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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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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May 09. 2016

#1. 이렇게 죽는 건가 (2)

2014.10.03.~10.04. 탄자니아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서 샤워와 정리를 한 뒤 11시경,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다시 1층에 있는 만남의 장소에 모였다. 저녁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셋은 나란히 바깥에 나와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간판조차 없고 천막으로 입구가 둘러진 펍에 들어섰다. 내부에는 의자도 없이 원형 탁자가 몇 개 있었고, 어느 정도 깊은 안쪽에는 무대처럼 올라간 단상이 있었다. 굳이 밤 12시가 다 된 시각에 아프리카 현지의 문화를 즐기고자 하는 낭만은 셋 중 어느 누구에게도 없었으므로 우리는 마시고 남은 병을 다음 날 오전에 가져다주는 조건으로 맥주 일곱 병을 테이크아웃했다.

 그렇게 우리는 숙소 킬리만자로 백패커스 1층에 각각 벤치와 나무토막 등을 차지하며 둘러앉았다. 셋 중 한 명인 류이치 씨는 턱수염을 검지 두 마디 정도로 기른 20대 중반의 젊은 청년이었다.

 “한국은 나이 제도가 특별하던데 그건 어떻게 계산하는 거야?”

 “우리는 모두 같은 날에 나이를 먹어요, 1월 1일이요. 그래서 예를 들면, 중학교 2학년 교실에 가면 모든 학생이 똑같이 열다섯 살이에요.”

 “그럼 한국에서는 생일이 중요하지 않은 거야?”

 “아니요. 생일은 중요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챙겨요. 하지만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특별하게 여기는 것이고 나이가 올라간다는 생각은 그리 많이 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사람의 나이는 모르게 되는데? 아, 한국의 나이는 어차피 다 같이 올라간다고 했지.”

 “네, 그러면 일본에서는 같은 학급 학생들의 나이가 서로 다를 텐데 그래도 반말로 이야기하고, 친구가 되고 하는 건가요?”

 “응, 내가 열네 살이고 이 녀석이 열다섯 살이라도 친구인 거지. 음, 사실 우리는 이렇게 많이 말하는 편인 것 같아. ‘올해 열다섯이 된다.’라고.”

 “하긴 그렇게 이야기하면 한국이랑 똑같네요. 그래서 보통 태어난 연도로도 이야기하죠. ‘92년생이다.’라고.”

 “맞아, 맞아. 우리도 태어난 연도로 이야기하기도 해. ‘92년생이다.’라고도 하고, 조금 예스럽게는 ‘헤이세이 4년생이다.’라고도 하고.”

 “그 표현은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일본인은 그걸 다 외우나요?”

 “종종 헛갈리는 녀석들은 있지만 보통은 다 알고 있지. 달력에 적혀있기도 하고.”

 맥주가 한 모금 넘어갔다.

 “실은 조금 전에 한 교실에 들어가면 모든 학생의 나이가 같다고 했는데, 학기 시작 전에 태어난 아이들은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남들보다 나이가 어리기도 해요.”

 “아, 그런 거 일본에도 있어. 1월, 2월, 3월생들은 또래보다 1년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거.”

 “그래요?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네요. 한국은 3월 2일부터 학기가 시작해서 1월이나 2월에 태어난 아이들은 학교에 일찍 들어가요. 최근에는 그렇게 입학하는 경우가 없어졌지만요.”

 “그렇구나. 그런데 개학이 3월이라니. 춥지 않아?”

 “추운 편이긴 하지만, 글쎄요. 대신 우리는 12월에는 방학을 하는 편이에요. 물론 중학교나 고등학교, 최근에는 초등학교에서도 방학 때 학교에서 수업을 한다고는 하지만요. 일본은 개학이 4월이었나요?”

 “응, 4월이기는 한데 학교마다 날짜가 조금씩 달라. 4월 초에 하는 경우도 있고, 중순에 하는 경우도 있고, 사립인지 공립인지에 따라서도 다르고.”

 이후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1층을 맴돌다 사라져 갔다. 그것들은 어느 남자의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이기도 했고, 직장을 관두고 세계일주 중인 바람과 같은 이야기이기도 했으며, 때때로 진중해지는 한일 문제 이야기이기도 했다.

 우리의 수다는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잠잠해졌다.


 여행자들의 아침은 부산했다. 조식 시간은 6시 반부터 10시까지로 빵과 밀전병, 그리고 딸기잼, 땅콩잼, 꿀, 버터, 오렌지주스, 우유 등이 준비되어있었다. 식당은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어 매우 넓었고, 숙소 입구 방향의 한 쪽 벽이 통째로 뚫려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어 테라스와 같은 이미지를 주었다. 바깥으로는 활기찬 거리와 모시의 풍경이 보였다.

 어제 같이 식사를 했던 38세 형, 그리고 치에미 씨와 함께 모서리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쳐 드는 매우 한가로운 시월의 주말이었다.

 “형은 결혼했어요?”

 “응, 부인은 일본에 있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렇게 멀리까지 혼자 와서 돌아다니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

 “음, 혼나기도 하지만.”

 “하지만?”

 “남자는 원래 애거든. 혼나면서 크는 거지.”

 셋은 각자 딸기잼과 버터를 바른 밀전병을 입에 넣고 히죽거렸다.

 “매년 두 번씩은 나오다 보니 이제 적응된 모양인지, 그냥 포기한 건지, 잘 다녀오라고 하더라고.”

 “그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가만히 듣던 치에미 씨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아, 결혼한 남녀의 삶이라는 게 항상 고난의 연속인 게야.”

 “왜 부인 분이랑 같이 안 다니시고요.”

 “그 사람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러는 치에미 씨는 만나는 사람 없어?”

 치에미 씨는 주스를 한 모금 넘기고는 입을 떼었다.

 “하긴, 제 애인도 일본에 있네요. 오래 만나지는 못 했지만.”

 “왜? 무슨 일 있어?”

 “올여름에 캄보디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만나서 그 뒤로는 메신저나 전화밖에 못 하고 있어요.”

 38세 형은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캄보디아에서 무슨 봉사하면서 만났는데?”

 “집 짓는 것도 도우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어요. 거기서 처음 일주일 동안 같이 일하면서 사귀게 됐는데, 사귄 지 일주일 만에 서로 갈라지게 되어서 그 사람은 일본에 있고, 저는 보시다시피 여행 중이에요.”

 “와, 대단하다. 초장거리 연애네?”

 “네, 얼굴을 오래 보지는 못 했더라도 의지할만한 사람이어서 참 좋아요.”

 당찬 모습의 그녀에게서 얼핏 그리움과 같은 표정이 보였다.

 새로운 장소에서 사람을 만나고, 다시 다른 곳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수많은 인연의 자락 속에서 종종 끈끈하게 이어지는 존재들이 있다. 일상이 아닌 곳에서 만난 사람이 자신의 일상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경험은 매우 독특한 형태의 희열을 제공한다. 혼자 여행 혹은 특별한 활동을 하여 그것에 대해 교류할 사람이 없으면, 종종 자신에게 있었던 그 빛나는 추억들을 인지하지 못할 기억의 저 편에 묻어두고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있다. 하지만 그 추억을 함께 나눌 사람이 항상 곁에 있게 되거나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이가 되면 그 추억이 일상에 다채로운 색을 입히곤 한다. 그녀가 자신의 나라에 귀국한 이후의 일상은 그렇게 다채로운 색에 둘러싸여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식사 이후 각자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치에미 씨는 1층에서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난 방에 들어가 선풍기 아래에서 여유를 만끽했다. 형은 아무래도 다시 잠을 자러 들어간 모양이다.

 늦은 오후가 되어 우리 셋은 어제의 중국 식당에 들러 치킨 볶음국수, 밥과 함께 나오는 칠리 치킨, 야채를 곁들인 소고기를 시키고는 혼자 앉아 식사를 기다리던 27살의 일본인과 합석했다. 그는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영어로 수학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던 중 모시에 혼자 여행을 왔다고 했다.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항상 세상은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그건 마치 어릴 적의 어느 겨울밤, 할머니에게 듣던 옛날이야기와도 비슷했고, 성인이 되고 나서 초등학교 때의 담임 선생님을 만나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며 듣는 세상 이야기와도 닮아 있었다. 이런 느낌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이질감이다.

 식당을 나와 드디어 투어 회사 사무실로 향했다. 어쩐지 일행이 넷으로 늘어있었으나 27살의 청년은 숙소를 잡기 위해 우리와 동행할 뿐, 킬리만자로에 올라갈 욕심은 없다고 했다. 도착한 곳은 이름부터 무슨 일을 담당하고 있는 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킬리 클라임버’라는 회사였다.

 “어서 오세요. 킬리 클라임버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정면으로 수많은 등반 사진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단체로 왔는지 스무 명 정도가 모여서 엄지를 치켜든 사진도 있었고, 커다란 태극기를 양 팔로 펼치고 자랑스럽게 웃고 있는 한국인의 사진도 있었다. 오른쪽에는 다양한 종류의 등반루트가 표시된 커다란 킬리만자로 지도가 붙어있었다. 우리와 함께 간 형과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던,  아저씨는 서로 아는 체를 했다. 이 회사는 어제 함께 이야기를 나눈 일본인들이 이용했었던 투어 회사였다.

 “올라가려고 오신 것 맞죠? 혹시 생각한 루트나 날짜 있으신가요?”

 치에미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마챠메 루트로 가고 싶어요. 가능한 빠른 날짜로.”

 “탁월한 선택이군요. 두 분인가요?”

 “맞아요. 언제쯤 갈 수 있을까요?”

 “주말 지나고 이틀 후인 월요일 어때요?”

 치에미 씨는 나를 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표시를 보냈다. 아저씨는 우리를 번갈아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5박 6일 일정의 마챠메 루트, 출발은 월요일 아침으로 하고, 필요한 짐, 그러니까 두꺼운 옷이나 침낭이나 배낭 같은 게 필요해요. 그런 것들은 내일 오전 11시에 챙기도록 하죠. 가이드는 사카라는 사람이 맡을 거예요.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친구죠. 여러분의 여행에는 한 사람당 짐꾼 2명, 즉 총 4명과 가이드 사카, 보조가이드 그리고 전문 요리사가 동행할 겁니다. 두 분을 합하면 총 9명이 되는 거죠.”

 “와, 짐꾼이 일인당 두 명씩이나 필요해요?”

 두 명의 등반에 일곱 명의 인원이 동원된다는 게 너무 많게 느껴졌다.

 “여러분의 큰 배낭도 그 친구들이 들게 될 거예요. 여러분은 작은 가방에 우비나 간식 등 간단히 필요한 것만 넣고 등산하게 될 예정이거든요. 그 밖에도 요리 도구나 텐트 등을 운반해야 하니까 짐꾼이 두 명씩은 필요하죠.”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어 이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다.

 “좋아요. 시간이 된 것 같네요. 가격이 어떻게 되나요?”  

 아저씨는 가볍게 쥔 왼손 주먹을 오른손으로 감싸며 미소를 띠었다. 그는 상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입을 떼었다.

 “협상을 시작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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