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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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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Oct 16. 2016

#2. 뜻밖의 재회 (1)

2014.08.27.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행 싱가포르 항공의 비행기 내부에는 조용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거대한 항공기 내의 수백 개의 좌석에 수십 명의 승객이 드문드문 앉아있었고, 다섯 개의 의자가 연결된 중앙 좌석에는 젊은이 한 명이 침대 인양 누워서 몇 시간째 자고 있었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충분히 밝아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 2시 10분에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에서 떠오른 비행기는 10시간 넘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승객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잠시 후에 요하네스버그 OR 탐보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기내 방송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는 요하네스버그에 착륙했다. 몇 명의 승객이 내리고 현지 직원들이 기내로 들어와 간단히 청소를 한 뒤에 사라졌다.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비행기는 다시 활주로로 들어섰다.

 이 비행기는 케이프타운까지 가는 비행기였다.


 산산한 바람에 이질적인 안개가 섞여있었다. 조용한 오전의 냄새와 신선한 이국의 향기가 결코 산뜻하다고는 할 수 없는 미묘한 형태로 코를 간질였다. 공항은 한산했으며 적응되지 않는 두근거림이 한껏 심장을 농락하고 있었다. 입국 용지를 작성하고 입국심사대에서 여권에 도장을 받았다.

 2014년 8월 27일 수요일, 현지 시각 오전 9시 20분. 케이프타운에 발을 디뎠다.


 “택시, 택시! 택시?”

 나는 분명 그들을 처음 보는데, 나를 ‘택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다지도 많은 것을 보면 아마 내 이름은 전생에 ‘택시’였던 모양이다. 수중에 한화 10,000원 수준의 100랜드 지폐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잔돈도 마련할 겸 아침식사도 해결할 겸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자마자 햄버거 가게 ‘스티어’에서 레이브 버거 세트를 시켜먹은 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담은 반응을 보여주기로 결심하고 실천했다.

 즉, 모르는 체 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들리지 않는 외침을 온몸으로 느끼며 버스 매표소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시내까지 얼마죠?”

 “115.”

 대답 시원하군. 나도 시원한 반응을 보여줘야지. 가장 마지막에 나를 불렀던 아저씨가 120랜드라고 했거든.

 곧바로 뒤로 돌아 내가 최대한의 경의를 보여줬던 마지막 사람에게 다가갔다.

 “갑시다. 롱 스트리트요.”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택시 와이퍼는 흔들흔들, 앞 유리창의 빗물도 흔들흔들, 라디오를 듣는 기사 아저씨의 어깨도 흔들흔들.

 “케이프타운은 처음이오?”

 “아프리카 방문이 처음이에요.”

 “어이쿠, 그렇군. 여긴 뭐 보시려고?”

 “우선은 케이프 포인트와 테이블 마운틴 정도 생각 중이에요.”

 케이프 포인트는 케이프 반도의 맨 끝으로, 희망봉의 바로 옆이었다.

 “음, 좋지, 좋아. 근데 그린 포인트를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바다가 아름답거든.”

 “그런가요. 몰랐던 곳인데, 알겠습니다.”

 이참에 이것저것 정보 좀 알아봐야겠다.

 “추천해 주실만한 괜찮은 곳이 더 있나요?”

 “글쎄, 보통은 케이프 포인트를 많이 가는 편인데 시내에서 거기까지 가는 길에 볼더스 해변이라는 곳이 있어. 아프리카 펭귄이 있는 곳이지. 그리고 캠스 베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물개섬으로 갈 수 있는 배를 타는 곳이 있으니 그곳도 괜찮은 편이지. 뭐, 유명하니까 알겠지만 와인으로 알려진 스텔렌보스를 가보는 것도 좋을 거야.”

 “여행할 때는 렌터카를 많이 이용하는 편인가요?”

 “렌터카를 이용하기도 하고, 택시를 대절하기도 하고, 투어를 이용하기도 하지. 아, 내가 관광 가이드도 하고 있으니 나한테 얘기하면 내가 온종일 데리고 다녀줌세.”

 아저씨는 목에 걸려있는 가이드 자격증을 흔들어 보였다.

 “가격은요?”

 “1,000랜드. 케이프 반도 투어 비용으론 저렴한 편이지.”

 하하, 내가 알아보고 온 거랑 가격이 다른데. 혹시 모르니 번호나 알아두자.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시죠?”

 준비해 온 여행 계획표의 케이프타운 칸에 아저씨의 전화번호를 적고 나니 시내의 모습이 보인다. 오밀조밀한 작은 건물들과 군데군데 솟아있는 높다란 빌딩이 아기자기하게 땅위를 수놓고, 슬슬 개이고 있는 하늘 사이로 빛살이 반짝 시내를 비춘다.

 “케이프타운에 온 것을 환영하네.”


 “언제까지 머무르려고요?”

 “나미비아 비자 나올 때까지 있으려고 하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요즘 보니까 3일이면 되는 것 같던데, 어디 보자.”

 직원인 어니 씨는 책상에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던 종이들 중 하나를 끌어오더니 볼펜으로 요일과 날짜를 적기 시작했다.

 “오늘이 27일 수요일, 혹시 필요한 서류는 다 준비했어요?”

 “아뇨. 지금 막 도착했는데, 이제부터 하려고요.”

 “그러면 오늘 서류 준비해서 내일 신청한다고 하고, 목요일, 금요일, 주말이 끼었구먼? 그럼 다음 월요일, 8월이 31일까지 있던가? 좋아, 9월 1일 월요일에 나올 테니 이날 밤까지 자고 9월 2일에 나미비아로 출발하면 되겠군요.”

 “평일 3박, 주말 3박이라, 여기 있습니다.”

 이곳, ‘휴일 백패커스’는 여러 명이 함께 방을 쓰는 도미토리 기준 평일은 1박에 130랜드, 금요일과 주말은 1박에 150랜드를 받았다. 어니 씨는 내가 건넨 돈을 찬찬히 세고는 옆에 놓인 돈이 든 통에 차곡하게 집어넣었다.

 “그런데 비자 신청할 때 필요한 서류는 다 알고 있어요?”

 “우선 찾아오긴 했는데, 확실한 게 좋으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니 씨는 또 손을 뻗어 어디에선가 종이 하나를 끌어오더니 숫자, 내용을 적어나갔다.

 “우선 나미비아 가는 버스표, 타자로 쳐서 인쇄한 여행 사유서, 비자 신청서, 이건 제가 드리죠. 그리고 나미비아에서 머물 숙소 예약증, 아프리카 나가는 티켓, 여권 사본 사진 2장.”

 순식간에 종이는 다음과 같이 채워졌다.

 「1. 나미비아행 버스표

  2. 여행 사유서

  3. 비자 신청서

  4. 숙소 예약증

  5. 아프리카 나가는 티켓

  6. 여권 사본

  7. 사진 2장」

 “문제 되는 거 있나요?”

 있군요.

 “제가 계속 육로로 이동할 생각이라 아프리카를 나가는 표가 없는데요.”

 “그건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비자 신청할 때 잘 얘기해보세요.”

 응? 그렇게 간단히 넘겨도 되는 거야?

 “그럼 오늘 할 일은 정해졌네요. 나미비아행 버스표 사기. 여행 사유서는 손으로 쓰면 안 되고 컴퓨터로 뽑아야 하는데 그냥 경치고 좋고 정말로 아름다운 너희 나라에 꼭 가고 싶다, 정도로만 쓰면 되니까 크게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리고 밖에서 휴대전화는 안 꺼내는 게 좋아요. 특히 귀에 대고 통화하듯 하고 있으면 홱 낚아채 가는 일도 있으니까 주의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아, 혹시 샤워부터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장시간 비행으로 초췌해진 몰골부터 다듬은 뒤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배낭은 숙소에 놓고 일기, 사진기, 한국에 입국하기까지의 전체 여행 계획서, 여권 사본, 여권용 사진, 휴대전화 예비 배터리, 휴대전화 충전기, 나침반, 조그만 손전등이 들어있는 작은 크로스백을 어깨에 걸쳤다.

 길가에 보이는 대부분의 건물은 2층 혹은 3층 정도였으며 큰 길가의 건물들은 4층 이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수십 층의 빌딩들이 심심치 않게 보여 길을 잃을 때마다 이정표로 삼기 좋을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가 들어가게 된 상당한 크기의 지하 1층의 대형마트, ‘숍라이트’에서 20랜드, 즉 한화 2,000원 가격대의 포도주들을 한참 감상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천국인 것 같다.

 맥주도 찾아보았으나 안 보여서 음료수를 사서 나온 뒤 지나갔던 교차로를 몇 번 재회하는 불상사를 겪고 결국 오전 중에 케이프타운 기차역에서 장거리 버스 터미널 표지를 발견하여 빈트후크로 향하는 9월 2일 화요일에 출발하는 ‘인터케이프’ 회사의 버스표를 800랜드에 구입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독특하면서도 씁쓸한 풍경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인터케이프 버스표 판매소 옆에 다른 버스표 판매소가 있었는데 마치 운영을 안 하는 것처럼 철창이 내려가 있고 철창 사이의 구멍으로 돈과 표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돌아다니면서 지나쳤던 어느 옷가게도, 어느 잡화점도 마찬가지로 철창을 내린 채 운영하는 곳이 있었다. 아무래도 치안 때문에 그러는 것 같은데, 참 여러모로 불편하군 그래.


 목적을 달성한 뒤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기로 했다. 어느 사거리에서 모퉁이를 도는데 난데없이 금관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세 명의 학생이 각자 칠이 벗겨지고 조금씩 찌그러진 트럼펫과 트롬본을 연주하고 있다. 합주는 매우 훌륭했다.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연달아 세 곡을 감상하다가 발을 옮겼다.


 테이블 마운틴이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디스트릭트 6 구역까지 가볍게 산책하다 돌아오는 길에 케이프타운에 들어올 때부터 신경 쓰였던 건물에 다가갔다.

 거대한 성벽이 도시 외곽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도를 보니 ‘굿 호프 성’이라고 적혀 있다.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저 성벽 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를 찍고 있는 서양인이 보였다.

 좋아, 저기 멋진 군인 아저씨가 총을 든 채 들어가는 길을 지키고 있군.

 “안녕하세요, 안에 좀 들어가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선생님. 이 길을 지나서 성벽을 따라 왼쪽으로 간 뒤 벽이 꺾어지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선생님 오른쪽에 입구가 보일 겁니다.”

 ‘선생님’이라니. 왠지 굉장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인걸. 감사인사를 한 뒤 알려준 길로 가니 굉장한 성문이 보인다.

 “학생은 15랜드예요.”

 학생이라고 말도 안 했는데 먼저 학생으로 봐주시네. 고맙습니다. 일반 입장료는 30랜드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4시에 닫으니까 빨리 보셔야 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현재 시각 3시 20분, 아마 충분하겠지. 목표는 성벽 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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