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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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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May 09. 2016

#1. 이렇게 죽는 건가 (3)

2014.10.04.~10.05. 탄자니아

 본래 킬리만자로를 올라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금전적인 영향이 컸다. 여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호주에서 생활하고 있던 시절, 인터넷을 통해 찾아본 킬리만자로 등반 비용은 100만 원에서 150만 원 사이를 넘나들었다. 물론 숙박비이나 식비 등 추가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하루에 20만 원 수준의 금액이었다. 동유럽 등 물가가 저렴한 지역에서는 일주일 이상을 생활할 수 있는 비용이 매일 발생한다는 것은 여행 초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현재 눈앞에 있는 상대로부터 저렴하지는 않더라도 적당한 가격이 나오도록 해야 했다.

 치에미 씨는 상당히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전쟁을 선포했다.

 “사람 당 팁 빼고 800달러.”

 생각지도 못 한 가격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보통 이러한 협상은 양쪽에서 제시한 금액의 평균값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만일 일반적인 금액인 1,100달러 내지 1,200달러를 제시했다면 최종 금액은 그보다 올라갈 것이다.

 추가적으로 킬리만자로 투어를 계약할 때, 가이드와 요리사, 짐꾼에게 주는 팁을 미리 한 번에 지불하는 경우와 투어가 끝나고 여행자가 개개인에게 별도로 지급하는 경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역시나 아저씨는 코웃음을 쳤다.

 “농담하는 거요?”

 “그 가격에 올라간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어디에서요?”

 “블로그에서.”

 아저씨는 입을 닫고,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5년은 더 된 금액이에요. 2008년이나 2009년 정도에는 가능했겠지만 물가가 많이 올라갔다고.”

 “그럼 지금은 어느 정도인데요?”

 아저씨는 눈짓으로 우리와 함께 온 38세 형을 가리켰다.

 “저 친구한테 들었을 거 아닌가? 하지만 이번에는 두 명뿐이니까 팁 포함 1,200달러는 받아야겠지.”

 아차, 형한테 미리 물어보는 것을 깜빡했다. 하지만 형은 네 명이 올라갔었으니 아마도 1,100달러나 그보다는 낮았을 것이다.

 “그 가격이면 다른 곳으로 갔죠. 850달러는 어때요?”

 아저씨는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며 등받이에 기댔다. 그리고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원하는 최종 가격을 눈치챈 모양이다.

 “1150, 팁 포함.”

 “900, 팁 포함.”

 “1100, 이제 한계야.”

 “950, 우리도 양보는 못 해요.”

 난 참 대단한 사람을 동료로 두었구나. 어느덧 협상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좋아, 너희가 이겼어. 팁 포함 1050달러로 하자.”

 치에미 씨는 내가 마지막 정리를 할 수 있게 잠시 쉬는 모습을 취했다.

 “에이, 50은 뭐예요. 깔끔하게 1000으로 하죠.”

 “1000은 무리야, 이건 양보할 수 없어.”

 “금액이 너무 지저분한데요. 소개받아서 왔는데 그 정도는 해줘요.”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1000달러로 하자고.”

 “만약 팁을 제외하면 금액이 더 내려가나요?”

 “그렇지, 5퍼센트에서 10퍼센트 정도를 빼니까.”

 치에미 씨와 나는 영어를 멈춘 채, 마주 보고 일본어로 몇 마디를 나누었다.

 “팁을 넣는 게 나을까요, 빼는 게 나을까요?”

 “괜히 따로 사람들 만나서 팁 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더 달라고 할 수도 있고.”

 “그래도 직접 가이드한테 주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계산하는 경우가 보통 있던가요?”

 “그렇긴 하지만 나중에 얼마 줘야 할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지금 내는 게 일단 마음 편할 것 같아요.”

 대화를 마치고 다시 아저씨를 보았다. 그는 환율을 계산하기 위한 계산기를 꺼내고 있었다.

 “오케이, 팁 포함 1000달러요.”


 2014년 10월 4일, 오늘의 환율은 1 미국 달러 당 1,039원이었다. 결과적으로 1,039,000원과 은행 수수료가 킬리만자로 등반을 위한 최종 비용이 되었다. 이 중 500달러는 등산하는 날 매표소에서 입장료로 지불한다고 하므로 오늘 필요한 금액은 나머지 500달러였다.

 문제는 오늘 환율로 1 미국 달러가 1,640 탄자니아 실링이라는 것이다. 즉, 820,000실링을 구해야 하는 데, 탄자니아 실링 지폐의 최고 금액은 10,000실링이다. 다시 말하면 손에 82장의 지폐를 쥐어야 한다는 것이고, 아프리카 한복판에서 82장의 두툼한 지폐 뭉치를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경험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킬리 클라임버는 우리를 은행까지 안전하게 모실 차와 사람을 제공했다. 은행에 돈 가지러 가는 데 차를 제공받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경험의 일종이었으나, 우리는 그 수상한 검은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

 은행은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았으나 모시의 교통체증은 웬일인지 꽤나 심각했다. 10분이 조금 안 걸려 도착한 곳에는, 주말이므로 문을 닫은 은행과, 그 앞에 하나뿐인 ATM기가 있었다. 한 번에 뽑을 수 있는 금액이 최대 200,000실링이었기 때문에 몇 차례 반복한 끝에 원하는 금액을 얻을 수 있었다.

 나와 치에미 씨와 검은 봉고차와 우리의 운전수는 164장의 빨간 10,000실링 지폐를 킬리 클라임버 사무실의 아저씨에게 전달함으로써,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저녁 먹으러 갑시다.”

 내일 오전 11시에 등산장비를 빌리러 다시 킬리 클라임버에 방문하기로 하고 킬리만자로 백패커스에 돌아온 지 어느덧 수 시간이 흘렀다. 38세 형은 방에 틀어박혀 무슨 일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고, 이번 식사 원정대의 구성원은 나와 치에미 씨, 그리고 어떤 우연의 조화인지 나미비아에서 만났던 이십 대 초중반의, 레게 머리를 한 일본인 남자였다.

 레게 머리 남자는 나미비아의 에토샤 국립공원 캠핑장에서 만났었다. 차를 타고 몇 분만 돌아다녀도 수많은 동물을 마주칠 수 있는 에토샤 국립공원의 캠핑장들은 계산대에서 돈을 받고 각 일행들에게 텐트를 칠 수 있는 구역을 제공해 준다. 레게 머리 남자의 일행은 당시 우리 맞은편의 구역을 제공받았는데, 가지고 온 렌터카가 말썽을 일으켜 우리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전직 카센터 직원, 스즈키 유키 형이 차를 고쳐준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문제없이 여행 잘 마쳤어요?”

 “네, 에토샤 여행하고 빈트후크까지 돌아가는 데 아무 문제없었어요. 정말 다행이죠.”

 “제가 한 일은 없지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네요.”

 우리는 숙소 근처의 현지 식당에서 마치 편의점 앞에 있는 동그란 파라솔 탁자 같이 생긴 곳에 음식을 올려놓고 먹고 있었다. 2,500실링짜리 치킨 앤 칩스와 2,000실링짜리 에그 앤 칩스가 오늘의 저녁이었다. 대체적으로 탄자니아에서 현지 식당의 한 끼 식비는 1,500원에서 2,000원 수준이었다. 중국식당이나 고급식당에서는 5,000원에서 10,000원 정도를 지불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보츠와나, 짐바브웨, 모잠비크 쪽으로 통해서 왔어요.”

 “많이 돌아서 왔네요? 모잠비크는 재미있었나요?”

 “음, 글쎄요, 저는 아쉽게도 별로 볼거리는 없었던 것 같아요.”

 이러한 평범한 여행자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지나갔다.

 이후 숙소에 가니 38세 형과 류이치 씨가 나와 있었고, 우리는 또다시 술판을 벌이게 되었다. 나와 38세 형이 밤 8시 55분에 구멍가게에서 맥주 10캔과 화이트 와인 하나를 사와 셋이서 마시다가 레게 머리 남자가 합류하고, 나중에는 치에미 씨까지 깨워서 AKB48을 포함한 일본의 아이돌 및 오오츠카 아이 등의 가수들,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와 요시마타 료, 이후 한국의 에이핑크와 소녀시대, 싸이, 이루마, 장세용 등 장르를 불문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대거 열거되는 진풍경을 벌였다. 나중에 이야기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드라마로 번져 12시 반이 되어서야 각자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우와, 이게 다 뭐야?”

 나와 치에미 씨는 창고 같은 그 공간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38세 형은 밖에서 함께 온 킬리 클라임버의 직원과 장난 중이었다.

 킬리 클라임버에서 차를 타고 도착한 그 시멘트로 만든 허름하고 네모난 건물 안은 온갖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우리한테 필요한 걸 고르는 건가요?”

 함께 온 직원에게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네, 필요한 게 많을 거예요. 산 위는 매우 춥거든요.”

 챙겨야 할 물건은 기능성 티셔츠, 바람막이, 얇은 바지, 두꺼운 바지, 헤드랜턴, 두꺼운 점퍼, 면장갑, 스키 장갑, 등산용 신발, 등산스틱, 우비 등이었다. 하나라도 빠지면 매우 고된 산행이 될 터였다. 나는 사이즈가 맞는 물건을 마치 보물 찾기를 하듯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이었지만 묘하게도 퀴퀴한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 입었는데 풀어지지 않는 지퍼를 도움을 받아 낑낑대며 푸는 등의 몇 가지 사건들을 거친 뒤 숙소로 돌아와 배낭에 들어있던 대부분의 짐을 숙소의 창고에 쑤셔놓고, 우리 셋은 나와 치에미 씨의 등산 전 최후의 만찬을 즐기러 ‘유니언 커피’라는 카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결국 올라가는군요.”

 “드디어 올라가는 거지.”

 나는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날씨는 선선했고 기분은 오묘했다.

 “산 올라가면 뭐가 제일 힘들어요?”

 “나는 고산병이 제일 힘들었어, 그것만 없었어도 좀 괜찮았을 텐데. 약은 잘 챙겨 먹으라고.”

 “고산병 걸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매스껍고, 어지럽고, 열나고, 토하고 싶고, 그런 여러 가지 현상들이 발생하지.”

 “그거 최악이군요.”

 “응, 최악이지.”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피자 두 판을 다 먹고 추가로 주문한 음료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도저히 직원으로는 보이지 않는 한 동양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 일본인이세요?”

 “저는 아니고 여기 두 사람은 일본인이에요.”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아, 다름이 아니고 저랑 제 친구가 사파리를 하려고 하는데요.”

 그녀는 다른 테이블의 한 여자를 가리켰다.

 “일행이 좀 필요해서, 혹시 같이 갈 생각 있으신 분이 계신가요?”

 형은 우리를 슬쩍 보고는,

 “이 친구들은 내일부터 킬리만자로를 올라가기로 해서, 저랑 한 번 이야기해보죠.”

 라며 자리를 떴다.

 “치에미 씨는 기분이 어때요?”

 “저는 킬리만자로에 오르는 게 평생의 소원 중에 하나여서 지금 상당히 기대 중이에요.”

 “꿈 하나를 이루는 거네요?”

 “네!”

 부럽다. 그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이 순간 나는 조연이었다. 그녀는 꿈 하나를 이루기 위한 문턱에 서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선 일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네!”라는 한 마디가 내 마음속의 무언가를 움직이고 있었다.

 내일부터 나에게 일어날 일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소원인 일이다. 나는 그러한 대단한 일을 덜컥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등반에 대한 기대감이 구름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사실, 현실적으로 와 닿지가 않았었다. 아마도 그저, 주말에 어머니와 올라가던 어느 동네의 어느 산 정도로 생각했거나, 혹은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고, 내일이 지나면 모레가 오는 그런 한 일상의 일부 정도로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일은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이 일은 충분히 기대할만한 일에 속했다.

 “우리 낙오하지 말고 열심히 해봐요.”

 “좋아요, 파이팅!”

 나는 내일 킬리만자로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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