳤다.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에 금속이 아주 작게 맞부딪혔다. ‘딸칵.’ 그 소리가 등 뒤에서 작게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의 하얀 화살표를 밟았다. 방향이 단순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단순함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가로등 아래 응달 쪽 나뭇잎들이 같은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가 돌아왔다. 바람은 멈추었고, 차 소리는 멀리서 낮게 흘렀다. 현관문을 열어 신발을 가지런히 맞추고 들어섰다. 거실 공기는 고요했다. 책상 앞에 앉아 공책을 펼쳤다. 공책 가장자리에 작은 사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한 줄을 덧붙였다.


여백 = 돌아오라고 남겨 둔 자리.


벽을 보았다. 액자가 아직 걸리지 않은 벽.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전혀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앉히려고 비워 둔 의자처럼, 누군가를 맞으려고 남겨 둔 자리처럼.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서 e-티켓을 다시 꺼내 보았다. QR코드가 얌전히 정렬해 있었다. 검은 칸과 흰 칸의 간격이 정확했다. 간격이 정확할수록 읽히는 속도가 빨라진다—그 간단한 진실을 손끝으로 느끼며, 종이를 다시 파일에 넣었다.

서랍에서 SD카드를 하나 더 꺼내 라벨에 ‘LA01’이라고 적었다. 얇은 펜 끝이 플라스틱 표면 위에서 가볍게 걸렸다. 또 하나에는 ‘LA02’, 마지막에는 ‘LA_BACKUP’. 글자를 쓰는 동안에도 마음이 고르게 정리됐다. 정리는 중요했다. 정리가 되어 있으면 예측 못한 상황이 닥쳐 와도,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으니.

노트북을 덮기 직전, 받은 편지함의 제목을 한 번 더 훑었다. ‘예약 완료’, ‘체크인 안내’, ‘여정 확인’. 세 줄이 다른 폴더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여정’ 폴더로 드래그했다. 세 줄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이다가, 폴더가 열리는 순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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