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륙

별빛의 부력-4부

by 시쓰는 충하

저녁 준비는 천천히 시작됐다. 쌀 씻는 소리, 물 넘기는 소리, 칼이 도마 위에서 리듬을 타는 소리. 부엌의 등은 유리갓을 통과해 식탁 위에 동그란 빛을 만들었다. 나는 그 빛의 가장자리를 한 번 손가락으로 훑었다. 얇은 먼지가 손끝에 붙었다가 금세 사라졌다.

현관 초인종이 ‘딩동’ 울렸다. 문을 열자 수정이가 두 손에 과일 바구니와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봉투 꼭대기에는 얇은 끈이 매듭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님께 드리려구 사왔어! 차랑 과일 조금.”
“뭘 이런 걸 사와~ 들어와.”

수정이가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는 동안, 아빠가 부엌 문간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왔구나, 수정아. 어서 오렴. 오늘 메뉴는 간단하다—두부조림, 멸치볶음, 달걀장조림, 그리고 된장찌개. 여행 전날은 속 편한 게 최고다.”

수정이가 양손을 번쩍 들며 웃었다.

“내일 떠나기 전에 메뉴로 최곤데요!”

식탁을 차리는 동안 젓가락이 ‘딸칵’ 소리와 함께 맞춰졌고, 나는 접시를 내 쪽으로 정확히 정렬했다. 맞춰진 선을 보며 숨이 고르게 들어오고 나갔다. 음식을 다 차리고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하며 아빠는 먼저 여정을 확인했다.

“내일부터 20일까지, 인천 경유해서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코리안 타운 그 민박집. 맞지?”
“네. 예약 확인 메일도 다시 확인했어요.”
“은하에게는 이야기 했었는데 거기가 은하 엄마랑 갔던 곳이야. 나는 진심으로 호텔 가자고 했는데, 엄마가 사람 만나는 게 더 좋다고 그랬지. 그때는 돈도 별로 없을 때라 아마 돈 아끼려고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해.”

나는 웃었다.

“엄마답다.”

“아직 주인 부부가 그대로 운영하시는 지는 모르겠네. 친절하고 많이 챙겨주시는 분들이니 너희도 따뜻하게 맞아주실 거야.”
수정이가 내 손바닥을 ‘톡’ 치며 맞장구쳤다.

“너무 기대돼요!”

된장찌개의 김이 소리 없이 올라와 등 쪽의 굳은 힘을 조금씩 풀었다. 두부조림의 간장이 빛을 얇게 반사하고 있었다. 음식의 모서리들이 반듯할수록 마음도 반듯해졌다.

“전시 구상은 어디까지 했니?”

아빠가 물었다. 나는 영희 이모네 카페 벽을 떠올렸다. 흰 벽, 낮은 그림자, 나무 액자.

“안그래도 영희 이모가 이모네 카페에서 하는게 어떻냐고 제안했었어요. 카페 벽에 사진을 액자로 거는 걸로요. 사진은 사람—장소—물건 순서로 걸어 보자 하셨어요. 오프닝은 소박하게 하고, 지인들 위주로 초대해서 이모가 커피 한 잔 씩 제공하시겠데요.”

수정이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나… 포스터랑 리플렛 맡아도 돼? 전시 소개, 동선 간단 안내, 오시는 길 등등 카페 톤이랑 전시회 내용의 맥락에 맞춰서 만들어 볼게!”

“정말? 너무 좋지.”
아빠가 웃었다.

“딸래미가 하나 더 늘었구나. 든든하다.”

그때 수정이가 종이봉투에서 얇은 A5 노트를 꺼냈다. 표지 위에 작은 별이 박혀 있었다.

“전시회 임시 기획노트로 쓸라고 사왔어. 오늘 회의록 여기 적어둘게.”

나는 펜을 건넸다. 펜이 종이 위로 ‘사각사각’ 움직였다. 대화는 자연스레 현황 점검으로 이어졌다.

“엄마 노트에 있던 하리스 씨 댁 이메일 하나가 반송됐어.”

내가 말했다.

“주소가 바뀐 거겠네.”

수정이는 바로 메모했다.
“국제학생처, 동문회, 페이스북 그룹, 한인 커뮤니티에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활용해보면 될거야. 엄마말고도 많은 학생들이 다녀간 집일테니.”
아빠가 덧붙였다.

“LA의 코리안 타운 커뮤니티 게시판, 교회 게시판도 종종 도움이 된다. 다만 개인정보는 조심하고, 연락이 닿으면 반드시 공적인 계정으로 다시 확인해보렴. 혹시 모를 변수까지도 대비해 놓고.”

나는 체크박스를 그리고 하나씩 작은 ‘V’를 그렸다. 그 ‘V’가 종이에 들어갔다가 올라오는 시간이, 내 들숨과 날숨과 나란히 걸었다.

“안전 계획도 정리해볼까?”

아빠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단단했다.

“숙소 귀가 시간은 열한 시 이전을 권장한대. 미국이니까 이해하지? 위치는 항상 한 명 이상의 사람과 공유하는게 좋겠네! 민박집, 아빠, 그리고 영희 이모 중에 누구라도 좋을거야. 그리고 비상연락망 중에서 한국 영사관, 여행자보험 콜센터, 숙소 연락처는 꼭 저장해두고! 유심은 현지 공항에서 바로 개통해~ 그리고 현금·카드는 분산해서 들고 다니고. 하루 예산과 비상 예산 따로.”

수정이가 중요 내용 옆에 별표를 붙였다. 별 하나마다 빛이 종이에서 조금 더 반사되었다.

“귀국 전날에는 촬영본 정리하고 짐 싸는 시간으로 활용해봐. 너무 급하게 하면 실수로 두고 오는 것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백업은 매일해주고~”

아빠의 따뜻한 걱정과 함께 우리는 식사를 계속했다. 멸치볶음의 달고 짠 맛이 혀에서 사라질 때마다 다음 이야기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대화의 결은 촘촘하지만 빡빡하지 않았다. 여유가 있는 촘촘함. 나는 그런 조합을 좋아했다.

“포스터 톤은 어떻게 하지?”

수정이가 묻자, 나는 엄마의 편지 종이를 떠올렸다. 크림색, 둥근 획, 단정한 받침.

“무광 크림빛 바탕에 얇은 세리프체로 하자. 큰 타이포 대신 여백을 살리고, 사진은 한 장만 넣는거야.”
“구체적인데? 좋아!”

수정이가 노트에 빠르게 스케치했다.

“리플렛은 3단 접지로 간단히 만들자. ‘사람—장소—물건’ 섹션 소개와 맵. QR로 기획 설명을 제공하는 것도 좋겠어.”

아빠는 그 스케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등 뒤 주방에서 보리차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났다. 냄비 뚜껑의 작은 구멍으로 김이 실처럼 뽑혔다. 아빠가 잔 세 개에 차를 따랐다. 따를 때마다 표면에 얇은 원이 번지고, 금세 잦아들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둘을 바라보았다. 빛이 아빠의 눈가의 주름을 얇게 밝혔고, 수정이의 매듭진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작게 흔들렸다.

“고마워.”

말이 나오기까지 숨이 반 템포 길어졌다.

“엄마가 못다 한 걸… 내가 하겠다고 말할 수 있게, 둘 다 버팀목이 돼 줘서. 내가 무서울 때 덜 무섭게, 큰 소리를 내지 않고도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마워.”

아빠가 잔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았다는 게 아빠는 제일 고맙다. 사람은 하고 싶은 걸 찾으면 달라지는 것 같아.”
수정이는 어깨로 내 팔을 살짝 쳤다.

“나는 네가 덜 무서울 수 있게 옆에 있을 뿐. 같이 가면 어떤 길도 갈 수 있을거야.”

우리는 보리차로 조용히 잔을 맞댔다. ‘딸칵’—잔 아래 유리받침이 가볍게 부딪혔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들이 있었다. 식탁 모서리의 빈 자리가 오늘따라 허전하지 않았다. 돌아오라고 남겨 둔 자리—그 뜻을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빠가 문득 수정을 바라봤다.

“수정이는, 졸업하면 임용 시험 칠거니?”
“네, 바로 임용 시험 준비하려구요. 아직은 다른 길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그렇구나. 수정아, 네가 임용을 준비하겠다면, 아저씨가 도울 수 있는 건 다 도와줄게. 관련 정보나 면접 연습, 필요한 책. 뭐든 말만 해.”

수정이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크게 그렸다.

“증거 확보! 저 진짜 말씀드릴거에요!”
우리는 웃었다. 웃음 뒤의 침묵은 가벼웠다. 찻잔의 온기가 손바닥으로 길게 스며들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우리는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배낭을 꺼내 바닥에 펼쳐두고, 목록을 한 줄씩 읽었다.

“여권, 여권 사본, 항공권, 숙소 바우처, 여행자보험 증서, 국제학생처 연락망, 지도, 충전기, 멀티탭, 변환어댑터, 카메라, 렌즈, 배터리, SD카드 3, 백업 드라이브, 세면도구, 상비약, 얇은 니트, 바람막이, 모자, 편한 운동화.”

체크박스에 ‘V’를 그릴 때마다 수정이는 옆에서 별표 하나를 붙였다. 별이 늘수록 마음의 표면이 평평해졌다. 아빠는 배낭의 어깨끈을 한 번 눌러 보며 말했다.

“무게는 이 정도면 괜찮겠네. 지퍼에는 작은 고리를 채워서 꼭 달고 다니렴!”

출발 전 날 밤은 그렇게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공기는 선선했다. 대구 공항으로 가는 길에, 하늘은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 않았다. 회색과 푸른색 사이 어딘가에서 도시가 기지개를 켰다. 차 창문에는 팔공산을 배경으로 한 흰 김이 얇게 맺혔다. 아빠가 운전대를 잡은 손을 한 번 바꾸며 말했다.

“인천에서 환승하는 시간, 너무 짧지 않게 잡았지?”
“네. 여유 있어요. 표도 다 확인했어요.”
수정이가 뒷좌석에서 손거울을 덮었다.

“여권, 지갑, 핸드폰. 삼종세트 확인 완료.”

공항 입구에 가까워지자, 유리 외벽이 아침빛을 받아 아주 얇게 반짝였다.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따뜻한 공기가 우리를 감쌌다. 바닥의 방향 표시가 친절했다. 나는 바퀴 소리가 덜 나는 쪽으로 가방을 살짝 기울였다. 작은 소리가 타일 사이를 지나갔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직원이 여권을 넘겨받았다. 키보드 소리, 프린터 소리. 종이가 배출되며 ‘우우—’ 하고 나왔다. 보딩패스의 잉크가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아 촉촉한 기운이 있었다. 직원이 미소를 짓고 말했다.

“인천 경유하셔서 로스앤젤레스까지 가시네요. 좋은 여행 되세요.”

보안검색대를 지나기 전, 아빠에게 안길 수 있는 시간이 남았다. 아빠는 내 어깨끈을 한 번 잡아 당겨 길이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그 동작만으로도 충분했다.

“도착하면 연락해. 큰일 아니더라도, 사진 한 장씩 보내고. 길 잃으면 멈추고, 물 마시고, 지도 다시 보고. 알겠지?”
“네.”
“수정아, 네가 좀 더 말 걸어줘. 은하는 긴장하면 말 줄어드는 거 알지?”
“네, 아저씨. 제가 수다 담당이에요.”

우리는 셋이서 잠깐 조용히 섰다. 말 대신 숨을 맞췄다. 들숨 하나—날숨 둘—멈춤의 아주 짧은 간격. 그 간격 안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응.”
“고마워. 다녀올게. 잘.”

아빠의 눈이 잠깐 젖었다가 금세 맑아졌다. 그는 손등으로 눈꼬리를 한번 쓸며 웃었다.

“그래. 잘. 가서, 보고, 듣고, 찍고, 무사히 돌아와라.”

우리는 보안검색대로 향했다. 회전문을 지나기 직전,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휴대폰을 꺼냈다. 유리 너머 주기장의 흰 동체에 햇빛이 걸렸다. 나는 카메라 앱을 열어 구도를 잡았다. 왼쪽 아래에 유도등, 오른쪽 위에 동체의 곡선. ‘찰칵.’ 이번 여정의 첫 사진.

사진을 확인하니, 하얀 비행기와 하늘의 옅은 파랑 사이에 가늘게 선이 생겨 있었다. 그 선은 엄마의 마지막 바람을 향한 출발선이었다. 나는 저장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잠갔다. 손바닥의 열이 유리 표면으로 아주 얇게 옮겨졌다.

수정이가 내 팔을 툭 건드렸다.

“가자.어머니 꿈 곁으로.”
“응. 가자.”

보안검색대를 지나며 트레이에 배낭과 카메라를 올렸다. 금속탐지기의 얇은 울림이 등 뒤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게이트 앞 대기석에 앉자, 방송이 흘렀다. ‘인천공항행…’이라는 단어가 유리 벽을 타고 멀리까지 번졌다. 우리는 서로를 한번 보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탑승이 시작되었다. 줄이 천천히 앞으로 이동했다. 보딩패스를 내밀 때, 종이와 종이가 맞닿는 소리가 났다. 나는 오른발을 먼저 움직였다. 문턱을 넘는 순간, 좁은 통로의 공기가 바뀌었다. 비행기 내부의 조명이 고르게 등에 내려앉았다.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채웠다. 금속이 ‘찰칵’ 하고 잠겼다. 나는 창문 밖을 보았다. 활주로의 굵은 선, 바람 방향을 알려주는 깃발. 하늘은 더 이상 흐리지 않았다. 얇고 투명한 파랑이, 동체의 흰색에 얌전히 기대어 있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로 천천히 나아갔다. 방향을 틀 때, 빛이 창틀을 따라 미세하게 이동했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내 마음의 박자와 엔진의 박자가 같은 방향으로 맞춰졌다. 출발선이, 진짜로, 코앞에 왔다. 나는 눈을 깜박이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 출발할게.”

그리고, 비행기는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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