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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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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Jun 19. 2016

#1. 이렇게 죽는 건가 (5)

2014.10.07. 탄자니아

 오전 6시 20분. 텐트의 지퍼가 스르륵 열렸다. 싸늘한 새벽 공기와 함께 들어온 검은손은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과 차, 설탕을 내려놓고는 알아서 물을 종이컵에 붓고 설탕과 차를 넣은 뒤 휘휘 저어놓고 나갔다.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손은 컵을 향했고, 눈은 열려있는 지퍼를 향했다. 아직 바깥은 어두웠지만 아스라이 동이 터 오는 게 느껴졌다.

 잠시 뒤 얼굴을 씻을 물이 바가지에 담겨 왔다. 적당한 온기를 가지고 있어 기분 좋은 포근함을 선사했다.

 신기하다.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반팔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채 더위를 쫓아내고 있었는데 20시간도 안 되어 이제는 따뜻한 물을 반기고 있었다. 지퍼를 크게 열자 박하를 머금은 듯 상쾌한 공기가 텐트 안을 파랗게 적셨다.


 아침 식사는 마치 흰 죽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단 맛이 꽤 강했다. 다행히 입맛에 맞아 깨끗하게 비울 수 있었다. 저녁때와 마찬가지로 식사는 치에미 누나의 텐트에서 했다. 이렇게 둘이 마주 앉아 감지도 못 한 머리를 한 채 죽을 들고 먹고 있으니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극기 훈련을 갔던 기억이 되살아 나 살짝 코웃음이 나왔다.

 “왜?”

 누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커피를 마시다가 웃는 내 얼굴을 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학생 때 친구들이랑 놀러 갔던 게 생각나서요.”

 다녔던 중학교는 매년 신입생이 들어올 때마다 오리엔테이션 명목으로 극기 훈련을 가곤 했다. 그때는 정말 미치도록 가기 싫었는데 지나고 나면 재미있던 사건, 사고만 기억에 남는 걸 보면 참 아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이미 내가 누웠던 텐트는 다 정리된 이후였다. 사카 씨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니 손짓을 했다.

 “얼른 갑시다! 빨리 나와야 이 친구들도 정리하고 출발해요.”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어제 있던 텐트의 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다. 저 멀리 바라보니 이미 한참 전에 출발하여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치에미 누나도 곧 나왔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출발 전부터 등산 스틱을 손에 쥐고 있었다.

 “당신도 스틱 들고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오늘은 어제보다 힘들 테니.”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단 걸어보고 생각할게요. 손이 자연스럽지 못 한 건 별로 안 좋아해서.”

 사카 씨는 씩 웃어 보이고는 앞장섰다.

 “좋아요. 오늘도 가봅시다.”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나는 스틱을 두 손에 꼭 쥐고 있게 되었다. 길은 울퉁불퉁한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울창했던 나무들은 언제인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대신 키 작은 나무들이 주변을 온통 덮고 있었고 그 위로 안개가 라테의 우유 거품처럼 산길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더 가다 보니 설상가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경이 자꾸 뿌예져서 앞으로 나가는 데 걸리적거렸다. 가방은 재킷으로 대충 덮은 채 길을 걸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앞장서고 있는 사카 씨도 종종 뒤를 돌아볼 뿐 입을 열지 않았고, 치에미 누나는 맨 뒤에서 걷던 나를 앞으로 보낸 뒤, 스틱에 의지한 채 뒤에서 느릿느릿 따라오고 있었다.

 한 시간 여가 더 흐르자 비가 장대처럼 쏟아졌다. 나는 결국 가방을 열어 우비를 꺼냈다. 사카 씨와 치에미 누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우비를 입는 나를 기다렸다.

 주위를 덮는 것은 다른 일행들의 발소리와 시원하고도 무겁게 퍼붓는 빗소리뿐이었다. 종종 손을 사용하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는 가파르고 험한 길도 나타났다. 이제 흙길은 찾아볼 수 없고 사방에는 돌과 작은 식물들뿐이었다. 사카 씨는 이제 꽤나 멀찍이 앞에서 걷고 있었고 치에미 누나 역시 꽤나 뒤쳐져있었다. 나는 그 중간에서 잠시 멈춰 주변을 보았다.

 안개에 덮인 킬리만자로의 중턱. 길이라고 부르기에도, 또 길이 아니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한 울퉁불퉁한 돌길. 시야를 가리는 장대비. 허리 정도까지 오는 녹색 식물들. 불현듯 동양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다가 아지랑이처럼 사라져갔다. 그러면서도 이 지구 위에 마치 혼자 있는 느낌이 허우룩하게 다가오다가 빗소리에 깨어 지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카 씨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치에미 누나는 거의 나를 따라잡고 있었다. 다시 부지런히 발을 떼었다.


 1시 반에 해발 3,900m에 위치한 야영지에 도착했다. 통나무로 된 건물에 들어가 이름을 쓰고 사인을 한 뒤 사카 씨의 안내를 받아 이미 설치된 텐트들의 숲으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나와 치에미 누나의 텐트는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전혀 눈치 채지 못 한 사이에 짐꾼들이 먼저 올라와 설치까지 완벽하게 끝내 놓은 것이다. 정말 매 순간 신선함의 연속이었다.

 텐트에 들어 가 젖은 옷 위에 점퍼를 입고 몸을 녹이고 있으니 점심 식사가 준비됐다는 연락이 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치에미 누나의 텐트에 기어들어가 식사를 기다렸다. 아침에는 서로 머리가 떡이 되어 앉아있었는데 마치 그 바로 다음 장면인 양 이제는 머리를 감고 와서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의 물기를 닦고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말리고 나니 더 그럴싸한 꼴이 되었다. 물에 젖은 끈적끈적한 기분이 아니라 샤워를 마치고 나온 상쾌한 기분이 더 강했다. 

 “푸훗.”

 이번에는 아침과 다르게 서로 보고 웃었다.

 “꼭 샤워한 거 같네요.”

 “그러게 말이야.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

 밖에 내리는 빗소리는 참 맑았다. 평소처럼 점심식사가 지퍼가 열린 부분을 통해 들어왔다. 스파게티, 빵, 수박 등이었다. 갑작스러운 수박의 등장이 알게 모르게 품고 있던 긴장감을 녹여주었다.

 “와, 여기에서 수박을 먹네. 집에 있는 것 같아.”

 “나도 지금 똑같은 생각했는데.”

 우리는 더 킬킬대다가 느긋하게 식사를 마쳤다. 나는 나의 텐트로 돌아와 젖지 않은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잠을 청했다.


 저녁 6시가 되자 사카 시가 다시 텐트 지퍼를 열면서 나를 깨웠다.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이라고 한다. 참 태평한 일과였다. 먹고, 자고, 먹고.

 치에미 누나 텐트로 들어서니 이미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참 반갑게도 쌀밥이 나왔다. 어제 저녁, 오늘 아침, 점심, 저녁 네 번의 식사 중 처음으로 밥이 나오니 하루 종일 가지고 있던 동양적인 느낌이 다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누나, 일본 학생들은 도시락 먹어요, 급식 먹어요?”

 “나는 초등학교 때랑 중학교 때는 급식 먹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도시락이었어.”

 “다들 그랬어요?”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다 그랬던 것 같은 데, 지금은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감자로 만든 것 같긴 한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반찬과 역시 감자가 들어간 것 같은데 이름 모를 국이 꽤나 입맛에 맞아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소풍 도시락은 어때요? 한국에서는 보통 김밥 싸주실 때가 많고, 유부초밥 혹은 오므라이스도 종종 싸주시는 편인데. 저는 어릴 때 김밥을 별로 안 좋아해서 오므라이스가 주였지만.”

 “일본이랑 비슷하다. 오므라이스 많이 싸줘. 하지만 김밥은 보통 안 싸주는 것 같아. 대신 주먹밥을 챙겨가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는데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물에서는 생강 달인 냄새와 맛이 났다.

 “남녀 데이트 때도 도시락 만들어서 놀러 가기도 해요?”

 컵을 내려놓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치에미 누나는 그런 내 모습에 살짝 웃더니 대답했다.

 “그럼. 종종 그렇지. 항상 여자가 만들지만.”

 “남자는 도시락 안 만들어요?”

 “안 만들어. 남자가 도시락 싸면 좀 이상해.”

 “이상하다니. 그 정도예요?”

 “응, 집 요리는 가끔 할 수도 있겠지만 도시락은 무조건 여자가 만들어.”

 “남자가 도시락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일본 남자들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고.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별로일 것 같아.”

 치에미 누나의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겠지만 일본 내 남녀 관계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 번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일반화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이전에 만났던 일본 사람들 역시 개방적인 사람에게라도 어느 정도 남녀 역할 분담에 대한 시선이 느껴졌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가사에 대해서는 꽤나 명확하게 선을 긋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수차례 있었다.

 식사가 마무리되어가자 사카 씨가 적당한 때에 귀신같이 들어오고, 내일의 일정에 대해 꽤 긴 이야기를 한 뒤 나갔다.

 “뭐라고 한 거야?”

 “내일은 오늘보다 많이 걸을 거래요. 새벽에 일어나서 점심때까지 4,600m로 올라가고, 오후에 다시 3,940m까지 내려와서 야영할 거래요. 슬슬 고산병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약 있으면 챙겨 먹고 물 많이 마시고 몸 관리 잘하고 잘 먹고 푹 쉬어야 한다고 했어요. 누나 약 먹고 있어요?”

 “응, 출발하기 전 날부터 먹고 있어. 너는?”

 “저도 어제부터 먹고 있어요. 4,000m 가까이 왔는데 다행히 아직 증세가 나타나지는 않네요.”

 “반 알씩 먹고 있어?”

 “네. 저녁마다 반 알씩이요.”

 킬리만자로 백패커스에서 고산병 약으로 받아 가지고 있는 ‘Diamox’는 사실 이뇨제이다. 따라서 혈중 산소함량을 높여주지만 소변 량이 늘어나 등산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또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서 주의 깊게 복용하고 있었다. 이미 복용하고 있는, 술보다 간에 더 악영향을 미친다는 말라리아 약도 있었기 때문에 다이아목스까지 많은 양을 복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도 물 많이 마시고 푹 쉬어.”

 그 생강 맛나는 물은 사실 한 모금도 더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볼게요. 잘 자요.”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별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텐트를 젖히고 들어가 몸을 뉘었다. 낮잠을 오래 자서인지 정신이 매우 멀쩡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긴 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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