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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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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May 22. 2016

#1. 이렇게 죽는 건가 (4)

2014.10.06. 탄자니아

 짐 정리는 상당한 고역이었다. 짧은 청바지, 긴 청바지, 기능성 반팔 티셔츠 두 장, 기능성 긴팔 티셔츠 두 장, 기능성 바지, 넷북, 넷북 충전기, 카메라, 카메라 배터리, 카메라 충전기, 외장하드, 반팔 면 티셔츠 여러 장, 긴팔 면 티셔츠 여러 장, 남방 세 장, 트레이닝 복 두 벌, 나침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빨대 형 휴대용 정수기, 모기향, 말라리아 약을 포함한 각종 상비약, 휴대전화 충전기 두 개, 콘센트 변환 플러그 여러 개, 휴대전화 배터리, 볼펜 형 손전등, 다용도 나이프, 일기장, 수첩, 여권 사본 십여 장을 포함한 각종 서류 및 대충 짠 여행 일정표, 비닐봉지 여러 장, 속옷 여러 장, 양말 여러 장, 모자, 손수건, 일회용 우비, 3단 우산, 목 베개, 담요, 텐트, 여름용 침낭, 두꺼운 침낭, 빨랫비누, 세면도구, 여행용 소형 화장품들, 컵, 소형 버너, 소형 냄비, 분실 방지용으로 벨트 고리에 매는 지갑, 카드와 수 백 달러 상당의 미화 및 여권 등 귀중품을 넣어 놓는 복대, 행여 도둑을 만났을 때에 대비한 위장용 동전 지갑 등 다양한 소지품들 중에서 꼭 필요한 것만 챙겨야 했다.

 따라서 진통제와 매주 먹어야 하는 말라리아 약, 류이치 씨에게 받은 고산병 약, 속옷 다섯 장과 양말 다섯 켤레, 기능성 긴팔 티셔츠와 기능성 반팔 티셔츠 한 장씩, 카메라, 휴대전화 배터리, 복대와 그 안의 물건들, 두꺼운 침낭을 제외한 모든 물건은 숙소에 두고 가기로 하였다. 산 위에서 충전이 될 리가 만무했기 때문에 휴대전화는 꺼두고 사진은 디지털카메라만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또한 그밖에 필요한 것들은 어제 빌려 온 물건들로 충분할 것 같았다.

 치에미 씨와 나는 우비, 약, 장갑, 손수건, 헤드랜턴, 바람막이를 각자 킬리 클라임버에서 제공받은 작은 가방에 넣고 등산 스틱을 가방 옆에 매달아 놓은 뒤, 나머지 두꺼운 옷과 침낭을 가지고 있던 서로 가지고 다니던 큰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기능성 반팔 티셔츠와 햇빛 가리개용 모자, 어제 빌려온 얇은 바지를 입고 출격 준비를 마쳤다.


 9시 45분에 숙소 앞으로 사람들이 왔다. 우리와 여행을 함께할 가이드와 보조 가이드, 요리사, 짐꾼 네 명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만나자마자 오늘의 점심이라며 준비해 준 도시락을 건네받고는, 그들이 가지고 온 차를 타고 텐트를 빌리는 곳에 가서 그들이 텐트를 빌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다시 차에 올라 킬리만자로로 향했다.


 “와, 사람 많네요.”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넓은 주차장과 흰 건물의 매표소, 그리고 등산로 입구가 있는 곳이었다.

 “여기는 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건가?”

 그곳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용인의 한 놀이공원의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저기 보이는 쉼터에 올라가 있어요. 입장료를 낼 시간이 되면 데리러 갈게요.”

 사카 씨는 등산로 입구 옆에 보이는 쉼터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과, 또한 적지 않은 원숭이들이 있었다.

 쉼터에서 적당한 자리를 차지한 치에미 씨는 도시락을 열었다.

 “이거 꽤 괜찮은데?”

 도시락 안에는 버거빵과 고기, 버터, 케첩, 닭고기, 바나나, 망고주스, 머핀, 초콜릿 쿠키, 삶은 계란이 들어있었는데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을 깨끗이 비웠다. 단 하나, 삶은 계란은 지나가던 원숭이에게 빼앗겼다. 그녀는 원숭이가 들고 가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이내 포기한 듯 시선을 돌렸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매표소에서 카드로 500달러를 결제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다시 수십 분을 기다린 뒤, 오후 2시가 되어서 겨우 출발하였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은 따뜻했다. 갖가지 나무들과 풀들이 우거진 산속에서 길은 여느 등산로처럼 잘 닦여 있었고, 올라오는 흙냄새와 지저귀는 새소리가 잔잔한 봄바람처럼 다가왔다 사그라졌다. 서정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런 상황에서 딱 하나 불편한 점이 있었다.

 어깨가 아팠다.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으나 가방을 잘 못 골라 힘들었다. 매고 있는 가방은 군대에서 쓰는 군장처럼 등에 닿는 부분에 철판이 들어 있었는데, 찌그러진 부분이 있는지 자세를 아무리 고치고 끈을 조절해 보아도 계속해서 작은 진통이 왔다. 아픔을 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수다였다.

 “치에미 누나, 높은 산 올라가 본 적 있어요?”

 어느샌가 반말을 하고 있는 치에미 누나가 대답했다.

 “아니, 고산병이 날 만큼 높은 산은 올라가 본 적 없는데.”

 “고산병이 해발 3,000m 정도부터 생기죠?”

 “응, 나는 그렇게 들었어.”

 “후지산이 4,000m 정도 되지 않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올라가 본 적은 없어. 그보다도 내 주변에 후지산 올라가 본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유명한 만큼 많이 올라가지는 않는가 보군요?”

 “응, 아래에서 본 적은 있지만 정상까지 가는 사람은 많이 없는 것 같은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야. 고산병도 걸린다고 하고.”

 누나는 외투를 벗어 허리에 묶고,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 보였다.

 “힘들어요?”

 “오늘 왠지 몸이 좀 안 좋네.”

 “물 좀 마시면서 천천히 가죠.”

 다른 일이 생겼는지 우리 먼저 올라가라고 한 사카 씨 대신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보조 가이드는, 잠시 후 휴식을 취하자고 하며 볼일을 보러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국에도 산이 많잖아. 높은 산은 없어?”

 “가장 높은 산은 제주도에 있는 한라산인데 2,000m 가 조금 안 돼요. 하루면 다녀올 수 있고, 고산병에 걸리기에는 너무 낮죠. 북한에 있는 백두산이 한반도에서 제일 높지만 역시 3,000m 는 안 돼요.”

 북한 이야기가 나오자 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자기 나라 이야기를 할 때 북한도 포함시켜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언젠가 합쳐질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요. 물론 현재는 일반적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지만.”

 나는 살짝 묘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서 한국 지도를 그려보라고 했을 때 보통 한반도를 그리지, 남한만 그리는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네요.”

 “한국 사람들은 통일을 하고 싶어 해?”

 “그런 사람도 있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어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통일을 하고 나면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보니 더 그렇겠다고 해요. 일본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데요?”

 “사실 뭐,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한국이랑 북한은 전혀 별개의 나라라고 보는 것 같아. 정말 언젠가는, 혹시라도 합쳐질지 모르겠지만 보통 그런 상황이 과연 오긴 하는 걸까 생각하지. 나라는 부르는 말 자체도 칸코쿠(한국(韓國))랑 키타조센(북조선(北朝鮮))으로 완전히 다르니까.”

 보조 가이드가 돌아와 다시 길을 걸으면서도 통일에 대한 서로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이어졌다. 자국에 대한 이야기를 외국인과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그것은 때로는 무지에서 오는 영양가 없는 관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너무 문제의 깊숙이 들어와 살고 있어, 넓은 숲을 보지 못해 생기는 객관성의 결여를 보충해 주는 관점이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종종 화가 나는 경험이 되기도 하지만 보통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이다.


 야영지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6시 반이었다. 참 신기했던 것은 언제 올라와서 언제 준비했는지 이미 우리의 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텐트 안에는 그리 고성능은 아니지만 만족할만한 매트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우리가 오전에 짐꾼들에게 맡긴 배낭들이 살포시 올라가 있어 마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느낌을 선사했다. 치에미 누나와 내가 각자의 텐트에 들어가 쉬고 있으니 어느샌가 도착한 사카 씨가 텐트 문을 빼꼼 열어보고는 얼굴을 씻을 수 있는 물을 파란색 작은 바가지에 담아왔다.

 “저녁 준비가 되었어요.”

 그 말에 나는 일어나 치에미 누나의 텐트로 향했다. 이미 매우 어두워진 상태여서 전등을 들고 나서야 했다. 밖은 어떠한 불빛도 없었고 바로 앞에 있는 손조차 분간하지 못할 만큼 매우 어두웠다.

 우리는 각자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적당한 상태였고 샤워는 하지 못했지만 기분은 꽤나 상쾌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따뜻한 감자 수프, 식빵, 땅콩잼, 정수제를 탔는지 맛이 이상한 뜨거운 물, 커피 가루, 밀크티 가루 등이 잇따라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비록 주변 환경은 그리 호화롭지 못했으나 차려진 숙소에 따뜻하게 차려진 식사, 거기에 친절한 배달 서비스까지 더해져 마치 엄청난 대접을 받고 있는 기분이 계속 들었다. 우리는 작은 가방 하나씩 매고 필요하면 등산스틱까지 이용하며 천천히 걸어왔지만 그들은 냄비와 버너, 접시들을 포함한 식기들과 물, 식량, 우리의 배낭까지 짊어진 채로 빠르게 올라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텐트 설치를 하고 식사 준비를 하느라 매우 고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슬그머니 존경심과 미안함이 함께 나타나 마음을 간질였다.

 현재 고도는 해발 3,000m, 나는 밤 11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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